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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 나 흘러내렸기 때문에 왜적이 뭍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 [[이광|이광(李廣)]]이 이끄는 근왕병 5만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절에서는 『[[인천안목|인천안목(人天眼目)]]』·『[[불조삼경|불조삼경(佛祖三經)]]』 등 10여종의 목판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불설예수시왕경|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은 특출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7772 서봉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 나 흘러내렸기 때문에 왜적이 뭍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 [[이광|이광(李廣)]]이 이끄는 근왕병 5만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절에서는 『[[인천안목|인천안목(人天眼目)]]』·『[[불조삼경|불조삼경(佛祖三經)]]』 등 10여종의 목판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불설예수시왕경|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은 특출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7772 서봉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태종실록』 7년에 따르면 용구(龍駒)[용인] 서봉사를 전국적인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시행된 사찰의 혁파 대상에서 제외된 거찰(巨刹)로서, ‘명찰(名刹)’ 또는 ‘명당 터의 대가람’에 해당하는 절이었다.<ref>"[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0901811 서봉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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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종실록』 7년에 따르면 용인 서봉사를 전국적인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시행된 사찰의 혁파 대상에서 제외된 거찰(巨刹)로서, ‘명찰(名刹)’ 또는 ‘명당 터의 대가람’에 해당하는 절이었다.<ref>"[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0901811 서봉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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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일) 23:47 판

용인 서봉사
(龍仁 瑞峰寺)
대표명칭 용인 서봉사
한자 龍仁 瑞峰寺



정의

경기도 용인시 수지읍 신봉리에 있었던 절.

내용

창건연대 및 창건자는 미상이나 고려시대 국사 현오(玄梧)가 이곳에 주석하면서 국왕을 강학(講學)하였다는 일설이 전해지고 있으며, 절에 대한 역사는 거의 전래되지 않고 있다. 임진왜란 때 절에서 떠내려 오는 쌀뜨물이 10리 나 흘러내렸기 때문에 왜적이 뭍을 따라 올라가서 절을 불태웠다고 하며, 임진왜란 때 전라감사 이광(李廣)이 이끄는 근왕병 5만이 이곳에서 왜적과 싸웠다는 기록이 전한다. 이 절에서는 『인천안목(人天眼目)』·『불조삼경(佛祖三經)』 등 10여종의 목판본을 간행하였는데, 그 중에서도 『불설예수시왕경(佛說豫修十王經)』은 특출하였던 것으로 전해지고 있다.[1]

『태종실록』 7년에 따르면 용인 서봉사를 전국적인 자복사(資福寺)의 하나로 선정하고, 천태종 소속으로 삼았다 한다. 또한 조선 전기에 시행된 사찰의 혁파 대상에서 제외된 거찰(巨刹)로서, ‘명찰(名刹)’ 또는 ‘명당 터의 대가람’에 해당하는 절이었다.[2]

정확한 연대는 알 수 없으나 관련 기록으로 보아 18세기 후반까지 운영되었고, 19세기경에 폐사(廢寺)된 것으로 추정된다. [3]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용인 서봉사지 현오국사탑비 용인 서봉사 A는 B에 있었다
용인 서봉사지 용인 서봉사 A는 B의 터이다
종린 용인 서봉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인천안목 용인 서봉사 A는 B와 관련있다
천태종 용인 서봉사 A는 B를 포함한다

시각자료

주석

  1. "서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서봉사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용인 서봉사지", 『두산백과』online.

참고문헌

  • "서봉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서봉사지",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용인 서봉사지", 『두산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