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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216년(고종 3)에 보경사(寶鏡寺) 주지로 임명되는 동시에 대선사 법계에 승진하였다. 고종은 사를 흠모하여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서치(徐雉)의 아들을 대신하여 출가하게 할 정도였다. 이 외에도 청평산 문수사(文殊寺), 설악 한계사(寒溪寺), 운문산 복안사(伏安寺), 청도군 칠엽사(七葉寺), 공산 염불난야(念佛蘭若) 등에 주석하였다. | + | 1216년(고종 3)에 보경사(寶鏡寺) 주지로 임명되는 동시에 대선사 법계에 승진하였다. 고종은 사를 흠모하여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서치(徐雉)의 아들을 대신하여 출가하게 할 정도였다. 이 외에도 청평산 문수사(文殊寺), 설악 한계사(寒溪寺), 운문산 복안사(伏安寺), 청도군 칠엽사(七葉寺), 공산 염불난야(念佛蘭若) 등에 주석하였다. <ref>71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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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다음 해 가을에 또 대선사(大禪師)의 법계를 비가(批加)하고, 조칙(詔勅)을 내려 동경(東京) 이내(理內)인 청하현(淸河縣) 보경사(寶鏡寺)에 주지(住持)토록 하였다. 이보다 앞서 청평산(淸平山) 문수사(文殊寺)와 설악산(雪嶽山) 한계사(寒溪寺)에 주지(住持)토록 명하였으나, 모두 고사(固辭)하고 취임하지 않았다. 지금 보경사의 주지를 맡은 것은 강권(强勸)에 의한 것이지, 결코 스님의 뜻은 아니었다. 운문산(雲門山)에 복안사(伏安寺)란 절이 있었는데, 항적(降賊)의 주장(主長)들이 연수(淵藪)에 모여 있던 구염(舊染)의 좋지 못한 형태가 아직까지 말끔히 정돈(整頓)되지 않아서, 당두(堂頭)와 노숙(老宿)스님들이 크게 염려하고 있었다. 이들을 새로운 생활의 길로 개도(開導)코자 하여 스님을 초청해서 특별히 법회(法會)를 열고, 육조단경(六祖壇經)을 강설하였더니, 군적(群賊)들이 모두 크게 감화를 받아 눈물을 흘리면서 다시는 흉폭한 짓을 하지 않겠다고 다짐하였다. 이로부터 그 지방 일대(一帶)가 베개를 높이 베고 편안히 잠을 잘 수 있는 태평세상(太平世上)이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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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6일 (토) 18:40 판
승형(承逈) | |
대표명칭 | 승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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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承逈 |
생몰년 | 1172년(명종 2)-1221년(고종 8) |
시호 | 원진(圓眞) |
호 | 혜월(慧月) |
휘 | 승형(承逈) |
자 | 영회(永廻) |
성씨 | 신씨(申氏) |
승탑 | 포항 보경사 원진국사비 |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성은 신씨(申氏). 자는 영형(永逈). 아버지는 통한(通漢)이며, 경상북도 상주 출신. 세살 때 고아가 되어 숙부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 밑에서 자라났다. 그리하여 스님은 3살 때 고아(孤兒)가 되어 숙부(叔父)인 시어사(侍御史) 광한(光漢)에 의해서 국양(鞠養)되었다
스님의 휘는 승형(承逈)이요, 자는 영회(永廻)이며, 속성은 신씨(申氏), 상락(上洛)의 산양(山陽)출신이다. 선대(先代)는 대대로 유가(儒家)이었다.아버지의 이름은 통한(通漢)이니, 이(以) (결락) 내급사(內給事)로 있다가 금성(錦城)군수(郡守)로 부임(赴任)하여 재임(在任) 중에 순직하였고,어머니도 또한 일찍 돌아가셨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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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출가수행
13세 때 문경 봉암사(鳳巖寺)에서 선사 동순(洞純)을 은사로 득도(得度)하였고, 이듬해 김제 금산사(金山寺) 계단(戒壇)에게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활동
1197년 보제사(普濟寺) 담선대회(談禪大會)에 참석하였으나 동순사가 돌아가시자 장례에 임하여 선발되지 못하였지만, 명종이 승형의 도행을 높이 평가하여 초선(抄選)에 특례로 선발되게 하였다. 1197년(명종 27)에 승형은 선종 대선에 상상품으로 합격하였으나 명리를 버리고 명산을 유력하였다. [1]
그 뒤 조계산 수선사(修禪社)의 지눌(知訥)에게서 법요(法要)를 받고 강릉 오대산에서 문수보살(文殊菩薩)에게 예배한 뒤 크게 감응을 얻었다. 또, 청평산에서 이자현(李資玄)의 유적을 찾다가 ‘『수능엄경(首楞嚴經)』은 마음의 본바탕을 밝히는 지름길’이라는 『문수원기(文殊院記)』를 읽고 마음 깊이 감명을 받아 『능엄경』을 열람하였다.
1208년(희종 4)에 칙명으로 금강산 유점사(楡岾寺) 주지가 되었다. 1215년(고종 2)에 개경 곽주사(郭注寺)에 머물게 하고 중수 낙성하여 선지를 천양하게 하였다
1216년(고종 3)에 보경사(寶鏡寺) 주지로 임명되는 동시에 대선사 법계에 승진하였다. 고종은 사를 흠모하여 상의직장동정(尙衣直長同正) 서치(徐雉)의 아들을 대신하여 출가하게 할 정도였다. 이 외에도 청평산 문수사(文殊寺), 설악 한계사(寒溪寺), 운문산 복안사(伏安寺), 청도군 칠엽사(七葉寺), 공산 염불난야(念佛蘭若) 등에 주석하였다. [2]
입적
국사(國師)로 추증되었으며 비는 보경사에 있다. 시호는 원진(圓眞)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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