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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0일 (일) 23:55 판
대사례의 (大射禮儀)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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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대사례의 |
---|---|
한자표기 | 大射禮儀 |
유형 | 의례 |
관련개념 | 군례(대사례) |
정의
내용
성균관 하연대에 사단(射壇)을 설치하고 거행하였다. 사단은 3단으로 되어 있는데 1단에는 왕이 앉는 어좌위(御座位)가 있고, 2단에는 왕이 활을 쏘는 어사위(御射位)가 있으며, 3단의 서쪽에는 시사관(侍射官)이 활을 쏘는 자리가 있었다. 또 그 아래에는 시사관 및 여러 관원들이 자리하였다. 활의 과녁이 있는 후단(帿壇)은 활 쏘는 자리에서 90보 떨어진 곳에 세웠다. 왕이 쏘는 과녁은 곰의 머리가 그려진 웅후(雄侯)였고, 백관이 쏘는 과녁은 사슴의 머리가 그려진 미후(麋侯)였다.[2]
먼저 왕께서 어좌위에 서서 활을 쏘셨다. 곤룡포를 입으셨고, 활을 잡은 쪽의 팔에는 팔을 보호할 수 있는 팔찌[拾]을 찼으며, 시위를 잡아당기는 손의 엄지손가락에는 깍지[角指]를 끼셨다. 활은 총4발을 쏘는데, 활을 쏘는 것에 맞추어 음악이 연주된다. 음악은 총7절로 되어 있다. 활쏘기에 앞서 음악이 제1절부터 연주되고 제4절 연주를 시작할 때 왕이 첫 번째 화살을 쏜다. 이렇게 하여 제7절을 연주할 때 마지막 한 발을 쏜다. 이 날 왕은 4발의 화살 중 3발을 명중시켜 매우 기뻐하였다.[3]
다음으로 백관들의 활쏘기가 진행되었다. 백관들은 두 사람씩 짝을 지어 활을 쐈다. 백관들이 활을 쏘는 자리는 당상(堂上)과 당하(堂下)의 두 곳이 있었는데, 신분이 높은 사람은 당상에서 쏘고 낮은 사람은 당하에서 쏜다. 밀창군과 이익정은 모두 당상에서 쏘았다. 백관들 역시 왕과 마찬가지로 총4발을 쏜다. 음악은 총5절로 되어 있는데 왕이 쏠 때와 달리, 제1발을 쏠 때 제2절이 연주된다. 밀창군이 흑단령을 입고 팔찌와 깍지를 찬 채, 먼저 활을 쏘았다. 밀창군은 활시위를 오른손으로 잡아당기는 우궁(右弓)이었다. 그러나 화살을 하나도 명중시키지 못해 팔찌와 깍지를 벗고, 오른손에 활시위를 벗긴 이궁(弛弓)을 들고 있어야 했다.[4]
이익정의 차례가 되어 역시 흑단령 차림으로 활을 쐈다. 이익정 역시 우궁이었다. 이익정은 문관임에도 불구하고 3발을 명중시켰다. 화살을 명중시킨 사람은 명중시키지 못한 사람과 구별하기 위해, 팔찌와 깍지를 낀 채 왼손에 활시위를 맨 장궁(張弓)을 들고 있었다. 이 날 문관 중에서는 4발을 전부 맞힌 사람은 없었고, 5명이 3발을 맞혔다. 무관 중에서는 4발을 모두 명중시킨 사람이 4명이었는데, 이익정이 포함되었다. 이 날 종친 은 평균 1.5발, 문관은 1.9발, 무관은 3.2발을 맞추었다. 이들이 서쪽에서 활을 쏠 때 병조판서가 동쪽에 서서 이름과 명중시킨 숫자를 기록하였다.[5]
활쏘기가 끝난 후 화살을 명중시킨 수에 따라 상과 벌을 내리는 의식이 진행되었다. 이 날의 행사를 주관했던 병조판서는 왕께 의식이 끝났음을 아뢰었다. 또 병조정랑은 화살을 맞힌 자의 직함과 이름을 불러 동쪽 계단 아래에 서쪽을 보고 서게 하고, 맞히지 못한 자의 직함과 이름을 불러 서쪽 계단 아래에 동쪽을 보고 서게 하였다. 상을 받는 사람은 총30명 중 27명이었고, 하나도 맞히지 못해 벌을 받는 사람은 3명이었다. 상으로는 옷감의 겉감과 안감, 탑견(搭肩), 활과 화살이 마련되었고, 벌을 받는 사람은 술을 마셔야 했다. 동쪽 계단 아래에는 상으로 내릴 물건들이 준비되어 있었고, 서쪽 계단 아래에는 벌주가 준비되어 있었다.[6]
먼저 상이 내려지는데 3발을 맞힌 이익정이 참여하였다. 동쪽 계단 아래에 서쪽을 보고 서 있다가 차례가 되면 계단 쪽으로 나아가 군기시(軍器寺)의 관리가 주는 상을 받았다. 상을 받는 순서는 신분에 따르지 않고 맞힌 숫자에 따랐다. 4발을 모두 명중시킨 사람은 옷감의 겉감과 안감 및 탑견을 받고, 3발은 옷감의 안감과 탑견을 받으며, 2발은 활과 화살, 1발은 활만 받는다. 이익정은 안감과 탑견을 받았다. 이익정은 계단 쪽으로 나가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상을 받고 엎드렸다가 일어나서 제자리로 돌아왔다.[7]
이어 한 발도 맞히지 못한 밀창군을 포함한 세 사람은 벌주를 마셔야 했다. 한 발도 맞히지 못한 사람은 종친은 밀창군 1명이었고 나머지 2명은 문관이었다. 서쪽 계단 아래에 설 때 신분이 높은 사람이 북쪽에 서기 때문에 밀창군이 가장 북쪽에 있었고, 벌주도 가장 먼저 마셔야 했다. 밀창군은 계단 쪽으로 가서, 북쪽을 향해 꿇어앉아 사옹원(司饔院) 관리가 떠주는 술잔을 받고, 일어서서 술을 마시고 제자리로 돌아갔다. 벌주를 마실 때 오른손에는 술잔을 잡고, 왼손에는 활을 잡고 있었다. 시사관에게 상과 벌을 내리는 것으로 대사례의는 끝난다.[8]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
왕 | 대사례의 | A는 B에 참석하였다 |
백관 | 대사례의 | A는 B에 참여한다 |
대사례의 | 대사례 | A는 B의 부분이다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大射禮儀軌』 「儀註帙」
-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 4~5쪽.
-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 4~5쪽.
-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 4~5쪽.
-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 4~5쪽.
-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 4~5쪽.
-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 4~5쪽.
-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 4~5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國朝五禮儀』
- 『대사례의궤』
- 『世宗實錄五禮儀』
- 국립민속박물관, 『조선시대 대사례와 향사례』, 국립민속박물관, 2009.
- 신병주, 「왕대 대사례의 실시와 『대사례의궤』」, 『한국학보』 28권 1호, 일지사(한국학보), 2002.
- 최연우, 「대사례와 전통복식-밀창군 부자(父子)의 행적을 사례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