혜소국사 정현(慧昭國師 鼎賢)의 어머니는 밝은 달이 방 안에 들어오는 태몽을 꾸고 임신하였다.
부모가 가사와 보현보살 탱화를 조성하여 서원하였다는 것으로 보아, 정현이 안성 지방의 유력 가문 출신이었음을 짐작할 수 있다.[1]
어머니는 김씨(金氏)니, 부덕(婦德)의 아름다움이 마치 노내자(老萊子)의 부인과 같으며,공손하고 우아함은 양홍(梁鴻)의 처와 비교되었다.결혼해서는 백년해로(百年偕老)의 징험을 보았으며, (결락) 밝은 달이 방안에 들어오는 태몽(胎夢)을 꿈으로 말미암아 곧 임신하였다.그 후 훌륭한 아들을 낳기 위해 아버지는 자색(紫色) 가사(袈裟) 열 벌을 스님들에게 헌납하였고, 어머니는 보현보살 탱화 500정을 조성하고 발원(發願)하기를, '만약 아들을 낳으면 반드시 출가하여 스님이 되도록 하겠다'고 다짐하였다. 그로부터 항상 음식 중에 오신채(五辛菜)와 고기는 일체(一切) 먹지 아니하였다. (결락) 5년 (결락) 출산(出産)하였다.
참현(參玄)의 시대[3]에 이르러 바야흐로 출가할 것을 결심하고 곧 바로 광교사(光敎寺)에 가서 충회대사(忠會大師)를 은사로 하여 정수리에 있는 주라(周羅: 상투)를 잘라 버리고, 몸에는 가사를 입고 스님이 되었다. (결락) 종지(宗旨)를 구하기 위해 (결락) 부지런히 정진(精進)하였다.
13살 때 스스로 생각하기를, "만행문중(萬行門中)에 구화(傴和)가 가장 중요하지만 성(性)과 상(相)이 함께 통하는 것은 십칠지(十七地)인 유가교문(瑜伽敎門)만한 것이 없다. 그러므로 이제 종전에 의행(依行)하던 구화문(傴和門)을 버리고 이 유가수행문(瑜伽修行門)으로 나아가야겠다"고 하였다. 고향과 먼 곳에있는 칠장사(漆長寺)에 가서 융철(融哲)스님을 예방하였더니, 철(哲)스님이 말씀하시기를, "어제 밤 꿈에 동방(東方) (결락) 보살을 친견 (결락) 야(也)라"
통화(統和) 14년[5]에 미륵사(彌勒寺)의 오교(五敎)대선(大選)에 나아가서 선정(禪定)의 법운을 화정(火頂)의 문(門)으로 배출하며,높이 번갯불과 같이 민첩한 변설을 날려작감(嚼甘) (결락) 난(瀾)하되, 그 명성이 강장(講場)에 떨쳤으며 칭송이 담회(談會)에 쟁쟁하였다. 이에(仍) (결락) 옥(玉)을 타산(它山)에서 캐고 배를 타고 해외에 가서 유학하지 않고도 이미 보주(寶珠)를 적수(赤水)에서 탐색하였다. 이와 같이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 심사방도(尋師訪道)하다가, 뒤에 본사(本寺)인 칠장사(漆長寺)로 돌아갔다.
기해세(己亥歲: 999년, 목종 2)에 칙명(勅命)으로 대사(大師)의 법계를 첨가(添加)하고, 심심미묘(甚深微妙)한 불법(佛法)의 진리를 크게 홍포(弘布)하기를 마치 병에 물을 쏟아 붓는 것과 같이 순조롭게 하여 선각자(先覺者)로 하여금 길을 양보하게 하였고, 손에는 언제나 책을 놓은 적이 없어서 후배들로 하여금 절조(節操)를 굳게 가지도록 장려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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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종(顯宗)조에 이르러 석사(石師)를 더욱 존중히 여겨 특별히 국사에 대한 기행(琦行)이 뛰어나심을 표창하고 마납(磨衲) 가사 한 벌을 드렸다. 그 후 얼마되지 않아 수좌(首座)의 법계를 더하였으니 이는 모두 예리한 질문을 받으면 마치 종(鐘)을 치듯 응해주고, 해론(論)을 결정함에는 항상 중석(重席)의 위치에 있었기 때문이다.
정현을 존경한 덕종은 수시로 편지를 주고 받기 위하여 1033년(덕종 2) 우편소를 설치하기도 하였다. 이후 정현은 왕명에 따라 법천사(法泉寺)에 머물렀고, 그 뒤 승통(僧統)으로 임명되어 현화사(玄化寺)에 머물렀다. 이 때 왕은 가사(袈裟)를 하사하였다.[7]
태평(太平) 계유세(癸酉歲: 1033, 덕종 2)에 (결락) 왕궁과 국사가 있는 칠장사(七長寺)와의 중간 지점에는 왕이 수시로 문안의 편지를 전달하기 위한 우편소(郵便所)인 우정(郵亭)을 설치하기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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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德宗)이 교지(敎旨)를 내려 법천사(法泉寺)에 주석(住錫)토록 하였는데, (결락) 류(流)와 오악(五岳)의 군영(群英)으로 하여금 권장하여 참천(參天)의 극수(極數)를 나타나게 하고,4하(四河)의 석종(釋種)들이 옥일(沃日)과 같은 관대함을 성취하도록 기대하였으니, 또한 어찌 관목(窾木)에 의탁하여 몸을 망각할 필요가 있겠느냐고 하였다. 험준한 산을 넘고깊은 물을 건너면서 선지식을 참방하였다. (결락) 추붕준(推鵬俊) (결락) 간(簡) (결락) 응(鷹). 기(耆) (결락) 왕이 승통(僧統)으로 추대하고 현화사(玄化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고, 자색으로 수(繡)를 놓은 승가리(僧伽梨) 한 벌과 (결락) 일령(一領)을 하사하였다.
정현의 생애에서 주목할 것은 만년의 사회적 활동이다. 그는 1044년(정종 10) 개성 광제사(廣濟寺) 문 앞에서 굶주린 사람들에게 음식을 베풀었으며, 이듬해에는 도적과 맹수가 들끓는 삼각산 자락의 교통 요충지에 사현사(沙峴寺)라는 사찰을 창건하면서 여행객을 위한 숙박 및 편의시설을 함께 조성하였다.[8]
중희(重熙) 갑신세(甲申歲)에는 광제사(廣濟寺)절 문앞에 솥을 걸어놓고 밥을 짓고 국을 끓여 배 고픈 사람을 초대하여 무차 반식(無遮 飯食)을 행하였으므로 천균(千囷)에 쌓였던 곡식이 탕진하였고, 백곡(百斛)을 나누어 주되 조금도 인색(恡嗇)함이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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을유세(乙酉歲)에 삼각산에 사현사(沙峴寺)를 창건하고 이어 큰 가람(伽藍)을 이룩하였는데, 부근에는 호랑(虎狼)이 살고 있었으며, 도적떼가 우글거려서 흉악하고 잔악한 무리들이 황지(黃池)보다 심하고 포도(逋逃)들이 모인 것은 마치 연수(淵藪)와 같이 많았다. 자(自) (결락) 이곳은 실로 여러 갈래의 길로 갈라지는 요충지대(要衝地帶)이며, 손에는 책 보따리를 들고 어깨에는 배낭을 매고 지나가나,왕래(往來)에 경색(梗塞)함이 많음을 어찌할 수가 없다. (결락) 장차 이러한 험난함을 구하고자 하여 석로(舃鹵)의 밭을 평지로 만들어 범우(梵宇)를 창건하고, 오유(鼯鼬)만이 다닐 수 있는 가파른 길을 매축하여 거로(蘧廬)를 지었다. 건물의 표와(縹瓦)는 날아가고자 하고, 겹겹으로 된 중인(重闉)은 양쪽 문짝이 활짝 열렸다.법당(法堂)에는 우두전단향(牛頭栴檀香)을 항상 사루어 도량(道場)의 안팎 수 리까지 향기가 진동하였고, 국사를 찾아오는 사대부(士大夫)들의 상마(象馬)가 서로 먼지를 날리면서 왕래하였다.그리하여 법당 밑으로는 백중(百重)의 보사(寶肆)가 나열하였으므로 연림(綠林)과 청독(靑犢)이 민가에 가서 물건을 겁탈하는 좀도둑들의 구과(鉤瓜)와 거아(鋸牙)가 감히 포효(咆哮)하면서 도둑질을 할 수 없게 되었다.
1046년 문종이 즉위하자 입궐하여 『금고경(金鼓經)』을 강론하였고, 1048년(문종 2)에는 문덕전(文德殿)[9]에서 8권의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론하였다. 특히 1048년에는 큰 가뭄이 있었는데 정현이 경전을 소리 내어 읽자 비가 내렸다고 한다.
우리 황상(皇上)인 문종 임금께서 천조(踐祚)에 오르시던 병술년(丙戌年: 1046년, 정종 12, 문종 1) 봄 정월에 이르러 마음을 향해(香海)에서 씻고 복을 정전(情田)에 심었으며, (결락) 국사께서는 호국 안민을 위하여 금고경(金鼓經)을 강설하였으니, 이는 실로 천태(天台) 지의대사(智顗大師)가 다시 태어난 것이며 성견(成覸)이 다시 화현(化現)한 것으로 여겨자색(紫色) 비단에 수를 놓은 승가리(僧伽梨) 한 벌과 비단을 붙여서 만든 법의(法衣) 한 벌 등을 하사하였으니, 살타(薩埵)를 (결락) 승전(僧田)에 비추는 것에 비견할 만하다.
그후 무자세(戊子歲: 1048년, 문종 2) 5월에 날씨가 크게 가물었을 뿐만 아니라 냉해(冷害)가 심하여 모든 사람들이 하늘을 쳐다보면서 간절한 마음으로 비가 내리기를 희망하였으나 이익이 없었고, 백신(百神)에게 기우제를 지냈지만 영험이 없었다. (결락)이 무렵 국사께서는 문덕전(文德殿)에서 8권본 금광명경(金光明經)을 강설하고자 손으로 은도향로(銀塗香爐)를 들고, 서서히 상왕(象王)의 걸음을 걸어 몸이 연좌(蓮座)에 올라 사자(師子)의 음성을 높여 제1권을 아직 다 설하기도 전에 사방으로 구름이 덮히더니 소나기가 쏟아져 골고루 줄아(茁芽)를 적시어, 보전(甫田)에 심은 농작물이 마치 손으로 뽑아 올리듯 자랐다.임금께서 밀사(密使) (결락) 로 하여금 다향(茶香)을 보내어 위로하고 앙모(仰慕)하는 편지를 보냈다.
기축세(己丑歲: 1049년, 문종 3)에 임금이 조칙을 내려 이르기를, "주(周)나라 문왕(文王)은 여망(呂望)을 사상부(師尙父)로 삼았고 후한(後漢)의 명제(明帝)는 환영(桓榮)을 발탁하여 관내후(關內侯)로 책봉하였다. 지금 우리 정현승통(鼎賢僧統)의 학식은 진심(眞心)에 관철하고 의리는 운천(雲天)보다 고상(高尙)하니 마치 마니(摩尼) 천고(天鼓)가 사바세계(娑婆世界)를 진동하며 또한 우담발화의 꽃이 상계시대(像季時代)에 핀 것과 같다"고 하였다.
스님은 진실로 이와 같이 도덕이 높았으므로 감히 누구도 (결락)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 한림학사(翰林學士) 비서감(秘書監) 정걸(鄭傑)과 좌부승선(左副承宣) 상서좌승(尙書左丞) 고숙성(高肅成)등으로 하여금 조서를 가지고 세 번이나 초빙하였으나 스님은 끝내 응하지 아니하였다. 그리하여 임금께서 군신(群臣)을 거느리고 봉은사(奉恩寺)에 행행(幸行)하여 왕사(王師)에게 막배(膜拜)를 드리고 친히 (결락) 계금(罽錦) 비단으로 만든 납의(衲衣)와 법구(法具) 등을 헌납하였다.
1054년(문종 8) 칠장사로 돌아온 정현은 그해 11월 15일 문인들에게 임종게(臨終偈)[10]를 남기고 앉아서 입적하였다. 나이 82세, 법랍 74세였다.[11]
11월 15일에 제자 중에 수좌(首座)인 영념(靈念)과 불운(昢雲), 삼중대사(三重大師)인 인조(仁祚)와 심천(甚泉), 중대사(重大師)인 승당(僧幢)과 계선(繼先), 대사(大師)인 의기(義奇)와 인걸(仁傑), 란수(蘭守), 대덕(大德)인 융책(融冊)과 덕선(德先), 단직(單職)인 (결락) 10인 등을 불러 놓고 추위(諈諉)하여 유촉(遺囑)하기를, "대저 인생이란 마치 번갯불과 같이 신속(迅速)하며 바람과 같이 지나가고 별이 사라지면 해가 뜨는 것과 같은 것이다. 나는 지금 곧 무물(無物)의 세계로 돌아가려 하니 너희들은 슬퍼하지 말라"는 말씀이 끝나자 마자, 가부좌를 맺고 입적(入寂)하였으니 얼굴빛과 모양은 생전과 같았다. 세수는 83세요, 승랍은 74세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