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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고성 유점사|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평원 법흥사|법흥사(法興寺)]]로 가서 [[휴정|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선조|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ref>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고성 유점사|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휴정|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평원 법흥사|법흥사(法興寺)]]로 가서 [[휴정|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조선 선조|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ref>손경희, "[http://gimcheon.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cheon&dataType=01&contents_id=GC03200875 사명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blockquote | ||
+ | |壬辰年 여름에는 倭賊이 嶺東으로 침입하여 유점사에까지 이르렀다. 그 때 어떤 사람이 “우리 나라 사람이 왜적들의 길잡이가 되었다.”라고 하는 말을 듣고, 스님이 말씀하되 “만약 倭賊뿐이라면 설득하기 어려운 일이지만, 혹시 우리 나라 사람이 案內를 하고 있다면 또한 筆談으로 이해를 시킬 수 있을 것이다.”라고 말하고, 10여 명의 문도를 거느리고 곧 유점사 山門으로 들어갔다. 문도들은 모두 결박을 당하였으나, 오직 스님만은 泰然한 자세로 당당하게 一柱門·中門을 거쳐 中堂인 큰 법당에 이르렀다. 이 때 倭將의 頭目이 스님을 보고 非常한 人物인 줄 알고 賓主의 禮儀로써 공경히 접대하고 결박했던 모든 스님들을 풀어 주었다. 스님께서 글로써(筆談) 주고 받으면서 法門을 들려 주었더니, 모든 倭寇들이 敬服하고 산중의 깊고 고요한 곳으로 보내드렸다. 스님께서 門徒들에게 이르시되, “如來께서 出世하신 본 뜻은 중생을 救護하기 위함인데, 이 倭賊들이 앞으로 횡포가 심하여져서 우리 백성들을 殘害할까 염려되니, 내가 마땅히 그들을 찾아가 狂賊들을 說諭하여 흉악한 무기를 버리게 한다면 아마 부처님의 慈悲한 가르침을 저버리지 않는 것이 될 것이다.”라 하고, 곧 바로 육환장을 짚고 高城으로 들어가니 賊將 3人이 함께 禮遇를 지극히 하였다. 스님께서 글을 써서 그들에게 절대로 殺生하기를 즐겨하지 말 것을 권하니, 세 장수가 모두 合掌하고 꿇어 앉아 戒를 받았다. 3일 동안 그들의 營內에 머물면서供養을 받고 떠날 때, 倭將들이 高城 문 밖까지 나와서 祖宴(錢別)을 베풀어 주었다. 당시 高城·杆城 등九個郡의 백성들이 모두 虔劉의 殘酷을 면하게 된 것은 대개 스님의 덕택이었다. | ||
+ | 1592년 4월 마침내 宣祖大王이 한양을 내어주고 義州를 向하여 떠날 때, 비분 강개하여 모든 스님들에게 이르되, “우리들이 나라 땅에 살면서 편안히 먹고 자고 지금까지 살 수 있었던 것은 秋毫만한 작은 것도 모두 임금의 恩惠가 아닌 것이 없다. 이와 같이 어렵고 위태한 國難을 당하여, 그 어찌 앉아서만 바라볼 수 있겠는가?” 하고, 곧 數百名의 스님을 모아 火急히 順安 法興寺로 달려가니, 이미 각지에서 몰려온 數千名의 義僧兵이 모여 있었다. 이 때 淸虛스님은 朝廷으로부터 「摠攝諸道僧兵」이라는 직책을 받았으나, 스님께서는 自身이 年老하여 氣力이 衰耗하다는 이유로 代身 사명스님을 추천하였다. 그리하여 드디어 사명스님은 義僧兵인 대중을 통솔하고 軆察使 柳成龍을 따라 明나라로부터 온 응원군의 總司令官劉挺을 도왔다. | ||
+ | 그 다음 해인 1593년 1월에 平壤을 탈환하고, 倭將인 小西行長을 몰아냈다. 그 후 都元帥 權慄을 따라 嶺南으로 내려가 宜寧에주둔하면서 적을 죽이고 生捕하는 큰 전과를 올렸다. 선조 임금은 이를 嘉賞히 여겨 堂上官의 官階를 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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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5일 (화) 13:42 판
유정(惟政) | |
대표명칭 | 유정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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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惟政 |
생몰년 | 1544년(중종 39)-1610년(광해군 2) |
시호 | 자통홍제존자(慈通弘濟尊者) |
호 | 사명당(四溟堂), 사명(四溟), 송운(松雲) |
법명 | 유정(惟政) |
자 | 이환(離幻) |
이칭 | 종봉(鍾峯) |
성씨 | 임씨 |
본관 | 풍천(豊川) |
속명 | 임응규(任應奎) |
출신지 | 경상남도 밀양 |
승탑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 |
승탑비 | 합천 해인사 홍제암 사명대사탑비 |
목차
정의
조선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유정은 1544년(중종 39) 10월 17일에 밀양(密陽)의 삼강동에서 임수성(任守成)과 그 부인인 달성서씨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유정의 집안은 선대에 대대로 명성과 신망이 높았던 풍천의 이름난 집안이었다. 증조부 임효곤(任孝昆)은 문과에 급제하여 장악원정(掌樂院正)을, 조부 임종원(任宗元)은 강계부사를 지냈는데, 증조부가 일찍이 대구의 수령을 지냈기 때문에 밀양에 살게 되었다. 그가 태어나던 날에는 어머니가 꿈에 흰 구름을 타고 황색 두건을 쓴 금인(金人)을 데리고 만 길이나 되는 높은 대에 올라가니 늙은 신선이 그 위에 걸터앉아 있다가 머리를 땅에 대고 절을 하는 꿈을 꾸었다고 한다.[1]
출가수행
유정은 7세를 전후하여 역사를 배우고, 13세 때 황여헌(黃汝獻)에게 『맹자』를 배웠다. 1558년(명종 13) 어머니가 죽고, 1559년 아버지가 죽자 김천 직지사(直指寺)로 출가하여 신묵(信默)의 제자가 되었다.[2]
활동
임진왜란 이전
유정은 1561년 선과(禪科)에 응시하여 장원급제한 후 봉은사에 머물며 불교 경전을 부지런히 읽었다. 20여 세에 동녀배들로 갑회(甲會)를 조직하고 갑회문을 지어 나라와 백성을 위해 기도하며 건전한 승려 생활을 실행하자는 뜻을 다짐하였다. 한편 사암(思菴) 박순(朴淳), 아계(鵝溪) 이산해(李山海), 제봉(霽峰) 고경명(高敬命), 고죽(孤竹) 최경창(崔慶昌), 자순(子順) 임제(林悌), 손곡(蓀谷) 이달(李達) 등 사대부 문인들과 시를 지으며 교유하였다. 한번은 하곡(荷谷) 허봉(許篈)과 중국의 문장가 한유(韓愈)의 글 한 편을 외우는 내기에 이겨 책 한 권을 받았다. 고봉(高峯) 기대승(奇大升)이 이 이야기를 듣고 "재주만 믿고 스스로 만족하면 학문에 발전은 없을 것"이라 하니, 이 말을 새겨듣고 공부에 열중하였으며, 소재(蘇齋) 노수신(盧守愼)에게서 많은 책을 빌려 읽는 이외에도 사자(四子, 공자·맹자·증자·자사)와 이백(李白), 두보(杜甫)의 시를 배워 일취월장하였다.[3]
유정은 1573년 직지사 주지로 있으면서 허응당(虛應堂) 보우(普雨)의 문집과 잡저의 간행에 발문을 쓰고 교정을 보았다. 1575년 선종(禪宗)의 수찰(首刹)인 봉은사의 주지로 천거되었으나 사양하고, 묘향산 보현사 서산대사의 문하로 들어갔다. 이로부터 3년 동안 수행을 거듭하였으며, 그 사이에 유정은 대동강 부벽루(浮碧樓)에 오르고, 고운 최치원의 족적을 따라 해인사를 비롯하여 사천 곤양성(昆陽城)과 하동 악양루(岳陽樓)를 유력하였다.[4]
1578년 서산대사의 문하를 떠나 금강산 보덕암(報德庵)으로 들어가 세번의 안거(安居)를 지내며 「동해사」 등 많은 시를 지었다. 1579년 『선가귀감』의 발문, 1580년 「부석사 안양루 중창기문」을 짓고 썼다. 이어 팔공산, 지리산, 청량산, 태백산 등을 순력하면서, 특히 태백산 운망사(雲望寺)의 이름을 고쳐 영은사(靈隱寺)라 한 것으로 보인다. 1583년 가을 관서로 가는 도중에 귀양살이하는 친한 벗 하곡을 생각하며 시를 지었다. 1586년 봄 옥천(沃天)에서 제자들을 가르치고 있던 중 간밤의 비바람에 떨어진 낙화를 보고 문득 '무상(無常)'의 법을 깨달았다. 이에 제자들을 다 돌려보내고 홀로 선방에 들어가 가부좌하고 열흘 동안 선정에 들었다. 1589년에는 오대산 영감난야(靈鑑蘭若)에 머물면서 「월정사 법당의 서까래를 고치고 올린 글」을 지어 모금하며 사찰의 중수에 매달렸다. 이 가운데 정여립의 역모 사건에 모함을 받아 투옥되었으나 강릉 사림의 도움으로 풀려났다. 5년 동안 계속된 공사는 단오절을 맞아 낙성식과 향조대회를 열어 완성을 고한 다음 유정은 금강산으로 들어갔다.[5]
임진왜란
1592년(선조 25)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당시 유점사(楡岾寺)에 있으면서 인근 아홉 고을의 백성들을 구출하였다. 이때 조정의 근왕문(勤王文)과 스승 서산대사의 격문을 받고 승병을 모아 순안 법흥사(法興寺)로 가서 서산대사와 합류하였다. 그곳에서 의승도대장(義僧都大將)이 되어 승병 2,000명을 이끌고 평양성 탈환의 전초 구실을 담당하였다. 1593년(선조 26) 1월 명나라 구원군이 주축이 되었던 평양성 탈환의 혈전에 참가하여 혁혁한 전공을 세웠고, 그해 3월 서울 근교의 삼각산 노원평(蘆原坪) 및 우관동 전투에서도 큰 공을 세웠다. 선조는 사명대사의 전공을 포장하여 선교양종판사(禪敎兩宗判事)를 제수하였다.[6]
입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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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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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양혜원, "유정(사명대사) (惟政)",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목정배,
"유정",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쪽.
- ↑ 사명 유정 지음, 이상현 옮김, 『사명대사집』, 동국대학교출판부, 2014, 9-10쪽.
- ↑ 손경희, "사명대사",
『디지털김천문화대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합천 해인사 사명대사석장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조선편1,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9, 102-137쪽.
- "해인사사명대사석장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