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조선 세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
(→내용) |
||
33번째 줄: | 33번째 줄: | ||
세종(世宗, 1397년~1450)은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다. 이름은 도(祹)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이다. | 세종(世宗, 1397년~1450)은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다. 이름은 도(祹)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이다. | ||
− | |||
===출생과 즉위=== | ===출생과 즉위=== | ||
− | [[조선 세종]]은 [[조선 태종|태종(太宗)]]과 [[원경왕후|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4월 10일 한양 준수방(俊秀坊)의 [[조선 태종|태종]]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다. 1408년(태종 8) 2월 11일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1412년(태종 12) 5월 3일에 다시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18년(태종 18) 6월 3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한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조선 세종]]은 [[조선 태종|태종(太宗)]]과 [[원경왕후|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4월 10일 한양 준수방(俊秀坊)의 [[조선 태종|태종]]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다. 1408년(태종 8) 2월 11일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청송 심씨 [[심온]]의 [[소헌왕후|딸]]과 혼인했다. 1412년(태종 12) 5월 3일에 다시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18년(태종 18) 6월 3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한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 | ===[[집현전]]의 설치와 인재양성=== | ||
+ | [[조선 세종]]은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를 완성하고 성리학(性理學)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1420년 이를 위한 학술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하였다. [[조선 세종|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으며, 이들이 장기간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가독서|사가독서(賜暇讀書)]]로, [[집현전]] 관원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政務)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면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 ||
+ | ===[[훈민정음]]의 창제=== | ||
+ | [[조선 세종|세종]]이 [[훈민정음]]을 처음 창제한 것은 1443년(세종 25) 12월이었다. 이후 세종은 [[최항|최항(崔恒)]]· [[박팽년|박팽년(朴彭年)]]· [[신숙주|신숙주(申叔舟)]]· [[이현로|이현로(李賢老)]]· [[이개|이개(李塏)]]· [[강희안|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운회|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고 국정 운영에 관한 문서들을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시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의 완성을 공식 반포하였다. 세종은 『[[용비어천가|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삼강행실도|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훈민정음으로 해설을 달아 반포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동국정운|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역해|홍무정운역해(洪武正韻譯解)]]』 등을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정리하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의례와 음악의 정비=== | ||
+ | ====의례분야==== | ||
+ | 국가 의례의 정비는 새 나라 조선의 위상에 걸맞는 의례의 제도를 확정하는 것으로 태종대 의례상정소가 설치된 이후 본격화되었고 세종대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태종~세종대에 추진된 오례 정비의 결과가 정리된 것이 바로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이다. 세종대에 정비된 오례의 내용은 이후 세조~성종대의 보완·정비 과정을 거쳐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간행·반포로 최종 귀결되었다. | ||
+ |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음악분야==== | ||
+ |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 정비, 악기(樂器) 제작, 향악(鄕樂) 창작, 정간보(井間譜)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세종은 종래의 불완전한 아악을 정비하기 위해 박연(朴堧) 등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고, 편경(編磬)·편종(編鐘) 등의 아악기를 새로 만들며, 조회(朝會)·회례(會禮) 및 국가 제례에서 사용할 아악을 제정하게 하였다. 또, 세종은 직접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봉래의(鳳來儀)」 등의 음악을 작곡하여 국가 의례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한편, 세종은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간보(井間譜)이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법제의 정비=== | ||
+ | 1397년(태조 6)에 『경제육전(經濟六典)』이 편찬되었고, 1408년(태종 8)에는 『경제육전』 이후의 법령들을 모은 『속육전(續六典)』이 편찬되었다. 이와 같은 법전 편찬의 흐름은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먼저 1422년(세종 4)~1428년에 『속육전』 이후 시행된 조례(條例)들을 정리한 『신속육전등록(新續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이어 1433년(세종 15)에는 『경제육전』 이후 편찬된 『속육전』 계열 법전들의 내용과 그 이후 시행된 조례들을 종합·정리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과 『육전등록(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 ||
+ |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과학 기술의 발전=== | ||
+ | ====천문분야=== | ||
+ | 세종은 1432년(세종 14)부터 장영실(蔣英實)· 이천(李蕆) 등에게 혼천의(渾天儀)를 비롯한 각종 천문 관측 기계들을 제작하게 하여 1438년에 모두 완성하였다. 1434년에는 경복궁 안에 석축 간의대(簡儀臺)를 축조하고 이곳에 관측 기계들을 비치하여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1434년에는 물시계 자격루(自擊漏)가 만들어졌고, 이것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여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또,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測雨器)가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가 마련되었다. 한편, 세종은 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 결과 『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1442년)과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1445) 등이 편찬되었다. | ||
+ |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의학분야==== | ||
+ | 세종은 1431년(세종 13) 집현전 학사 유효통(兪孝通) 등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연구하게 하여, 2년 만에 『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또, 1445년에는 역시 집현전에 명하여 임상적 처방을 병증에 따라서 분류·집성한 『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였다. | ||
+ |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농업분야==== | ||
+ | 세종은 삼남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농사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농부들로부터 농사짓는 방법들을 채집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삼남에서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농사 방법들을 종합·정리하게 했는데, 그 결과물이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 ||
+ |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인쇄술분야==== | ||
+ | 금속활자의 주조가 활발히 추진되어 경자자(庚子字, 1420년), 갑인자(甲寅字, 1434년), 병진자(丙辰字, 1436년) 등이 만들어졌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군사분야==== | ||
+ |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각종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고, 1448년(세종 30)에는 화포 제작 및 화약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이 편찬되었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
+ | ===공법의 시행=== | ||
+ | 세종은 1436년(세종 18)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상세정보 집현전 학자들에게 관련 제도를 연구하게 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 다음 1443년(세종 25) 7월 하삼도에서부터 공법을 실시하였다. 공법 이전에는 관리가 매년 풍·흉작을 조사하여 세율을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했으나, 풍흉을 조사하는 답험관의 부정으로 폐해가 컸기 때문에 이를 개정한 것이다. 공법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기본 세율을 1/20로 하는 것이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북방 개척=== | ||
+ | 세종은 빈번한 침입과 약탈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던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유역에는 여연군·자성군·무창군·우예군 등의 4군을 설치했고,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경성·회령·종성·경흥·온성·부령 등의 6진을 개척하였다. <ref>강문식,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44 세종(조선) (世宗)]",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7년 8월 21일 (월) 16:17 판
세종(世宗) | |
대표명칭 | 세종 |
---|---|
한자표기 | 世宗 |
생몰년 | 1397-1450 |
이칭 | 세종대왕 |
시호 | 장헌영문예무인성명효대왕(莊憲英文睿武仁聖明孝大王) |
자 | 원정(元正)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왕 |
배우자 | 소헌왕후 |
부 | 조선 태종 |
모 | 원경왕후 |
자녀 | 정소공주,조선 문종, 정의공주, 조선 세조, 안평대군, 임영대군, 광평대군, 금성대군, 평원대군, 영응대군 |
전임자 | 조선 태종 |
후임자 | 조선 문종 |
능묘 | 영릉 |
목차
정의
세종(世宗, 1397년~1450)은 조선의 제4대 국왕으로, 재위 기간은 1418~1450년이다. 이름은 도(祹)이고 자(字)는 원정(元正)이며, ‘세종(世宗)’은 묘호(廟號)이다.
출생과 즉위
조선 세종은 태종(太宗)과 원경왕후(元敬王后) 민씨(閔氏)의 셋째 아들로, 1397년(태조 6) 4월 10일 한양 준수방(俊秀坊)의 태종 사저(私邸)에서 출생하였다. 1408년(태종 8) 2월 11일 충녕군(忠寧君)에 봉해졌고, 청송 심씨 심온의 딸과 혼인했다. 1412년(태종 12) 5월 3일에 다시 충녕대군(忠寧大君)으로 진봉(進封)되었다. 1418년(태종 18) 6월 3일 세자에 책봉되었으며, 같은 해 8월 10일 태종의 양위를 받아 경복궁 근정전(勤政殿)에서 즉위하였다. [1]
집현전의 설치와 인재양성
조선 세종은 조선의 문물·제도 정비를 완성하고 성리학(性理學)에 기반한 왕도정치(王道政治)를 원만히 수행하기 위해서는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이 필요하다고 판단하였다. 1420년 이를 위한 학술 기관으로 집현전을 설립하였다. 세종은 젊고 유능한 학자들을 집현전 학사로 발탁했으며, 이들이 장기간 집현전에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러 가지 특전을 주었다. 그 중에서 대표적인 것이 사가독서(賜暇讀書)로, 집현전 관원들에게 일정 기간 휴가를 주어 정무(政務)에서 벗어나 재충전을 하면서 학문 연구에만 전념할 수 있도록 하는 제도이다.
훈민정음의 창제
세종이 훈민정음을 처음 창제한 것은 1443년(세종 25) 12월이었다. 이후 세종은 최항(崔恒)· 박팽년(朴彭年)· 신숙주(申叔舟)· 이현로(李賢老)· 이개(李塏)· 강희안(姜希顔) 등에게 명하여 훈민정음으로 『운회(韻會)』를 번역하게 하였고 국정 운영에 관한 문서들을 훈민정음으로 작성하는 등의 여러 가지 시험 과정을 거쳤다. 그리고 1446년(세종 28) 9월 29일, 마침내 훈민정음의 완성을 공식 반포하였다. 세종은 『용비어천가(龍飛御天歌)』를 훈민정음으로 번역하거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에 훈민정음으로 해설을 달아 반포하는 등 훈민정음 보급을 위해 여러 가지 노력을 기울였다. 또, 『동국정운(東國正韻)』·『홍무정운역해(洪武正韻譯解)』 등을 편찬하여 훈민정음으로 한자의 정확한 발음을 정리하는 작업도 추진하였다. [2]
의례와 음악의 정비
의례분야
국가 의례의 정비는 새 나라 조선의 위상에 걸맞는 의례의 제도를 확정하는 것으로 태종대 의례상정소가 설치된 이후 본격화되었고 세종대 집현전이 설치되면서 더욱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태종~세종대에 추진된 오례 정비의 결과가 정리된 것이 바로 『세종실록(世宗實錄)』에 부록으로 수록되어 있는 「세종실록오례(世宗實錄五禮)」이다. 세종대에 정비된 오례의 내용은 이후 세조~성종대의 보완·정비 과정을 거쳐 1474년(성종 5) 『국조오례의(國朝五禮儀)』의 간행·반포로 최종 귀결되었다. [3]
음악분야
세종의 음악적 업적은 크게 아악(雅樂) 정비, 악기(樂器) 제작, 향악(鄕樂) 창작, 정간보(井間譜) 창안 등으로 나누어 볼 수 있다. 먼저, 세종은 종래의 불완전한 아악을 정비하기 위해 박연(朴堧) 등으로 하여금 율관(律管)을 제정하고, 편경(編磬)·편종(編鐘) 등의 아악기를 새로 만들며, 조회(朝會)·회례(會禮) 및 국가 제례에서 사용할 아악을 제정하게 하였다. 또, 세종은 직접 「정대업(定大業)」·「보태평(保太平)」·「봉래의(鳳來儀)」 등의 음악을 작곡하여 국가 의례에서 연주하도록 했다. 한편, 세종은 음의 시가(時價)와 박자를 표시할 수 있는 기보법(記譜法)을 창안했는데, 그것이 바로 정간보(井間譜)이다. [4]
법제의 정비
1397년(태조 6)에 『경제육전(經濟六典)』이 편찬되었고, 1408년(태종 8)에는 『경제육전』 이후의 법령들을 모은 『속육전(續六典)』이 편찬되었다. 이와 같은 법전 편찬의 흐름은 세종대에도 계속되었는데, 먼저 1422년(세종 4)~1428년에 『속육전』 이후 시행된 조례(條例)들을 정리한 『신속육전등록(新續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이어 1433년(세종 15)에는 『경제육전』 이후 편찬된 『속육전』 계열 법전들의 내용과 그 이후 시행된 조례들을 종합·정리한 『신찬경제속육전(新撰經濟續六典)』과 『육전등록(六典謄錄)』이 편찬되었다. [5]
과학 기술의 발전
=천문분야
세종은 1432년(세종 14)부터 장영실(蔣英實)· 이천(李蕆) 등에게 혼천의(渾天儀)를 비롯한 각종 천문 관측 기계들을 제작하게 하여 1438년에 모두 완성하였다. 1434년에는 경복궁 안에 석축 간의대(簡儀臺)를 축조하고 이곳에 관측 기계들을 비치하여 매일 밤 천문을 관측하게 하였다. 1434년에는 물시계 자격루(自擊漏)가 만들어졌고, 이것을 보루각(報漏閣)에 설치하여 표준시계로 사용하였다. 또, 1441년(세종 23)에는 측우기(測雨器)가 발명되어 새로운 강우량 측정 제도가 마련되었다. 한편, 세종은 역서(曆書)의 정리와 편찬에도 관심을 가졌는데, 그 결과 『 칠정산내외편(七政算內外篇)』(1442년)과 『 제가역상집(諸家曆象集)』(1445) 등이 편찬되었다. [6]
의학분야
세종은 1431년(세종 13) 집현전 학사 유효통(兪孝通) 등에게 명하여 우리나라에서 생산되는 약재를 이용한 처방을 연구하게 하여, 2년 만에 『 향약집성방(鄕藥集成方)』을 편찬하였다. 또, 1445년에는 역시 집현전에 명하여 임상적 처방을 병증에 따라서 분류·집성한 『 의방유취(醫方類聚)』를 편찬하였다. [7]
농업분야
세종은 삼남 지역에 관리를 파견하여 농사 경험이 풍부한 나이 많은 농부들로부터 농사짓는 방법들을 채집하게 하였다. 그리고 정초(鄭招) 등에게 명하여 삼남에서의 조사 결과를 바탕으로 농사 방법들을 종합·정리하게 했는데, 그 결과물이 1429년(세종 11)에 편찬된 『 농사직설(農事直說)』이다. [8]
인쇄술분야
금속활자의 주조가 활발히 추진되어 경자자(庚子字, 1420년), 갑인자(甲寅字, 1434년), 병진자(丙辰字, 1436년) 등이 만들어졌다. [9]
군사분야
화약 무기 제조 기술이 크게 발전하여 각종 화포(火砲)의 개량과 발명이 계속되었고, 1448년(세종 30)에는 화포 제작 및 화약 사용법을 정리한 『총통등록(銃筒謄錄)』이 편찬되었다. [10]
공법의 시행
세종은 1436년(세종 18) 공법상정소(貢法詳定所)를 설치하고 상세정보 집현전 학자들에게 관련 제도를 연구하게 하는 등의 과정을 거치 다음 1443년(세종 25) 7월 하삼도에서부터 공법을 실시하였다. 공법 이전에는 관리가 매년 풍·흉작을 조사하여 세율을 정하는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을 적용했으나, 풍흉을 조사하는 답험관의 부정으로 폐해가 컸기 때문에 이를 개정한 것이다. 공법은 토지를 비옥도에 따라 6등급, 풍흉 정도에 따라 9등급으로 나누고 기본 세율을 1/20로 하는 것이다. [11]
북방 개척
세종은 빈번한 침입과 약탈로 많은 문제를 야기하고 있던 여진족에 대한 정벌을 적극적으로 추진하였다. 그 결과 압록강 유역에는 여연군·자성군·무창군·우예군 등의 4군을 설치했고, 두만강 방면에는 김종서(金宗瑞)를 보내서 경성·회령·종성·경흥·온성·부령 등의 6진을 개척하였다. [1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조선 세종 | 왕희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조선 세종 | 한언공 | A는 B의 어버이다 | |
한언공 | 서경덕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서경덕 | 신희남 | A는 B와 교유하였다 | |
신희남 | 조선 세종 | A는 B의 스승이다 | |
조선 선조 | 석봉천자문 편찬 | A는 B를 명령하였다 | |
조선 세종 | 석봉천자문 편찬 | A는 B를 주도하였다 | |
조선 세종 | 석봉천자문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583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583 | 조선 세종이 석봉천자문을 저술하였다 |
주석
- ↑ 강문식, "한호",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강문식, "세종(조선) (世宗)",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이병태, 『석봉 한호의 생애』, 석봉한호 기념사업회, 2005.