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허유"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내용) |
|||
10번째 줄: | 10번째 줄: | ||
|호= 소치(小痴) | |호= 소치(小痴) | ||
|자= 마힐(摩詰) | |자= 마힐(摩詰) | ||
− | |생년= | + | |생년= 1808년 |
− | |몰년= | + | |몰년=1893년 |
|출생지= 진도 | |출생지= 진도 | ||
|사망지= | |사망지= |
2017년 11월 11일 (토) 11:15 판
허유(許維) | |
대표명칭 | 허유 |
---|---|
한자표기 | 許維 |
생몰년 | 1808년-1893년 |
본관 | 양천(陽川) |
이칭 | 련(鍊) |
호 | 소치(小痴) |
자 | 마힐(摩詰) |
출생지 | 진도 |
시대 | 조선 |
부 | 허각(許珏) |
정의
조선의 문신·서화가.
내용
진도 출생으로 벼슬은 지중추부사에 이르렀고 문재와 서도, 그림이 뛰어나 삼절(三絶)로 이름이 높았으며 김정희(金正喜)의 제자였다[1] . 1840년 추사가 제주도로 유배를 가게되자 해남까지 배웅하였고 이듬해 제주도로 건너가 서화수업을 받았다. 1843년 제주 목사 이용현(李容鉉)의 도움으로 추사의 적거지를 왕래하며 서화를 익혔다. 1856년 추사가 타계하자 고향 진도로 낙향하여 운림산방(雲林山房)을 짓고 정주하였다. 1866년 상경하였고 1877년 70세에 흥선대원군을 만났으며 대원군은 그를 두고 "평생에 맺은 인연이 난초처럼 향기롭다(平生結契其臭如蘭)"고 말했다고 전해진다.[2]
김정희는 허유를 가르켜 “화법이 매우 아름다우며, 우리의 고유의 습성을 타파하여 압록강 이동에서 그에 겨룰 이가 없다.” 라고 극찬하였다.[3] 글씨는 추사체를 많이 따랐으며 그 중에서도 묵죽(墨竹)에 유명하여 거실을 묵의헌(墨椅軒)이라 이름하였다.[4] 작품에는 『하경산수도(夏景山水圖)』, 『추강만교도(秋江晩橋圖)』와 함께 김정희 초상(전신상), 김정희 초상(반신상), 김정희 초상(흑단령본) 등이 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하경산수도 | 허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추강만교도 | 허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김정희 | 허유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김정희 초상(전신상) | 허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김정희 초상(흑단령본) | 허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김정희 초상(반신상) | 허유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허유 | 흥선대원군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시각자료
주석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인명편)』,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참조:"허유", 미술대사전(인명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허련",
『두산백과』online .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인명편)』,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참조:"허유",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인명사전편찬위원회, 『인명사전』, 민중서관, 2002. 온라인참조:"허유", 인명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미술대사전(인명편)』,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참조:"허유", 미술대사전(인명편),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더 읽을 거리
- 웹자원
- 이태호, "허련",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이태호, "허련",
- 논문
- 김상엽, 「소치 허련 관계 신자료의 회화사적 의의」, 『美術史學』 제16호, 한국미술사교육학회, 2002, 111-13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