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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제 초기의 도읍지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가 온조는 하남(河南)의 땅을 택하고 [[비류]]는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이곳이 바닷가이고 땅이 습하여 물이 짜서 살 수가 없었다고 하고 있는 데서도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 백제 초기의 도읍지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가 온조는 하남(河南)의 땅을 택하고 [[비류]]는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이곳이 바닷가이고 땅이 습하여 물이 짜서 살 수가 없었다고 하고 있는 데서도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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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초기 백제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미추홀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로 비정되고 미추홀의 중심 유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문학산성이다. 하지만 문학산성은 백제의 성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성은 평지에 흙으로 조영하는 평지성이나, 문학산성은 산 정상에 봉우리를 둘러싸는 형태인 포곡식으로 쌓은 석성(石城)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에 비류가 정착하였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매우 박약하며, 이 때문에 다른 지역을 미추홀로 비정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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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추홀 혹은 매소홀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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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우선 ‘매(買)’는 음이 ‘미’로 ‘미(彌)’와 같이 ‘므[水]’의 음차이고, ‘소(召)’는 음이 ‘추(鄒)’와 같이 촉음차(促音借)이며 ‘홀(忽)’은 현재 음이 ‘홀’이나 옛음은 ‘곧, 골’로서 ‘골[城]’을 음차한 것이라 하며 미추홀 혹은 매소홀은 ‘뭇골’ 즉 수성(水城)이라 하였다. 반면에 미추홀 혹은 매소홀의 한자어 대역인 소성(邵城)의 ‘소(邵)’를 확대된 의미 ‘매[野]’의 음차로 보고, ‘홀’은 ‘성(城)’의 훈차인 골로 보며, 추와 소를 사잇소리 ‘ㅅ’으로 보아 ‘맷골’, 즉 ‘거친 들의 고장’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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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추홀]]은 고구려의 영토였을 때에는 매소홀현이라 불렸으며,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에도 계속 매소홀현이라 불리다가 경덕왕 대 소성현으로 개명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수주(樹州)[현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숙종(肅宗)이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다. 인종(仁宗)이 인주(仁州)로 고치고 지주사(知州使)로 삼았으며, 공양왕(恭讓王)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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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에 들어서는 태조(太祖)가 다시 인주라고 하였으며, 1414년(태종 14) 인천군으로 고쳤다. 1459년(세조 5년)에 소헌 왕후(昭憲王后)로 인하여 도호부(都護府)로 높였으나, 1698년(숙종 14년)에 다시 현으로 복구시켰다가 1903년(고종 광무 7)에 군으로 고쳤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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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미추홀]]은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로 비정되나, [[미추홀]]을 다른 지역으로 비정한 예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산 밀두리설(牙山 密頭里說)과 경기도 양주·파주설이다. 아산 밀두리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미추홀을 ‘금인주(今仁州)’, 위례성을 ‘미상지분(未詳地分)’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추홀은 ‘인주(仁州)’, 위례성을 ‘금직산(今稷山)’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금인주’와 ‘인주’는 서로 다른 지역이며, 『삼국유사』가 가리키는 인주를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에 비정한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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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기도 양주·파주설은 패하(浿河)를 대동강 수계로 이해하고 미추홀을 매성홀(買省忽)·매초성(買肖城)·육계토성(六溪土城) 등을 근거로 삼아 ‘매소’와 ‘미추’만 음운상 통하는 것이 아니라 양주 고읍의 옛 이름인 ‘매성’ 역시 미추와 음운상 통하는 것으로 미추홀의 위치를 한강 이북인 경기도 양주·파주 일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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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외에도 [[비류]] 집단과 [[온조]] 집단의 연맹 결성의 원인을 소금 산지의 확보로 이해하여 미추홀의 위치를 인천광역시 서구 공촌동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 등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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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온조왕조에는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로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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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9, 인천도호부 건치연혁조에는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다.(또는 미추홀이라 한다). 신라 경덕왕이 소성(邵城)으로 고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수주(樹州)에 붙였고, 숙종 때에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의 본관이므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고, 인종이 또 순덕 왕후(順德王后) 이씨의 본관이므로 지인주사(知人州事)로 고치고, 공양왕 2년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仁州)로 만들었고,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예에 의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세조 6년에 소헌 왕후의 외가 고을이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
2022년 10월 28일 (금) 20:02 판
미추홀(彌鄒忽)
백제 초기의 도읍지로 <삼국사기>에 의하면 주몽의 두 아들 비류와 온조가 남쪽으로 내려가 온조는 하남(河南)의 땅을 택하고 비류는 미추홀에 가서 살았다고 한다. 이 미추홀은 지금의 인천으로, <삼국사기> 기록에 이곳이 바닷가이고 땅이 습하여 물이 짜서 살 수가 없었다고 하고 있는 데서도 그 위치를 짐작할 수 있다.
비류가 도읍을 정한 미추홀은 초기 백제사에 있어서 매우 중요한 지역이다. 미추홀의 위치는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로 비정되고 미추홀의 중심 유적으로 믿어지는 것이 문학산성이다. 하지만 문학산성은 백제의 성으로 보기 어려운 점이 있다. 일반적으로 백제의 성은 평지에 흙으로 조영하는 평지성이나, 문학산성은 산 정상에 봉우리를 둘러싸는 형태인 포곡식으로 쌓은 석성(石城)이기 때문이다. 즉 지금의 인천광역시 지역에 비류가 정착하였다는 고고학적 근거가 매우 박약하며, 이 때문에 다른 지역을 미추홀로 비정하기도 한다.
미추홀 혹은 매소홀의 어원에 대해서는 다음과 같은 견해들이 있다.
우선 ‘매(買)’는 음이 ‘미’로 ‘미(彌)’와 같이 ‘므[水]’의 음차이고, ‘소(召)’는 음이 ‘추(鄒)’와 같이 촉음차(促音借)이며 ‘홀(忽)’은 현재 음이 ‘홀’이나 옛음은 ‘곧, 골’로서 ‘골[城]’을 음차한 것이라 하며 미추홀 혹은 매소홀은 ‘뭇골’ 즉 수성(水城)이라 하였다. 반면에 미추홀 혹은 매소홀의 한자어 대역인 소성(邵城)의 ‘소(邵)’를 확대된 의미 ‘매[野]’의 음차로 보고, ‘홀’은 ‘성(城)’의 훈차인 골로 보며, 추와 소를 사잇소리 ‘ㅅ’으로 보아 ‘맷골’, 즉 ‘거친 들의 고장’이란 의미를 가진 것으로 해석하기도 한다.
미추홀은 고구려의 영토였을 때에는 매소홀현이라 불렸으며, 이후 신라가 이 지역을 차지한 후에도 계속 매소홀현이라 불리다가 경덕왕 대 소성현으로 개명되었다. 고려 현종(顯宗) 때, 수주(樹州)[현 인천광역시 부평구]의 속현으로 삼았다가 숙종(肅宗)이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시켰다. 인종(仁宗)이 인주(仁州)로 고치고 지주사(知州使)로 삼았으며, 공양왕(恭讓王)이 경원부(慶源府)로 승격시켰다.
조선에 들어서는 태조(太祖)가 다시 인주라고 하였으며, 1414년(태종 14) 인천군으로 고쳤다. 1459년(세조 5년)에 소헌 왕후(昭憲王后)로 인하여 도호부(都護府)로 높였으나, 1698년(숙종 14년)에 다시 현으로 복구시켰다가 1903년(고종 광무 7)에 군으로 고쳤다.
미추홀은 일반적으로 지금의 인천광역시로 비정되나, 미추홀을 다른 지역으로 비정한 예도 있다. 그 대표적인 것이 아산 밀두리설(牙山 密頭里說)과 경기도 양주·파주설이다. 아산 밀두리설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미추홀을 ‘금인주(今仁州)’, 위례성을 ‘미상지분(未詳地分)’으로, 『삼국유사(三國遺事)』에 미추홀은 ‘인주(仁州)’, 위례성을 ‘금직산(今稷山)’으로 표기되어 있는 것에 착안하여 ‘금인주’와 ‘인주’는 서로 다른 지역이며, 『삼국유사』가 가리키는 인주를 충청남도 아산군 인주면에 비정한 것이다.
경기도 양주·파주설은 패하(浿河)를 대동강 수계로 이해하고 미추홀을 매성홀(買省忽)·매초성(買肖城)·육계토성(六溪土城) 등을 근거로 삼아 ‘매소’와 ‘미추’만 음운상 통하는 것이 아니라 양주 고읍의 옛 이름인 ‘매성’ 역시 미추와 음운상 통하는 것으로 미추홀의 위치를 한강 이북인 경기도 양주·파주 일대에서 찾아야 한다는 것이다.
이 외에도 비류 집단과 온조 집단의 연맹 결성의 원인을 소금 산지의 확보로 이해하여 미추홀의 위치를 인천광역시 서구 공촌동 일대로 추정하는 견해 등이 있다.
『삼국사기』 권23, 백제본기 1, 온조왕조에는 “비류는 듣지 않고 그 백성을 나누어 미추홀로 돌아가 살았다. 온조는 한수 남쪽의 위례성에 도읍을 정하고 열 명의 신하를 보좌로 삼아 국호를 십제라 하였다. …… 비류는 미추홀의 땅이 습하고 물이 짜서 편안히 살 수 없어서 위례로 돌아왔다.”라고 기록되어 있다.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권9, 인천도호부 건치연혁조에는 “본래 고구려의 매소홀현이다.(또는 미추홀이라 한다). 신라 경덕왕이 소성(邵城)으로 고치어 율진군(栗津郡)의 영현으로 삼았다. 고려 현종 9년에 수주(樹州)에 붙였고, 숙종 때에 인예왕후(仁睿王后) 이씨의 본관이므로 경원군(慶源郡)으로 승격하였고, 인종이 또 순덕 왕후(順德王后) 이씨의 본관이므로 지인주사(知人州事)로 고치고, 공양왕 2년에 경원부(慶源府)로 승격하였다. 본조(本朝) 태조 원년에 다시 인주(仁州)로 만들었고, 태종 13년에 지금 이름으로 고치어 예에 의하여 군으로 만들었고, 세조 6년에 소헌 왕후의 외가 고을이므로 승격하여 도호부로 만들었다.”라고 기록되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