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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고달사(高達寺)는 764년([[신라 경덕왕|경덕왕]] 23)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27768 여주 고달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7년 7월 14일.</ref> | + | 고달사(高達寺)는 764년([[신라 경덕왕|경덕왕]] 23)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ref>"[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where/where_tour.jsp?cid=127768 여주 고달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7년 7월 14일.</ref> |
− | 신라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봉림산파|봉림산문(鳳林山門)]]를 열었던 [[현욱|현욱(玄昱)]]이 절을 중건하였고, 862년([[신라 경문왕|경문왕]] 2) 신라말의 고승 [[심희|심희(審希)]]가 이곳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 광종]] 이후 역대왕의 비호를 받아 대찰(大刹)의 면모를 유지하였는데, [[찬유|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심희]]에게 법을 이어 받은 후 고달사에서 28년간 주석하며 중창하여 고려 초 3대 사찰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대략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370 고달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1월 21일.</ref> | + | 신라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봉림산파|봉림산문(鳳林山門)]]를 열었던 [[현욱|현욱(玄昱)]]이 절을 중건하였고, 862년([[신라 경문왕|경문왕]] 2) 신라말의 고승 [[심희|심희(審希)]]가 이곳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 광종]] 이후 역대왕의 비호를 받아 대찰(大刹)의 면모를 유지하였는데, [[찬유|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심희]]에게 법을 이어 받은 후 고달사에서 28년간 주석하며 중창하여 고려 초 3대 사찰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대략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3370 고달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1월 21일.</ref> |
===사찰 명칭의 유래=== | ===사찰 명칭의 유래=== |
2017년 9월 24일 (일) 20:48 판
여주 고달사 (驪州 高達寺) |
|
대표명칭 | 여주 고달사 |
---|---|
한자 | 驪州 高達寺 |
건립시기 | 764년 |
정의
경기도 여주시 북내면 상교리에 있었던 절.
내용
역사
고달사(高達寺)는 764년(경덕왕 23)에 창건되었던 사찰로 고달원(高達院)이라고도 한다.[1]
신라 구산선문(九山禪門) 중 봉림산문(鳳林山門)를 열었던 현욱(玄昱)이 절을 중건하였고, 862년(경문왕 2) 신라말의 고승 심희(審希)가 이곳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고려 광종 이후 역대왕의 비호를 받아 대찰(大刹)의 면모를 유지하였는데,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심희에게 법을 이어 받은 후 고달사에서 28년간 주석하며 중창하여 고려 초 3대 사찰 가운데 하나가 될 정도로 규모가 커졌다. 그 뒤의 역사는 자세히 알 수 없고, 대략 17세기 후반 무렵에 폐사된 듯하다.[2]
사찰 명칭의 유래
고달사에는 석조 문화재들이 많이 남아있는데 모두 고달(高達)이라는 석공이 만들었다고 한다. 고달은 가족들이 굶어 죽는 줄도 모르고 절을 이루는데 혼을 바쳤다고 하는데, 절을 다 이루고 나서는 스스로 머리를 깎고 스님이 되었으며, 훗날 도를 이루어 큰 스님이 되니 이 절을 '고달사'라 불렀다는 전설이 있다.[3]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여주 고달사지 | 여주 고달사 | A는 B의 터이다 | A edm:isRelatedTo B |
심희 | 여주 고달사 |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현욱 | 여주 고달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찬유 | 여주 고달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754년 | 여주 고달사가 창건되었다 |
862년 | 심희가 고달사에서 현욱의 제자가 되었다 |
주석
- ↑ "여주 고달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7년 7월 14일. - ↑ 김위석, "고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1월 21일. - ↑ "여주 고달사지",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 김용선, 『玄昱ㆍ審希ㆍ璨幽와 여주 고달사』, 한국중세사연구 제 21호, 2006, 111~139.
- 정영호, "여주 고달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3년 11월 28일. - 김위석, "고달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1월 21일. - "여주 고달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7년 7월 14일. - 한국문화유산답사회, 『답사여행의 길잡이7 - 경기남부와 남한강』, 돌베개, 2012. 온라인 참조: "고달사터", 답사여행의 길잡이7: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