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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광종은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라 추증하고,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하였으며, 대사의 진영 1위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사리탑은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조성되었다. [[혼홍|흔홍(昕弘)]] 등 찬유의 제자들이 탑비의 건립을 청하자, [[고려 광종|광종]]은 [[김정언]]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고, 975년([[고려 광종|광종]] 26) 탑비가 건립되었다. | + | 광종은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라 추증하고,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하였으며, 대사의 진영 1위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사리탑은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조성되었다. [[흔홍|흔홍(昕弘)]] 등 찬유의 제자들이 탑비의 건립을 청하자, [[고려 광종|광종]]은 [[김정언]]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고, 975년([[고려 광종|광종]] 26) 탑비가 건립되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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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선월(禪月)이 너무 일찍 빠짐을 개탄하며, 각화(覺花)가 먼저 떨어짐을 슬프다 하시고, 성사(星使)를 보내 곡서(鵠書)로써 조의를 표하고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추증하였다. 그리고 진영1정(眞影 一#)을 조성하고,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층총(層冢)을 만들어 문인들이 호곡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象法)을 준수한 것이다. 대사는 심등(心燈)이 강렬하며 정수(定水)는 파랑(波浪)이 없고, 지혜는 바다와 같이 원융하며 자비의 구름은 온 세계를 덮었다. 불법을 배우고 선(禪)을 깨달은 덕행과 마군을 항복받고 세속을 진압한 위릉(威稜)과 입송서학(入宋西學)한 혁혁하고 현현(顯顯)한 공적과 귀국동화(歸國東化)한 미묘(微妙)하고 외외(巍巍)한 법력(法力)은 반도(盤桃)로 하여금 윤색(潤色)케 하였으니, 마치 맑은 물이 광명을 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 성스러운 공덕(功德)은 가히 지해(知解)로써 알지 못하며, 그 신비한 덕화(德化)는 가히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법신(法身)은 무상(無像)한 것이지만 반드시 상(像)으로 말미암아 공(功)을 나타내며, 도체(道體)는 말이 없는 세계이나 반드시 말을 인(因)하여야 교리(敎理)를 보여줄 수 있으니 어찌 묘유(妙有)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진공(眞空)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여기 스님의 큰 제자(弟子)인 양가승통(兩街僧統) 삼중대사(三重大師) 흔홍(昕弘) 등이 있으니, 그들은 법원(法苑)에서의 경종(鯨鐘)이며 선문(禪門)의 귀경(龜鏡)이다. 자비의 집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하였던 옛 대덕(大德)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 법광(法光)의 횃불을 들어 중생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群生)을 교화하였던 옛 고승들의 남긴 빛을 이어받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탄식하기를, “비록 은밀히 명심경구(銘心警句)를 설하였더라도 만약 위대한 기적(奇跡)을 돌에 새겨두지 않으면 어찌 일진(一眞)의 법(法)을 표하여 그대로 완전하게 남아 있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행장을 모아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유부(幼婦)의 문사(文辭)를 지어 우리 스님의 덕업(德業)을 비석에 기록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가(可)하다.” 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김정언(金廷彦)에게 명하기를, “고(故) 국사(國師) 혜목대사(慧目大師)는 덕행은 높아 구름 위에 있고 복덕(福德)은 넓어 모든 인간을 윤택하게 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文章)으로 국사의 공훈(功勳)을 적어 비석에 그 무성한 업적을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 |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선월(禪月)이 너무 일찍 빠짐을 개탄하며, 각화(覺花)가 먼저 떨어짐을 슬프다 하시고, 성사(星使)를 보내 곡서(鵠書)로써 조의를 표하고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추증하였다. 그리고 진영1정(眞影 一#)을 조성하고,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층총(層冢)을 만들어 문인들이 호곡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象法)을 준수한 것이다. 대사는 심등(心燈)이 강렬하며 정수(定水)는 파랑(波浪)이 없고, 지혜는 바다와 같이 원융하며 자비의 구름은 온 세계를 덮었다. 불법을 배우고 선(禪)을 깨달은 덕행과 마군을 항복받고 세속을 진압한 위릉(威稜)과 입송서학(入宋西學)한 혁혁하고 현현(顯顯)한 공적과 귀국동화(歸國東化)한 미묘(微妙)하고 외외(巍巍)한 법력(法力)은 반도(盤桃)로 하여금 윤색(潤色)케 하였으니, 마치 맑은 물이 광명을 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 성스러운 공덕(功德)은 가히 지해(知解)로써 알지 못하며, 그 신비한 덕화(德化)는 가히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법신(法身)은 무상(無像)한 것이지만 반드시 상(像)으로 말미암아 공(功)을 나타내며, 도체(道體)는 말이 없는 세계이나 반드시 말을 인(因)하여야 교리(敎理)를 보여줄 수 있으니 어찌 묘유(妙有)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진공(眞空)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여기 스님의 큰 제자(弟子)인 양가승통(兩街僧統) 삼중대사(三重大師) 흔홍(昕弘) 등이 있으니, 그들은 법원(法苑)에서의 경종(鯨鐘)이며 선문(禪門)의 귀경(龜鏡)이다. 자비의 집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하였던 옛 대덕(大德)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 법광(法光)의 횃불을 들어 중생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群生)을 교화하였던 옛 고승들의 남긴 빛을 이어받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탄식하기를, “비록 은밀히 명심경구(銘心警句)를 설하였더라도 만약 위대한 기적(奇跡)을 돌에 새겨두지 않으면 어찌 일진(一眞)의 법(法)을 표하여 그대로 완전하게 남아 있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행장을 모아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유부(幼婦)의 문사(文辭)를 지어 우리 스님의 덕업(德業)을 비석에 기록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가(可)하다.” 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김정언(金廷彦)에게 명하기를, “고(故) 국사(國師) 혜목대사(慧目大師)는 덕행은 높아 구름 위에 있고 복덕(福德)은 넓어 모든 인간을 윤택하게 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文章)으로 국사의 공훈(功勳)을 적어 비석에 그 무성한 업적을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
2017년 8월 24일 (목) 00:11 판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869년(경문왕 9) 계림(鷄林) 하남(河南: 현재의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용(容)인데, 장사현(長沙縣: 현재의 전북 고창)의 현령(縣令)을 지냈다고 한다.[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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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사(大師)의 존칭(尊稱)은 찬유(璨幽)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속성(俗姓)은 김씨(金氏)이니 계림(鷄林)의 하남(河南) 출신이다. 대대손손(代代孫孫) 명문호족(名門豪族)이었다. 할아버지의 이름은 청규(淸規)이다. 종조(宗祖)를 공경한 효도와 나라에 대한 충성(忠誠) 등 아름다운 행적은 너무 많아서 기록하지 않으니, 특히 불교에 대한 신심(信心)이 돈독하였다. 아버지의 휘(諱)는 용(容)이니 백홍(白虹)의 영기(英氣)와 단혈(丹穴)의 기자(奇姿)를 띠고 태어났다. 노을과 비단처럼 고상(高尙)한 빛을 함유(含有)하였으며, 서리내리는 늦가을 새벽 범종(梵鍾)소리의 아운(雅韻)을 풍겼다. 드디어 출세(出世)하여 창부(倉部)의 낭중(郎中)이 되었다가 얼마 되지 않아서 곧 장사현(長沙縣)의 현령(縣令)이 되어 백리(百里)의 관할 영내(領內)에 행춘(行春)의 덕화(德化)를 베풀었고, 화현(花縣)을 만들어 아름다운 향기(香氣)가 진동하였다. 구중향일(九重向日)하는 일편충심(一片忠心)은 마치 해바라기가 태양을 향해 돌아가는 것과 같았다. 그리하여 조야(朝野)가 모두 그를 기둥처럼 의뢰(依賴)하였고, 지방 향려(鄕閭)에서는 한결같이 우러러 의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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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0-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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탄생설화
어머니 이씨(李氏)는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나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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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머니는 이씨(李氏)이니, 부덕(婦德)을 두루 닦았고 모의(母儀)는 부유(富有)하여 그 우아함이 비길 만한 사람이 없었다. 어느 날 밤 꿈에 한 신인(神人)이 나타나 고(告)하기를, “원컨대 어머님을 삼아 아들이 되어서 출가(出家)하여 부처님의 제자(弟子)가 되고자 하므로 묘연(妙緣)에 의탁하여 공경히 자비하신 교화(敎化)를 펴려 합니다.”라는 수승한 태몽을 꿈으로 인하여 임신하게 되었다. 삼가 조심함으로써 문왕(文王)과 같은 아들을 출생(出生)하려고 정성껏 태교를 봉행하였다. 부지런히 태교(胎敎)를 닦아 함통(咸通) 10년 용집(龍集) 기축(己丑) 4월 4일에 대사(大師)를 탄생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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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1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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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찬유는 13세에 상주(尙州)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고, 융제의 지시에 따라 여주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에 가서 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셨다.[2] 890년(진성여왕 4) 22세에는 양주(楊州)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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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3살 때 아버님께 여쭙기를, “비록 혜가(惠柯)를 결핍하였으나 다만 각수(覺樹)를 기약하려 합니다.”라고 하였다. 이 때 아버지가 말씀하시기를, “내가 비록 섭동자(葉瞳者)이긴 하나 일찍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으니, 너는 마땅히 부지런히 배전(培前)의 용맹심으로 승과(勝果)를 닦으라.”하고 당부하였다.
대사께서 소원(所願)을 허락받아 삭발하고 출가하여 상주(尙州) 공산(公山) 삼랑사(三郞寺)의 융체선사(融諦禪師)를 스승으로 복승(伏承)하면서 “현현(玄玄)한 도(道)를 논하며 혁혁(赫赫)하게 중생을 교화하고자 하오니, 원컨대 제자가 되게 하여 주십시오.”라고 간청하였다. 이때 선사가 이르기를, “너를 대하여 오늘 너의 모습을 보니 후일에 크게 중생을 이익케 할 것 같다. 우리 선종(禪宗)에 ‘심희(審希)’라는 법호를 가진 큰스님이 계시니 참으로 진불(眞佛)이 출세하여 동국(東國)을 교화할 주인이시다. 현재 혜목산(慧目山)에 있으니 너는 마땅히 그곳에 가서 그를 스승으로 섬기면서 불법을 배우도록 하라.”고 이르시니, “나의 소원에 적합(適合)함이여! 그곳에 가서 깨달음을 얻은 후 남을 이롭게 할 수 있을 때 비로소 떠나리라.” 하고 문득 혜목산(慧目山)으로 찾아가서 스님으로부터 복응(服膺)을 허락받고 학도(學道)할 마음을 증장(增長)하고 습선(習禪)의 뜻을 배려(倍勵)하였다. 그로부터 얼마되지 않아 묘리(妙理)를 연구하고 깊이 현기(玄機)를 깨달았다. 각로(覺路)를 수행하여 비록 진리를 통달하더라도 마땅히 먼저 율의(律儀)를 의지하여야 가능하다고 생각하여 22세 되던 해에 양주(楊州) 삼각산(三角山)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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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32-33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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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유학
찬유의 스승인 심희는 888년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는데[3], 찬유는 스승을 따라 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찬유는 심희에게 구법 유학의 뜻을 밝혔고,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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본사(本師)인 진경대사(眞鏡大師)가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대사(大師)도 행장(行裝)을 정돈하여 육환장(六環杖)을 짚고 송계선원으로 따라가서 예족(禮足)의 소충(素衷)을 나타내어 주안(鑄顔)의 현조(玄造)에 대하여 감사하였다. 진경(眞鏡)스님께서 이르기를, “백운(白雲)이 천리(千里)나 만리(萬里)에까지 덮혀 있더라도 모두가 똑같은 구름이며, 명월(明月)이 전후(前後)의 시냇물에 비추나 오직 달은 하나 뿐이다.”라고 했다. 이는 지식으로 아는 것이 아니요, 오직 마음에 있을 뿐이다. 대사(大師)가 생각하기를, “무릇 도(道)에 뜻을 둔 자가 어찌 일정한 곳에 고정된 스승이 있으랴!”하고, 스님에게 제방(諸方)으로 다니면서 심사문도(尋師問道)할 것을 고하였다. 스님이 말씀하시기를, “너의 그 마음을 주저하지 말고 속히 떠나도록 하라. 나는 자네에게 깊이 징험(徵驗)하였다.”면서 기꺼이 떠날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하여 대사는 멀리 해외로 가는 것이 옳다고 생각하고 산을 내려와 해변으로 가서 중국으로 가는 선편(船便)을 찾았고, 드디어 경복(景福) 원년(元年) 봄 송(宋)나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만나 편승(便乘)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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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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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주(舒州) 동성현(桐城懸)의 적주산(寂住山)으로 간 찬유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의 문하인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4] 고승과 명승을 찾아 유람한 뒤 921년(경명왕 5)에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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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景福) 원년(元年) 봄 송(宋)나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만나 편승(便乘)하여 중국에 도착하였다. 운수(雲水)를 바라보면서 마음내키는 대로 행각(行脚)하되 연하(煙霞)를 향하여 자취를 행하였다. 그리하여 큰스님이 있는 곳에는 빠짐없이 참방(叅訪)하고, 이름 있는 고적(古跡)은 샅샅이 답사하였다. 서주(舒州) 동성현(桐城縣) 적주산(寂住山)에 나아가 투자화상(投子和尙)을 친견하였으니, 그의 법호는 대동(大同)이며, 석두산(石頭山) 희천(希遷)의 법손(法孫)이고, 취미무학대사(翠微無學大師)의 적윤제자(嫡胤弟子)이다. 그는 대사의 연꽃같은 눈, 특수한 자태(姿態), 미간백호(眉間白毫)와 같은 특이한 상모(相貌)를 보고 감탄하여 말하기를, “인도(印度)로부터 동류(東流)하여 설법(說法)한 자와 동국(東國)에서 중국에 와서 구학(求學)하는 자가 매우 많았으나 가히 더불어 도담(道談)을 나눌 만한 이는 오직 그대 뿐이다.”하고 기뻐하였다.
대사는 이때 미언(微言)을 투자(投子)의 혀끝에서 깨닫고 진불(眞佛)이 바로 자신의 신중(身中)에 있음을 알았으니, 어찌 선서(善逝)가 가섭(迦葉)에게 밀전(密傳)을 계승하며, 정명(淨名)이 문수(文殊)와 묵대(黙對)함을 받들 뿐이겠는가! 대사가 투자화상(投子和尙)에게 하직인사를 하니, 화상이 이르기를, “너무 먼 곳으로 가지 말고 또한 너무 가까운 곳에 있지 말라.”하니, 대사가 대답하기를, “비록 스님의 말씀처럼 원근양처(遠近兩處)가 아닌 곳에도 머물지 않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화상이 이르기를, “네가 이미 마음으로 전하는 이치를 체험했으니, 어찌 상대하여 서로 말할 필요가 있겠는가!”하였다. 그 후 곁으로는 훌륭한 도반(道伴)을 찾아 순례하면서 고명한 선지식을 참방(叅訪)하되, 때로는 천태산(天台山)에 들어가 은거할 만한 곳을 찾으며, 혹은 강좌(江左) 지방에서 현리(玄理)를 탐구하여 진여(眞如)의 성해(性海)에 들어가서 마니(摩尼)의 보주(寶珠)를 얻기도 하였다. 이에 큰 붕새는 천지(天池)에서 변화하고 학(鶴)은 마침내 요해(遼海)로 돌아가는 것과 같이, 시작도 있고 끝이 있어서 이를 생각하면 그곳에 있게 되는 것이다. 때마침 본국으로 돌아오는 배를 만나 타고 정명(貞明) 7년 가을 7월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에 도달하였으며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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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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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찬유는 921년(경명왕 5) 귀국하여 봉림사의 심희를 찾아갔다. 심희는 찬유에게 삼랑사(三郞寺)에 머물 것을 명하였고, 찬유는 3년 동안 삼랑사에 주석하였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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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명(貞明) 7년 가을 7월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에 도달하였으며, 배에서 내리자 마자 곧바로 창원 봉림(鳳林)으로 가서 진경대사(眞鏡大師)에게 귀국인사를 드렸다. 대사가 이르기를, “마침 오늘에야 만나게 되었구나!”하고, 상봉하게 됨을 크게 기뻐하면서 따로 선당(禪堂)을 꾸미고 대사를 법상(法床)에 오르게 하여 중국에서 보고 배운 법문(法門)을 듣는 한편 구법(求法)하고 무사히 귀국한데 대한 환영연도 겸하였다. 스님은 담좌(譚座)에 앉아 종용(縱容)히 말하되, “사람에는 노소(老少)가 있으나 법(法)에는 선후(先後)가 없다.”고 하였으며, 또한 여래(如來)의 밀인(密印)을 가지고 가섭(迦葉)의 비종(秘宗)을 연설하기도 하였다. 그후 삼랑사(三郞寺)로 가서 선백(禪伯)이 되었다. 대사가 그곳에서 3년을 지내고 보니 참으로 낙도(樂道)의 청재(淸齋)이며, 또한 참선하기에 가장 좋은 곳으로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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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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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는 삼랑사에 주석하다가, 고려 건국 후 태조의 명에 따라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의 주지가 되었다.[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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복견(伏聞)하니 태조(太祖) 신성대왕(神聖大王)께서 큰 포부를 품고 응기(膺期)하여 포(褒)를 잡아 성스러움을 보여주려 하니,마치 하(夏)나라 순(舜)임금이 개혁할 때 고천(顧天)의 명을 받아 주(周)나라를 비롯하여 출일(出日)의 성스러운 나라를 이룩함과 같았다. 이때 대사는 마치 조각달이 허공에 떠있듯이 고운(孤雲)이 산정(山頂)의 바위 사이를 오가듯 고상하였다. 푸른 용(龍)이 창랑(滄浪)을 건널 때 뗏목에 의지할 마음이 없다 하나, 봉새가 허공을 날면서도 오히려 오동나무 가지에 서식할 뜻이 없지 않은 것과 같았으니, 스님은 청려장(靑藜杖)을 짚고 곧바로 옥경(玉京)으로 나아가 궁중에 들어가서 태조대왕을 근알(覲謁)하였다. 대왕은 대사의 도덕이 고매하고 법신(法身)이 원현(圓現)하신 분이라고 존경하면서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에 주지(住持)하도록 청하므로 스님은 왕청(王請)에 따라 주지하면서 사부대중(四部大衆)을 크게 교화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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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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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찬유는 혜목산(慧目山)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大禪林)을 이룩하였다.[7] 이때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과 정종은 찬유에게 가사(袈裟)와 법의(法衣)를 하사하는 등 예로써 대우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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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상 광주(廣州) 혜목산(慧目山)은 고운 노을이 덮혀 있는 아름다운 곳으로써 연좌(宴坐)하기에 가장 적합하며, 구름 덮힌 계곡은 선거(禪居)에 가장 좋은 곳이라 여겨 오던 차 다시 그곳으로 이주하였다. 이후 사방(四方) 먼 곳에서 법문(法門)을 들으려 하는 사람들이 천리(千里)를 마치 규보(跬步)와 같이 가깝게 여겨 구름처럼 모여와 바다와 같은 해회(海會)를 이루었으며, 분주히 달려오는 불자(佛子)들에게 선도(善道)로써 끊임없이 지도하여 현문(玄門)에 문법대중(問法大衆)이 제제(濟濟)하였다.
태조가 바야흐로 스님을 존경하여 사자(師資)의 인연을 표하고자 적색 비단으로 만든 하납의(霞衲衣)와 좌구(座具) 등을 송정(送呈)하였다. 그로부터 얼마 후 태조가 승하하니 마치 해가 우천(虞泉)에 지는 것과 같이 천지가 캄캄하였다. 선시(善始)의 아름다운 인(因)을 생각하며 방칙(칙終)의 현로(玄路), 즉 임종의 명복을 장식하여 극락세계로 인도하였다. 이어 혜종대왕(惠宗大王)이 천조(踐阼)하여 공손한 생각으로 선왕을 받들어 추모하는 효심이 간절하였으며, 인(仁)을 권장하고 속(俗)을 교화하고 부처님을 존중하고 스님들을 높이 받드는 한편 차(茶)와 향(香), 무늬를 놓은 비단 법의(法衣)를 정상(呈上)하였다. 대사 또한 불심(佛心)으로 계도하여 부처님의 신통법력(神通法力)을 펴기도 하였다. 3년이 지난 후 공왕(恭王)이 승하(昇遐)하고 정종대왕(定宗大王)이 보업(寶業)을 계승하여 스님의 진풍(眞風)을 첨앙하였으니, 운납가사(雲衲袈裟)와 마납법의(磨衲法衣)를 송봉(送奉)하기도 하였다. 대사는 성조(聖朝)를 깊이 생각하고 국태민안(國泰民安)을 위하여 불사공덕(佛事功德)의 기도를 봉행하였다. 어찌 갑작스럽게 궁거(宮車)가 운궐(雲闕)을 떠나며, 홀연히 짚신을 인간세상에서 벗어버리는 때가 올 줄을 꿈엔들 알았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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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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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찬유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증진대사(證眞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또한 광종은 찬유를 개경 사나원(舍那院)에 머무르게 한 뒤 3일 만에 중광전(重光殿)에서 설법하게 하고 국사(國師)로 삼았으며, 은병·은향로·수정염주·법의 등을 내렸다.[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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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께서는 스님을 신향(信向)하는 마음이 깊고, 흠모(欽慕)하는 뜻 또한 지극하였다. 드디어 스님의 호를 증진대사(證眞大師)라 하고 도속(道俗)의 중사(重使)를 보내되 지검(芝檢)을 지참하여 금성(金城)으로 왕림하도록 초빙하였다. 대사는 불도(佛道)를 흥행(興行)하려면 좋은 시기를 놓쳐서는 안될 뿐 아니라 부처님께서도 불법(佛法)의 유통(流通)을 국왕에게 부촉(咐囑)하신 것을 생각하여 왕궁으로 가기를 결심하였으며, 드디어 호계(虎溪)를 나와 용궐(龍闕)로 나아갔다. 이 때 백설(白雪)같은 청중(聽衆)과 조정대부(朝廷大夫)인 군영(群英)들이 스님의 법안(法眼)을 우러러 보되 마치 주련(珠聯)과 같았으며, 자안(慈顔)을 대하되 환앙(環仰) 즉 마치 둥근 고리처럼 둘러서서 앙모(仰慕)하였다. 모시고 왕성(王城)에 있는 사나원(舍那院)에 이르렀다. 그 다음날 임금이 사나원(舍那院)으로 행행(幸行)하여 감사하되 제자(弟子)가 동림(東林)을 바라보듯 존경하였으며, 남간(南澗)을 향하여 정성을 기울였다.
스님께서 수기설법(隨機說法)함은 마치 깊은 골짜기에서 부는 회오리 바람소리와 같고, 수연부감(隨緣赴感)하는 것은 맑은 못에 비치는 달그림자와 같았다. 귀의하는 마음이 다시 간절하며 찬앙(鑽仰)하는 향심(向心) 또한 더욱 깊었다. 3일을 지낸 후 궁내(宮內)의 중광전(重光殿)에서 법회(法會)를 여니 금란가사(金襴袈裟)를 입고 자전[紫殿(法床)]에 올랐다. 임금이 스님의 과순(菓脣)을 보고 선열(禪悅)에 잠겼으며 연안(蓮眼)을 받들어 정성을 다하였다. 환구(環區)가 모두 피석(避席)의 예의를 폈으며 거국(擧國)이 함께 서신(書紳)의 뜻을 바쳤다. 삼귀의(三歸依)의 마음을 더욱 책려(策勵)하고 십선(十善)을 한층 더 닦게 되었다. 내지 개자겁(芥子劫)이 다하고 반석겁(盤石劫)이 다하더라도 반드시 부처님을 친견한 양인(良因)은 다하지 않으며, 또한 스님의 위대한 업적은 다할 때가 없을 것이라 염원하여 곧 곤룡포(袞龍袍)를 입고 면류관을 쓰고는 스님을 받들어 국사(國師)로 모시고 경건한 마음으로 향화(香火)의 인연을 맺으며, 돈독한 정성으로 사자(師資)의 예(禮)를 행하고는 마납가사(磨衲袈裟), 마납장삼(磨衲長衫)과 좌구(座具)·은병(銀甁)·은향로(銀香爐)·금구자발(金釦瓷鉢)·수정염주(水精念珠) 등을 선물로 헌납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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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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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는 노쇠함을 이유로 하직하여 운산(雲山)에 머물렀다. 광종은 이를 매우 아쉬워하였으며, 사자를 통해 자주 편지나 송덕시(頌德詩)를 지어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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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사가 말씀하시기를, “노승(老僧)은 이제 나이 상유(桑楡)에 임박하고 몸은 포류(蒲柳)처럼 노쇠하였으므로 다만 송문(松門)에 가서 휴족(休足)하면서 궁중인 금궐(金闕)을 향하여 폐하(陛下)에게 귀심(歸心)하기를 원할 뿐입니다.”라고 하였다. 임금이 비록 스님의 자안(慈顔)을 연모하나 다만 현지(玄旨)를 준수할 뿐이다. 떠나는 스님이 탄 상헌(象軒)을 바라보면서 전송하였고 안찰(鴈刹)을 우러러 항상 마음을 그곳으로 기울였다. 그 후 자주 성기(星騎)를 보내어 뜻을 전하며 선한(仙翰)을 날려 보내어 정성을 피력하되, 다음과 같은 송덕시(頌德詩)를 지어 보냈다.
혜등(慧燈)을 높이 들어 해향(海鄕)을 비추시었고,
진신(眞身)은 적적(寂寂)하나 화광(和光)을 나타냈도다.
패엽경(貝葉經) 연설하여 중생(衆生)을 제도하시고,
발우속 연꽃 피어 고요히 입정(入定)하셨네.
사자후(師子吼) 일음(一音)으로 무명(無明)을 흩어주시니,
이문(二門)이 상(相)을 떠나 진로(塵勞)에서 벗어났도다.
현관(玄關)은 깊고 깊어 산천(山川) 밖 저넘어 있어,
그곳을 선망하나 친견할 길 전혀 없네.
이 송덕시와 아울러 오정( 烏礻呈 )·방천(芳荈)·단요(丹徼)·명향(名香) 등의 선물을 보내어 신심(信心)을 표하고 간절히 법력(法力)을 빌었다. 대사는 천궐(天闕)에 하직하고 곧 운산(雲山)에 이르렀다. 구름과 칡넝쿨이 얽힌 산림(山林)은 서지(栖遲)하기에 적합하며, 수도하면서 바윗돌로 베개하고 흐르는 물로 양치질하기에 편의(便宜)하여 마음으로 열반할 곳으로 삼으려 하였다.
이로부터 누더기를 입은 납자(衲子)가 바람처럼 찾아오고, 대중공양을 올리기 위하여 오는 이가 구름과 같이 모여들었다. 대사는 색(色)과 공(空)을 모두 초월하여 선정(禪定)과 지혜가 함께 원만하였으며, 지도(至道)를 산중에서 행하고 현공(玄功)을 우내(宇內)에 두루 베풀었으니, 신비하면서 중생을 교화하시니 어찌 불(佛)이나 각자(覺者)와 다르겠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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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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입적
찬유는 958년(광종 9) 혜목산에서 나이 90세, 법랍 69세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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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덕(顯德) 5년 세집(歲集) 돈장(敦牂) 8월 월결(月缺) 5일 대사께서 곧 열반에 들고자 하여 목욕한 다음 방 앞에 대중을 모으라고 명하였다. 대중이 모두 뜰 앞에 모였다. 대사가 유훈(遺訓)하여 가로이르기를, “만법(萬法)은 모두 공(空)한 것, 나는 곧 떠나려 하니 일심(一心)으로 근본을 삼아 너희들은 힘써 정진(精進)하라. 마음이 일어나면 곧 법(法)이 생겨나고 마음이 사라지면 법(法)도 따라서 멸하나니, 인심(仁心)이 곧 부처님이거늘 어찌 별다른 종류가 있겠는가? 여래(如來)의 정계(正戒)를 힘써 보호하라! 유훈(遺訓)의 말씀을 마치고 방으로 들어가서 엄연(儼然)히 가부좌를 맺고 앉아 입적하였으니, 고달원(高達院) 선당(禪堂)이었다. 어희(於戱)라! 동신(東身)에 응(應)한지는 90세이고, 서계(西戒)를 받은지는 69하(夏)이다. 호계(虎溪)는 소리내어 오열하고 학수(鶴樹)의 빛은 우울함이 가득하였다. 문생(門生)들은 앞으로 누구를 의지할 것인가 하여 슬픔에 잠겼으며, 산중의 노스님들은 모두 자신의 노쇠함과 고위(枯萎)함을 탄식하였다. 스님과 청신사(淸信士), 청신녀(淸信女)들이 함께 가슴을 치고 발을 구르면서 통곡하는 소리가 암곡(巖谷)을 진동하였다.
다음날 신좌(神座)를 혜목산(慧目山)으로 옮겨 감실(龕室)을 열고 보니 안색(顔色)이 생전(生前)과 같았다. 터를 고르고 석호(石戶)를 시설하여 유골(遺骨)을 봉폐(封閉)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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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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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은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라 추증하고,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하였으며, 대사의 진영 1위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사리탑은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조성되었다. 흔홍(昕弘) 등 찬유의 제자들이 탑비의 건립을 청하자, 광종은 김정언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고, 975년(광종 26) 탑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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임금께서 부음(訃音)을 들으시고 선월(禪月)이 너무 일찍 빠짐을 개탄하며, 각화(覺花)가 먼저 떨어짐을 슬프다 하시고, 성사(星使)를 보내 곡서(鵠書)로써 조의를 표하고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추증하였다. 그리고 진영1정(眞影 一#)을 조성하고, 국공(國工)으로 하여금 돌을 다듬어 층총(層冢)을 만들어 문인들이 호곡하면서 색신(色身)을 받들어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탑을 세웠으니 이는 상법(象法)을 준수한 것이다. 대사는 심등(心燈)이 강렬하며 정수(定水)는 파랑(波浪)이 없고, 지혜는 바다와 같이 원융하며 자비의 구름은 온 세계를 덮었다. 불법을 배우고 선(禪)을 깨달은 덕행과 마군을 항복받고 세속을 진압한 위릉(威稜)과 입송서학(入宋西學)한 혁혁하고 현현(顯顯)한 공적과 귀국동화(歸國東化)한 미묘(微妙)하고 외외(巍巍)한 법력(法力)은 반도(盤桃)로 하여금 윤색(潤色)케 하였으니, 마치 맑은 물이 광명을 발하는 것과 같았다. 그 성스러운 공덕(功德)은 가히 지해(知解)로써 알지 못하며, 그 신비한 덕화(德化)는 가히 지식으로 알 수 없는 것이다. 그러나 오히려 법신(法身)은 무상(無像)한 것이지만 반드시 상(像)으로 말미암아 공(功)을 나타내며, 도체(道體)는 말이 없는 세계이나 반드시 말을 인(因)하여야 교리(敎理)를 보여줄 수 있으니 어찌 묘유(妙有)를 말미암지 아니하고 진공(眞空)을 체험할 수 있겠는가. 여기 스님의 큰 제자(弟子)인 양가승통(兩街僧統) 삼중대사(三重大師) 흔홍(昕弘) 등이 있으니, 그들은 법원(法苑)에서의 경종(鯨鐘)이며 선문(禪門)의 귀경(龜鏡)이다. 자비의 집에서 널리 중생을 구제하였던 옛 대덕(大德)스님들의 자취를 밟았으며, 법광(法光)의 횃불을 들어 중생의 혼구(昏衢)를 비추어 군생(群生)을 교화하였던 옛 고승들의 남긴 빛을 이어받았다. 한숨을 크게 내쉬면서 탄식하기를, “비록 은밀히 명심경구(銘心警句)를 설하였더라도 만약 위대한 기적(奇跡)을 돌에 새겨두지 않으면 어찌 일진(一眞)의 법(法)을 표하여 그대로 완전하게 남아 있게 할 수 있겠는가!”하였다. 그리하여 대사의 행장을 모아 임금께 주달(奏達)하여 유부(幼婦)의 문사(文辭)를 지어 우리 스님의 덕업(德業)을 비석에 기록할 수 있도록 간청하였다. 임금께서 “가(可)하다.” 하시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인 신(臣) 김정언(金廷彦)에게 명하기를, “고(故) 국사(國師) 혜목대사(慧目大師)는 덕행은 높아 구름 위에 있고 복덕(福德)은 넓어 모든 인간을 윤택하게 하였으니, 그대는 마땅히 훌륭한 문장(文章)으로 국사의 공훈(功勳)을 적어 비석에 그 무성한 업적을 기록하도록 하라.”고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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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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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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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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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9년 |
찬유 출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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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81년 |
찬유는 상주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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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0년 |
찬유는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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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92년 |
찬유는 당나라로 구법 유학을 떠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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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21년 |
찬유는 당나라에서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로 귀국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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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58년 |
찬유는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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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75년 |
찬유의 탑비가 건립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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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찬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18-55쪽.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33-5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누리미디어.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찬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