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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국사기》에는 [[무왕(백제)|무왕]]이 [[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백제)|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백제)|무왕]]이라고 기록했다. | 《삼국사기》에는 [[무왕(백제)|무왕]]이 [[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백제)|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백제)|무왕]]이라고 기록했다. | ||
− |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백제)|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대충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 | + |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백제)|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대충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 태자]]가 [[무왕(백제)|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 ||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공위기가 있었고, 왜국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있는 백제 국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과 [[무왕(백제)|무왕]] 사이에 공위기가 있었고, 왜국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있는 백제 국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 |
2022년 9월 28일 (수) 10:23 판
진이왕(辰爾王)
백제의 왕족으로 16대 진사왕의 5대손이다. 토요타씨 족보에서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즉위했던 것으로 기록되어 있다. 《일본서기》에서 그가 고구려의 상표문을 해독한 일화가 실려있다.
진손왕이 왜국으로 망명한 이후 그의 집안은 대대로 천황을 근시(近侍)하는 자리에 있었으며, 그의 세 형제는 모두 부여씨가 아닌 스가노 아손(菅野朝臣)씨로 기록되었다.
572년 고구려에서 보내온 외교문서의 내용이 난해하여 왜왕이 그것을 손수 대신에게 주면서 여러 후비토(史)를 불러 모아 해독하게 했다. 그러나 이들은 3일 안에 모두 해독하지 못했고, 진이왕만이 훌륭하게 해독하여 왜왕과 대신 모두로부터 크게 찬미를 받았다. 이로 인해 왜왕이 거처하는 전중(殿中)에 근시하게 되었다.
또한 이 때 고구려의 외교문서 중에 글자를 까마귀 깃에 써서 보낸 것이 있었으나 아무도 해독하지 못했다. 그러나 그가 까마귀 깃을 밥김에 쐰 다음 흰 비단 위에 박으니 글자가 또렷하게 나타났으므로 조정에서 다시 기이하게 여겼다고 한다. 이는 그의 박식함과 기지를 잘 보여주는 사화라고 할 수 있다.
이후 그의 후손이라 전해지는 미마츠(三松)씨 족보에 의하면 비다츠 덴노 치세(572~585)에 백제왕신사(오사카부 히라카타시 소재)를 세우고 그의 조상을 제사지냈다고 한다.
오우치씨 족보에서의 기록
토요타씨 족보 계보
初代 百済國大祖 都慕大王[2]、第二代 直支王(전지왕)、第三代 阿美王(아신왕)、第四代 腆支王(전지왕)、第五代 久爾辛王(구이신왕)、第六代 毘有王(비유왕)、第七代 蓋圖王(개로왕)、第八代 文園王(문주왕)、第九代 三斥王(삼근왕)、第十代 東城王(동성왕)、第十一代 武寧王(무령왕)、第十二代 聖王(성왕)、第十三代 威徳王(위덕왕)、第十四代 惠王(혜왕)、第十五代 法王(법왕)、第十六代 辰爾王(진이왕)、第十七代 武王(무왕)、第十八代 義慈王(의자왕)、第十九代 豊璋王(부여풍)、第廿代 禅廣(부여선광(여선광)
《삼국사기》에는 무왕이 법왕의 아들이지만, 위덕왕 사후 혜왕과 법왕이 연이어 사망하는 이변이 발생했다. 위덕왕의 뒤를 이은 혜왕의 재위기간이 2년, 법왕의 재위기간이 1년밖에 되지 않고, 뚜렷한 행적이 보이지 않는 등 석연치 않은 점이 존재한다. 또한 이전부터 무왕은 위덕왕의 아들설과 손자설이 모두 있었으며, 《삼국유사》에서는 강가에 사는 과부가 검은 용과 통정하여 얻은 아들이 서동, 그러니까 무왕이라고 기록했다.
중국 《북사》에서는 무왕을 위덕왕의 아들로 대충위덕왕의 아들로 일본으로 건너간 아좌 태자가 무왕의 아버지로 추정되기도 했다.
무왕과 서동에 대한 여러 이설이 존재하는 가운데 1398년 일본의 호족 오우치 요시히로가 자신이 임성태자의 후손임을 주장하며 조선 조정에 족보를 보내오면서 진이왕의 존재가 처음 알려졌다. 일본 토요타씨 계보와 《신찬성씨록》 등에는 법왕과 무왕 사이에 나타난다.
《삼국사기》나 《삼국유사》에서 정식 국왕으로 인정되지 않았고, 시호도 없다는 점을 고려할 때, 그가 섭정이나 찬탈 형태로 올랐을 가능성이 제기된다. 이를 고려하면 법왕과 무왕 사이에 공위기가 있었고, 왜국측에서는 백제왕신사의 제사장인 그를 정통성있는 백제 국왕으로 인식한 것으로 보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