승탑비문 작업노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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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신라 문성왕|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ref>김영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644 혜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귀국 후 [[화순 쌍봉사|쌍봉사(雙峰寺)]]에서 [[하안거|하안거(夏安居)]]를 지냈으며,<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166&cid=50763&categoryId=50784 쌍봉사]",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곡성 태안사|대안사(大安寺)]]에서 법회를 베풀어 [[동리산문|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3439&cid=40942&categoryId=33380 혜철]",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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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신라 문성왕|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ref>김영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644 혜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귀국 후 [[화순 쌍봉사|쌍봉사(雙峰寺)]]에서 [[하안거|하안거(夏安居)]]를 지냈으며,<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2166&cid=50763&categoryId=50784 쌍봉사]",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곡성 태안사|대안사(大安寺)]]에서 법회를 베풀어 [[동리산문|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163439&cid=40942&categoryId=33380 혜철]",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이 때 문성왕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를 청하여 물었다.<ref>김영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3644 혜철]",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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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윽고 무주 관내 쌍봉난야에서 여름 안거를 하였을 때 햇볕이 너무 뜨거워 산천이 말라붙었는데 비는 물론 조각구름조차 없었다. 州司가 선사에게 간절히 청하니 선사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좋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기원하였다. 잠시 후 단비가 미미하게 내려 무주 관내의 들을 적시더니 죽죽 쏟아져 큰 비가 되었다. ...(중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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혜철은 861년([[신라 경문왕|경문왕]] 1)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탑비는 [[신라 경문왕|경문왕]]의 왕명으로 872년([[신라 경문왕|경문왕]] 12)에 건립되었다.<ref>"[http://gsm.nricp.go.kr/_third/user/frame.jsp?View=search&No=4&ksmno=2818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금석문 세부정보,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sup>online</sup></online></html>, 국립문화재연구소.</ref>
  
 
=='''지식관계망'''==
 
=='''지식관계망'''==

2017년 8월 14일 (월) 22:16 판

혜철(惠哲)
BHST Monk1.png
대표명칭 혜철
한자 惠哲
생몰년 785년(원성왕 1)-861년(경문왕 1)
시호 적인(寂忍)
혜철(慧徹)
법명 혜철(惠哲)
탑호 조륜청정(照輪淸淨)
체공(體空)
이칭 동리화상(桐裏和尙)
성씨 박씨(朴氏)
출신지 경상북도 경주
승탑 곡성 태안사 적인선사탑



정의

신라시대의 승려

내용

혜철은 어려서 출가하여 영주 부석사(浮石寺)에서 화엄학을 배우고, 806년(애장왕 7) 22세에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1] 선법이 전해지기 전인 814년(헌덕왕 6)에 당나라로 갔으며, 마조(馬祖)의 제자이자 남종선(南宗禪) 계통의 선사인 지장선사(地藏禪師) 문하에서 선법(禪法)을 전해 받았다.[2][3]경덕전등록(景德傳燈錄)』 제9권의 기록에 의하면, 지장의 법통을 전수받은 자 넷 가운데 셋이 신라인으로서 계림의 도의선사(道義禪師), 신라국의 홍직선사(洪直禪師)와 혜선사(慧禪師)라고 적고 있으며, 혜철의 탑비에는 그가 지장을 만나서 한 말이 기록되어 있다.[4]

Quote-left.png 지장대사는 여래장을 열어 보살심을 얻고 오랫동안 西堂에 머물며 여러가지로 오는 자를 가르치니 대략 만 명을 헤아렸는데 하나를 배워 열을 알지 아니함이 없었다. 선사가 말하기를 “소생은 외국에서 태어나 천지 간에 길을 물어 중국을 멀다 아니하고 찾아와서 배우기를 청합니다. 다만 훗날 無說之說과 無法之法이 바다 밖(신라)에 유포되면 그것으로 다행이겠습니다” 하였다. 대사는 (선사의) 뜻이 이미 굳고 품성이 잘 깨달을 만함을 알고 한 번 보고도 옛날부터 안 것 같아 비밀히 심인을 전하였다. 이에 선사는 이미 赤水에서 잃은 구슬을 얻은 듯 마음에 환히 깨달으니 태허의 끝없이 넓음과 같았다. 무릇 오랑캐와 중국의 말이 다르지만 중심되는 실마리와 숨은 이치는 도끼자루를 베는 데 도끼를 잡지 않는다면 누가 이에 함께 할 수 있겠는가. Quote-right.png
출처:


지장이 입적하자 공공산(龔公山)을 떠나 중국의 명산대찰(名山大刹)을 두루 순례하다가, 서주(西州) 부사사(浮沙寺)에 자리잡고 3년 동안 대장경을 열람한 다음 839년(문성왕 1)에 귀국하였다.[5] 귀국 후 쌍봉사(雙峰寺)에서 하안거(夏安居)를 지냈으며,[6] 대안사(大安寺)에서 법회를 베풀어 동리산파(桐裡山派)의 개조(開祖)가 되었다.[7] 이 때 문성왕은 때때로 사신을 보내어 설법과 정치의 정도를 청하여 물었다.[8]

Quote-left.png 이윽고 무주 관내 쌍봉난야에서 여름 안거를 하였을 때 햇볕이 너무 뜨거워 산천이 말라붙었는데 비는 물론 조각구름조차 없었다. 州司가 선사에게 간절히 청하니 선사가 고요한 방에 들어가 좋은 향을 사르며 하늘과 땅에 기원하였다. 잠시 후 단비가 미미하게 내려 무주 관내의 들을 적시더니 죽죽 쏟아져 큰 비가 되었다. ...(중략)...

谷城郡 동남쪽에 산이 있어 桐裏라 하였고 그 속에 암자가 있어 이름을 大安이라 하였다. 그 절은 수많은 봉우리가 막아 가리고 한 줄기 강이 맑게 흘렀고, 길이 멀리 끊기어 세속의 무리들이 오는 이가 드물고 경계가 그윽히 깊어 승도들이 머물러 고요하였다. 龍과 神이 상서와 신이를 나타내고 해충과 뱀은 그 독과 모양을 숨기며, 소나무 숲이 빽빽하고 구름은 깊어 여름에는 서늘하고 겨울에는 따뜻하여 바로 이곳이 三韓의 勝地였다. 선사가 석장을 잡고 와서 돌아보고 한적하게 머무를 뜻이 있어 이에 교화의 도량을 열어 자질을 갖춘 사람을 받아들이니, 점교·돈교를 닦는 사람이 四禪의 방에 구름처럼 모이고 현인과 우매한 이들이 八定의 문에 그림자처럼 따라다녔다. ...(중략)...

문성대왕이 이를 듣고 상말의 시대에 여러 몸으로 나투었다고 이르고 자주 서신을 내려 위문하면서 또한 (선사가) 주석하는 절의 사방 바깥에 살생을 금하는 幢을 세울 것을 허락하였다. 그리고 사신을 보내 나라를 다스리는 요체를 물으니 선사는 封事 약간 조를 올렸는데 모두 당시 정사의 급한 일이라 왕이 매우 가상히 여겼다. 그가 조정을 도와 이롭게 하고 王侯들이 예를 올린 것 또한 이루 다 말할 수 없다.

Quote-right.png
출처:


혜철은 861년(경문왕 1) 77세의 나이로 입적하였으며, 탑비는 경문왕의 왕명으로 872년(경문왕 12)에 건립되었다.[9]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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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1.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혜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2.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혜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4.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쌍봉사",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7. "혜철",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8. 김영길, "혜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9. "대안사적인선사조륜청정탑비(大安寺寂忍禪師照輪淸淨塔碑)",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국립문화재연구소.

참고문헌

  • 이지관, "곡성 대안사 적인선사 조륜청정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신라편,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4, 74-93쪽.
  • 한국고대사회연구소,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제3책 통일신라, 가락국사적개발연구원, 1992. 온라인 참조: "대안사 적인선사탑비 해석문", 역주 한국고대금석문, 『한국사데이터베이스』,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