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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위할 때에는 반드시 본분의 일로써 어리석은 이들을 격려해 이끌어 줘야 하오 | + |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위할 때에는 반드시 본분의 일로써 어리석은 이들을 격려해 이끌어 줘야 하오. 부디 아첨의 유혹에 빠지면 아니 됩니다. 또한 부귀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 속에 휩쓸려 법을 전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할 것이오.” |
[[보우(고려)|태고]]는 [[청공|석옥]]의 마지막 유훈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1352년, 연도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른 [[고려 공민왕|공민왕]]이 [[보우(고려)|태고]]를 찾았다. 그는 [[보우(고려)|태고]]의 고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는 등 각별한 존경심을 표했다. 몇 해 뒤에는 [[보우(고려)|태고]]를 [[왕사|왕사(王師)]]로 책봉하고 [[개성 광명사|광명사]]에 원융부를 두어 그의 통솔 아래 사찰 업무를 관장토록 했다. [[보우(고려)|태고]]는 왕에게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상언하기도 했다. | [[보우(고려)|태고]]는 [[청공|석옥]]의 마지막 유훈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1352년, 연도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른 [[고려 공민왕|공민왕]]이 [[보우(고려)|태고]]를 찾았다. 그는 [[보우(고려)|태고]]의 고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는 등 각별한 존경심을 표했다. 몇 해 뒤에는 [[보우(고려)|태고]]를 [[왕사|왕사(王師)]]로 책봉하고 [[개성 광명사|광명사]]에 원융부를 두어 그의 통솔 아래 사찰 업무를 관장토록 했다. [[보우(고려)|태고]]는 왕에게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상언하기도 했다. |
2017년 12월 28일 (목) 01:09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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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차
고려 태고가 원 석옥에게
조주 옛 부처가 앉아서 일천 성인의 길을 끊고 취모리(吹毛利)의 칼을 들이대매 온몸에 빈틈이 없네 여우와 토끼의 자취는 완전히 사라지고 몸을 뒤집어 문득 사자의 모습이 드러나니 생사의 굳은 관문을 부수고 난 뒤에 맑은 바람이 태고암에 불어오네. |
1338년 1월 7일. 바람은 쉬고 구름은 고요했다. 38살의 태고보우(太古普愚, 1301-1382)는 깨달음의 노래를 불렀다. 모든 분별망상과 만겁의 생사를 그 자리에서 끊어버린 환희의 찬가였다. 이제 마음이 안으로는 고요해 흔들리지 않고 밖으로도 움직이지 아니해 의심덩어리가 부서지니 마침내 지혜의 눈을 뜨게 된 것이다. “깨닫지 못하면 차라리 정진하다 죽겠다”고 각오를 다진 지 꼭 20년만이었다.
서른셋에 첫 깨달음을 얻다
태고는 고려 충렬왕 27년(1301) 9월, 지금의 경기도 양평에서 태어났다. 13살에 회암사로 출가한 태고는 26살 때 그 어렵다는 화엄선(華嚴選)에 합격할 정도로 안목이 깊었다. 그러나 불경을 공부할수록 남의 보물을 어루만지고 있다는 회의도 더불어 깊어졌다. 그는 탄식했다.
“이것 또한 토끼 잡는 덫과 고기 잡는 통발의 구실에 지나지 않는구나. 어찌 어리석게 이 일만 하겠는가.”
태고는 불경을 덮었다. 30살의 태고는 용문사 상원암의 관음보살 앞에 눈물로 12대원을 세우고 화두에 온몸을 던질 것을 다짐했다. 그러나 큰 진척이 없었다. 성서(城西)의 감로사에서 그는 “큰일을 이룰 수 없다면 차라리 고행하다 몸을 바꾸느니만 못하다”며 용맹정진에 들어갔다. 그는 스스로를 끊임없이 채찍질하며 화두에 몰입했다. 7일째 되던 날 그에게 첫 깨달음의 순간이 다가왔다. 망념의 구름이 걷히고 ‘나’라는 집착이 끊겼다. 그윽하고 밝아 모든 것을 밝게 비추니 불조(佛祖)와 산하(山河)를 입도 없이 한입에 삼킨 것이다.
무자화두로 생사를 뛰어넘다
두 번째 깨달음은 4년 뒤인 37살 때 찾아왔다. 불각사(佛脚寺)에서 『원각경(圓覺經)』을 읽다가 ‘모든 것이 다해 없어지면 그것을 부동(不動)이라 한다(一切盡滅 名爲不動)’는 구절에 이르러 모든 알음알이가 떨어져나갔다. 한 생각이 일지 않아 지혜가 환히 빛나면 고요한 가운데 모든 것이 밝게 드러난다는 이치를 체득한 것이다.
태고는 수행을 멈추지 않았다. 마지막 번뇌까지도 완전히 여읨으로써 완전한 깨달음의 경지인 구경각에 이르고자 했다. 그는 다시 화두 참구에 들어갔다. 이번에는 1700공안의 으뜸이라는 조주의 무자(無字) 화두였다. 그러나 두 번의 깨달음을 체득한 태고에게도 무자 화두는 쇠뭉치를 입에 넣고 씹는 것 같았다. 태고는 무쇠소의 등가죽을 뚫으려는 모기마냥 일심으로 달려들었다. 얼마나 지났을까. 자고 깨어남이 일여한 경지에 이르렀고 그는 마치 죽은 사람처럼 미동도 없었다. 화두가 온전히 태고가 되고 태고가 화두 그 자체가 되던 1월 7일 새벽, 그는 생사의 굳은 관문을 부수고 태곳적부터 불어온 맑은 바람 앞에 설 수 있었다.
임제의 법손 석옥청공을 만나다
일대사의 본분을 마친 그는 소요산 백운암에 머무르며 유유자적했다. 그때 무극(無極)이라는 원나라 승려가 태고를 찾아왔다. 그는 태고에게 원으로 건너가 임제의 적손으로부터 인가를 받을 것을 권했다. 이때 무극이 소개한 고승이 바로 석옥청공(石屋淸珙, 1272-1352)이었다. 무극은 자신이 직접 만났던 석옥에 대해 들려주었다.
석옥은 소주(蘇州)의 상숙(常熟) 사람으로 임제의 18세 법손(法孫)이었다. 23살 때 당대 최고의 선객이라는 고봉원묘에게 출가해 ‘만법귀일’의 공안으로 깨달음을 얻은 석옥은 원나라 조정과 철저히 거리를 둔 채 호주(湖洲) 하무산(霞霧山)에 머물며 선법을 펼쳤다. 그는 도인으로 세상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태고가 원의 수도인 연도(燕都)에 도착한 것은 46살 되던 1346년 봄이었다. 그는 석옥이 있다는 하무산 천호암(天湖庵)을 물어물어 찾아갔다. 그리고는 마침내 석옥을 만날 수 있었다. 석옥은 태고가 본래면목을 터득했음을 단박에 알았다.
“노승은 비록 이 깊은 산에 있지만 조사의 문을 열어놓고 기다린 지 오래됐소.”
“선지식이란 여러 겁을 지나도 만나기 어렵습니다. 결코 스승 곁을 떠나지 않겠습니다.”
“노승은 그대와 함께 이 고요함을 즐기고 싶지만 갈 길이 막힐까 염려되오. 그러나 법은 만나기 어려우니 반달만 이야기하다 돌아가시오.”
그때부터 두 사람은 항상 함께 했다. 태고가 묻고 석옥이 답했으며, 때로는 석옥이 묻고 태고가 답하기도 했다. 그렇게 보름이 지났을 무렵 석옥이 호탕하게 웃으며 말했다.
“장로여, 그대의 360여 뼈마디와 8만 4000여 털구멍이 오늘 모두 열렸소. 그리하여 노승이 70여년간 공부한 것을 모두 그대가 빼앗아 가는구려.”
마지막으로 석옥은 태고에게 물었다. 법을 전하기 위한 마지막 관문이었다.
“공겁(空劫) 이전에도 태고가 있었던가, 없었던가.”
“허공이 태고 가운데서 생겼습니다.”
“불법이 동방으로 가는구나.”
석옥은 임제의 적손에게 대대로 전해오는 가사와 자신이 평생 지녔던 주장자를 태고에게 건넸다. 태고는 절을 한 뒤 못내 아쉬워하며 길을 나섰다. 석옥은 그런 태고를 멀리까지 배웅해주었다.
임제선 정착에 진력한 태고
8월 3일 천호암을 떠난 태고는 두 달 뒤 연도에 도착했다. 이때 태고의 명성이 널리 알려졌다. 태자의 생일을 맞아 그가 영령사에서 설법을 하니 황실에서는 태고에게 향과 가사를 수여했다. 연도에 와 있던 고려의 세자도 감탄하며 “내가 만약 고국으로 돌아가 새로운 정치를 한다면 스님을 나의 스승으로 삼겠다”고 말했다. 그가 바로 공민왕(1330-1374)이었다.
황실과 고려 세자의 찬탄에도 태고의 마음에는 오직 석옥이 있을 뿐이었다. 자신에게 법을 전해준 스승과 지낸 보름간의 시간을 잊을 수 없었다. 태고는 붓을 들었다. 그리고 종신토록 스승을 모시고 싶다는 마음을 진솔하게 적어 내려갔다. 비록 다시 만나지 못하더라도 불법을 천하게 팔지 않을 것과 임제의 법맥이 끊이지 않도록 하겠다는 다짐도 했다.
1348년, 태고는 2년간의 구법순례를 마치고 돌아와 중흥사에 석장을 걸었다. 태고는 은둔하며 조용히 지냈다. 그 무렵 그리던 스승으로부터 편지가 왔다. 이별한 뒤로 건강이 더욱 좋지 않다는 점과 태고의 편지를 받고 무척 반가웠다는 얘기로 시작했다. 석옥은 태고에 대한 당부도 잊지 않았다.
“세상에 나가 사람들을 위할 때에는 반드시 본분의 일로써 어리석은 이들을 격려해 이끌어 줘야 하오. 부디 아첨의 유혹에 빠지면 아니 됩니다. 또한 부귀하고 권세 있는 사람들 속에 휩쓸려 법을 전하겠다는 생각을 버려야할 것이오.”
태고는 석옥의 마지막 유훈 같은 당부를 잊지 않았다. 1352년, 연도에서 돌아와 왕위에 오른 공민왕이 태고를 찾았다. 그는 태고의 고향을 현(縣)으로 승격시키는 등 각별한 존경심을 표했다. 몇 해 뒤에는 태고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광명사에 원융부를 두어 그의 통솔 아래 사찰 업무를 관장토록 했다. 태고는 왕에게 구산선문을 통합하고 한양으로 천도할 것을 상언하기도 했다.
공민왕의 적극적인 지지 아래 불교계를 이끌던 태고는 수많은 우여곡절을 겪으면서도 임제선이 뿌리내릴 수 있도록 혼신의 노력을 기울였다. 1382년 여름, 82살의 태고는 “돌아가리라, 돌아가리라”라며 소설산으로 향했다. 그러고는 그해 말인 12월24일 임종게를 남기고 적멸에 들었다.
인생의 목숨이란 물거품처럼 공허한 것 팔십여 년이 꿈속에서 지나갔네 임종의 오늘에 이 몸 버리니 둥근 해가 서봉에 지네. |
스승에 대한 제자의 지극한 존경과 스승의 자애로움이 묻어나는 이 편지들은 『태고화상어록(太古和尙語錄)』에 수록되어 있다.
같이보기
주석
- ↑ 허정철, "⑪ 태고 보우국사-한국불교 대선사의 풍모 '장엄'", 『불교신문』, 2008년 03월 19일.
- ↑ "청공", 중국역대인물 초상화,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 『태고화상집』, 동국역경원.
- 종범, 「태고보우의 선풍에 관한 연구」, 『중앙승가대 교수 논문집』3, 1994.
- 차차석, 「석옥청공과 태고보우의 선사상 비교」, 『한국선학』 제3호, 한국선학회, 2002.
- 최병헌, 「태고보우의 불교사적 위치」, 『한국문화』 7, 서울대학교 한국문화연구소, 1986.
- 주호찬, 「태고보우와 나옹혜근의 오도송」, 『어문논집』 46, 민족어문학회, 2002.
- 신일균, 「공민왕의 개혁정치와 보우·신돈의 갈등」, 한국교원대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