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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운혜|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태종 8)의 <[[예조상정상제|예조상정상제(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1446년(세종 28) 3월 <[[왕비상제|왕비상제(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운혜|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태종 8)의 <[[예조상정상제|예조상정상제(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1446년(세종 28) 3월 <[[왕비상제|왕비상제(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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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상방정례|≪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 + | [[상방정례|≪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국혼정례|≪국혼정례(國婚定例) ≫]]의 중궁전 의대와 왕비의 의대에는 흑웅피화와 온혜로 규정되어 있다. 고종 때 동궁 가례시 재간택 후 보낸 빈궁의대 발기에도 “뎍향직운혀 1부, 다홍근봉금단운혀 1부”의 기록이 있고, 왕자군 길례 발기에도 “다홍화단운혀”가 있어 이 운혜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운혜가 언급된 사료=== | ===운혜가 언급된 사료=== |
2017년 10월 2일 (월) 23:59 판
운혜(雲鞋) | |
대표명칭 | 운혜 |
---|---|
한자표기 | 雲鞋 |
시대 | 조선 |
용도 | 복식, 신발 |
정의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 무늬를 새긴 여자의 마른신. [1]
내용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태종 8)의 <예조상정상제(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1446년(세종 28) 3월 <왕비상제(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
운혜 사용 기록
≪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국혼정례(國婚定例) ≫의 중궁전 의대와 왕비의 의대에는 흑웅피화와 온혜로 규정되어 있다. 고종 때 동궁 가례시 재간택 후 보낸 빈궁의대 발기에도 “뎍향직운혀 1부, 다홍근봉금단운혀 1부”의 기록이 있고, 왕자군 길례 발기에도 “다홍화단운혀”가 있어 이 운혜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3]
운혜가 언급된 사료
운혜·온혜는 ≪상방정례≫와 ≪의대발기≫에 같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종류의 신발을 지칭한다 하겠다. 조선 후기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에도 양반부인인 듯한 여인은 운혜를 신고 시종은 짚신을 신고 있다. 궁중을 비롯한 상류층 부인은 운혜나 당혜를 신고 서민이나 하류층은 짚신을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운혜 | 가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운혜 | 발기 | A는 B에 기록되었다 | |
운혜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주석
- ↑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저서
- 조효순, 「화제」, 『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 논문
- 이효선, 「일제강점기 고무신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5.
- 김아람, 「복식 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전통의상학 전공, 석사학위논문, 2013.
- 박현정, 「조선후기 기녀이미지를 응용한 신발디자인」, 동덕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의상디자인학과 의상디자인전공, 석사학위논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