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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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년)에 [[정현|혜소국사 정현(慧炤國師 鼎賢)]]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서 글은 [[김현|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민상제(閔賞濟)]]가 썼으며,<ref>"[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C%84%B1_%EC%B9%A0%EC%9E%A5%EC%82%AC_%ED%98%9C%EC%86%8C%EA%B5%AD%EC%82%AC%EB%B9%84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글자를 새기는 일은 [[배가성|배가성(裵可成)]]·[[이맹|이맹(李孟)]] 등이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530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년)에 [[정현|혜소국사 정현(慧炤國師 鼎賢)]]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서 글은 [[김현|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민상제(閔賞濟)]]가 썼으며,<ref>"[https://ko.wikipedia.org/wiki/%EC%95%88%EC%84%B1_%EC%B9%A0%EC%9E%A5%EC%82%AC_%ED%98%9C%EC%86%8C%EA%B5%AD%EC%82%AC%EB%B9%84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위키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글자를 새기는 일은 [[배가성|배가성(裵可成)]]·[[이맹|이맹(李孟)]] 등이 하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530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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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해지는 이야기<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4880000,31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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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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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는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와 비신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이수가 귀부 위에 놓여 있고, 그 옆에 비신을 철제 틀로 고정하여 세워 놓은 상태로 한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신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가운데가 절단되었고 왼쪽 부분에 손상이 많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49 칠장사혜소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원.</ref>  
 
비는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와 비신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이수가 귀부 위에 놓여 있고, 그 옆에 비신을 철제 틀로 고정하여 세워 놓은 상태로 한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신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가운데가 절단되었고 왼쪽 부분에 손상이 많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49 칠장사혜소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원.</ref>  
 
====전해지는 이야기<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4880000,31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비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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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의하면, 국사의 이름은 [[정현|정현(鼎賢)]], 속성은 이씨이고 10세에 [[보은 광교사|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충회(忠會)]]에게 구법(求法)하였으며 17세에 [[개성 영통사|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具足戒)<ref>비구와 비구니가 받아 지켜야 할 온전한 계율.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7415&ref=y&cid=50292&categoryId=50292 구족계]",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를 받았다. 28세에 칙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41세에 중대사(重大師), 60세가 넘어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리고 1046년에 자수승가리일령(紫繡僧伽梨一領)과 금첩법의일령(錦貼法衣一領)이 하사되었고, 1054년 세수 83세, 승랍 74세로 입멸하였다는 등 그의 행적을 적었고, 후미에는 대사를 기리는 명문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530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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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문에 의하면, 국사의 이름은 [[정현|정현(鼎賢)]], 속성은 이씨이고 10세에 [[보은 광교사|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충회(忠會)]]에게 구법(求法)하였으며 17세에 [[개성 영통사|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具足戒)<ref>비구와 비구니가 받아 지켜야 할 온전한 계율.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897415&ref=y&cid=50292&categoryId=50292 구족계]",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를 받았다. 28세에 칙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41세에 중대사(重大師), 60세가 넘어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리고 1046년에 자수승가리일령(紫繡僧伽梨一領)과 금첩법의일령(錦貼法衣一領)이 하사되었고, 1054년 세수 83세, 승랍 74세로 입멸하였다는 등 그의 행적을 적었고, 후미에는 대사를 기리는 명문이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530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 [[정현|혜소국사]]의 모친이 보현보살 500탱을 조성하고 빌어 [[정현]]을 낳아 출가하여 [[안성 칠장사|칠장사]]의 [[융철|융철(融哲)]]에게 배우고 오교대선(五敎大選)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현종]]의 우대를 받고 [[덕종]]은 [[원주 법천사지|법천사((法泉寺))]]에 주석하도록 하였으며, [[정종]]은 [[개풍 현화사|현화사(玄化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고 절 앞에 음식을 마련하여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문종]] 때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으며 왕사와 국사에 연이어 책봉되었다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49 칠장사혜소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원.</ref>
 
 
비문의 내용은 혜소국사의 모친이 보현보살 500탱을 조성하고 빌어 국사를 낳아 출가하여 칠장사의 융철에게 배우고 오교대선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잡은 비둘기나 물고기를 사서 방생하기도 하고 현종의 우대를 받고 덕종은 법천사에 주석하도록 하였으며, 정종은 현화사에 주지하도록 청하였고 절 앞에 음식을 마련하여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뉘 주고 문종 때는 금광명경을 강의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으며 왕사와 국사에 연이어 책봉되었다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3149 칠장사혜소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원.</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5월 30일 (화) 15:18 판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BHST Stele.png
대표명칭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영문명칭 Stele for State Preceptor Hyeso at Chiljangsa Temple, Anseong
한자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주소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2
문화재 지정번호 보물 제488호
문화재 지정일 1968년 12월 19일
찬자 김현(金顯)
서자 민상제(閔賞濟)
각자 배가성(裵可成), 이맹(李孟)
승려 정현(鼎賢)



정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사(七長寺)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정현(鼎賢)의 탑비.

내용

개요

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년)에 혜소국사 정현(慧炤國師 鼎賢)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서 글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賞濟)가 썼으며,[1] 글자를 새기는 일은 배가성(裵可成)·이맹(李孟) 등이 하였다.[2]

전해지는 이야기[3]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탑비

탑비의 비신(碑身) 높이는 3.4m, 폭은 1.28m이고, 비신의 양면에는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범(虎) 비슷한데, 비늘이 있다는 짐승인 이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비신 위에 올려지는 부분인 이수(螭首)에는 거북과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물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이것은 비의 주인공인 혜소국사의 영혼을 천상세계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며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4]

비는 현재 귀부(龜趺)와 이수와 비신이 따로따로 분리되어 이수가 귀부 위에 놓여 있고, 그 옆에 비신을 철제 틀로 고정하여 세워 놓은 상태로 한 비각 안에 보존되어 있다. 비신의 보존 상태는 비교적 양호하나 가운데가 절단되었고 왼쪽 부분에 손상이 많다.[5]

비문

비문에 의하면, 국사의 이름은 정현(鼎賢), 속성은 이씨이고 10세에 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忠會)에게 구법(求法)하였으며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具足戒)[6]를 받았다. 28세에 칙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41세에 중대사(重大師), 60세가 넘어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리고 1046년에 자수승가리일령(紫繡僧伽梨一領)과 금첩법의일령(錦貼法衣一領)이 하사되었고, 1054년 세수 83세, 승랍 74세로 입멸하였다는 등 그의 행적을 적었고, 후미에는 대사를 기리는 명문이 있다.[7]혜소국사의 모친이 보현보살 500탱을 조성하고 빌어 정현을 낳아 출가하여 칠장사융철(融哲)에게 배우고 오교대선(五敎大選)에서 명성을 날렸으며, 현종의 우대를 받고 덕종법천사((法泉寺))에 주석하도록 하였으며, 정종현화사(玄化寺)에 주지하도록 청하였고 절 앞에 음식을 마련하여 배고픈 사람들에게 나눠 주었고, 문종 때는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의하여 비를 내리게 하였으며 왕사와 국사에 연이어 책봉되었다가 입적한 생애를 기술하였다.[8]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안성 칠장사 A는 B에 있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정현 A는 B를 위한 비이다 1060년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김현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민상제 A는 B가 비문을 썼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배기성, 이맹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구양순 A는 B와 관련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1.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위키백과』online.
  2.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4. "칠장사(안성)",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5. "칠장사혜소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6. 비구와 비구니가 받아 지켜야 할 온전한 계율.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구족계",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칠장사혜소국사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