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증동국여지승람"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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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시기 = 1530년 | |제작시기 = 1530년 | ||
|제작자 = 이행, 홍언필, 윤은보, 신공제, 이사균 | |제작자 = 이행, 홍언필, 윤은보, 신공제, 이사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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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6년 12월 2일 (금) 23:01 판
개요
《신증동국여지승람》은 조선 전기 지리지의 집성편으로 속에 실린 지도와 함께 조선 말기까지 큰 영향을 끼친 지리지이다. 이 책은 지리적인 면뿐만 아니라 정치·경제·역사·행정·군사·사회·민속·예술·인물 등 지방사회의 모든 방면에 걸친 종합적 성격을 지닌 백과전서식 서적이다.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최대섭의 민족기록화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주요 인물 최무선에 대해 서술되어 있다. 해당 기사는 다음과 같다.
제2권 경도 하(京都下) 군기시 정이오(鄭以吾)가 지은 화약고기문에, “ 군기시부정(軍器寺副正) 최해산(崔海山) 군이 나에게 말하기를, '나의 선군(先君)이 일찍이 왜구가 침입하면 제어하기 어려움을 근심하여, 수전(水戰)에서 화공을 쓸 방책을 생각하고서 염초를 구워서 쓸 기술을 찾았다. 당나라 이원 이란 자는 염초 굽는 장인인데, 공(公)이 매우 후하게 대우하고, 은밀히 그 기술을 물어서 집에서 부리는 종 몇 명을 시켜 사사로이 기술을 익히게 하여, 그 효과를 시험한 뒤에야 조정에 건의하여 홍무 10년 정사 10월에 처음으로 화통도감(火㷁都監)을 설치하여 염초를 굽고, 또 당나라 사람으로 우리나라에 와서 살고 있는 자를 모집하여 전함(戰艦)을 만들게 하고 공이 직접 감독하였다. 그러나 모두 공의 이러한 일을 위험하게 여겼더니, 왜구가 전라도ㆍ충청도에 크게 침입하여 그때 인심이 흉흉하였으나, 심덕부, 나세와 우리 선군이 세 원수(元帥)가 되어 누 선(樓船) 80척에 화포와 화통을 비치하고서, 진포(鎭浦)에서 맞아 공격하여 왜선 30척을 불사르고 괴수 손시라(孫時剌)를 잡아 죽였으니, 이것은 홍무 13년 경신 8월에 있던 일이다. 원문읽기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 관계 | 노드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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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무선 | ~에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
최해산 | ~에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
이원 | ~에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
나세 | ~에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
진포대첩 | ~에 기록되어 있다 | 신증동국여지승람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