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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자초는 신광사를 나와 고달산에서 도를 닦다가, 1371년 나옹이 왕사에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물렀던 때에 혜근에게 의발을 전해받았다. 그리고 1376년 여름에 회암사 중창불사에 참여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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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 + | 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
| + |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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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13일 (일) 22:58 판
자초(自超)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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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자초 |
한자 |
自超 |
생몰년 |
1327(충숙왕 14)-1405(태종 5) |
호 |
무학(無學), 계월헌(溪月軒) |
성씨 |
박씨(朴氏) |
출신지 |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
승탑 |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
승탑비 |
양주 회암사 무학대사비 |
정의
고려 말-조선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자초(自超)는 1327년(충숙왕 14)에 태어났다. 성은 박씨(朴氏), 호는 무학(無學), 당호는 계월헌(溪月軒), 법명은 자초(自超)이다. 지금의 경상남도 합천군 삼가면 출신이다. 아버지는 인일(仁一)이고 후에 숭정문화시랑(贈崇政門下侍郞)으로 추증되었다.[1] 자초는 충남 서산에서 태어났다는 기록도 있다.
연경재(硏經齋) 성해응(成海應)이 지은 『동국명산기(東國名山記)』에 그가 충남 서산 간월도(看月島)에서 태어났다는 것이나 『서산군읍지(瑞山郡邑誌)』 인물조에 무학신승(武學神僧)이 간월도(看月島)에 머물렀다는 기록에서 알 수 있다.[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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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 계량이 삼가 그의 제자 조림(祖琳)이 지은 행장(行狀)을 상고하여 보니, 사(師)의 휘는 자초(自超)이며, 호(號)는 무학(無學)이고, 살던 곳은 계월헌(溪月軒)이라고 하였다. 세수는 79세이며, 법랍(法臘)은 61세이다. 속성(俗姓)은 박씨니 삼기군(三岐郡) 사람이다. 아버지의 휘는 인일(仁一)이며 증 숭정문하시랑(贈崇政門下侍郞)이고, 모(母)는 고성(固城) 채씨(蔡氏)이다. 채씨가 꿈에 아침해가 품속에 들어오는 것을 보고 임신하여 태정(泰定) 정묘년 9월 20일에 사를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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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변계량, 「묘엄존자탑명(妙嚴尊者塔銘)」, 『동문선(東文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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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가수행
자초는 1344년(충혜왕 복위5) 나이 18세에 송광사 혜감국사의 수제자인 소지선사에게 출가하여 구족계를 받았다. 그 뒤 용문산 혜명 법장국사를 찾아 교시를 받고 부도암이라는 암자 안에서 선정에 들었다. 그리고 20세가 되던 해인 1346년(충목왕 2)에 이르러서는 능엄경을 보고 홀연히 깨달았다. 그는 23세가 되던 1349년(충정왕 1) 가을에 진천 길상사에 머물렀고, 25세 되던 1352년(공민왕 1) 여름에 묘향산 금강암에서 정진하던 중 깨우침을 얻었다.[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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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18세가 되어서 벗어 버리듯 티끌세상 밖에 나가고자 하는 뜻이 있어서 혜감국사(慧鑑國師)의 상족제자(上足弟子 수제자)인 소지선사(小止禪師)에게 머리를 깎고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용문산(龍門山)에 이르러 혜명국사(慧明國師)와 법장국사(法藏國師)에게 법을 물으니, 법의 교시(敎示)를 마치고 곧 말하기를, “바른 길을 얻은 자가 너 아니고 누구겠느냐.” 하고, 드디어 부도암(浮圖菴)에 살게 하였다. 하루는 암자 안에서 화재가 일어났는데 사(師)가 홀로 나무 허수아비처럼 고요히 앉아 있으니, 여러 사람들이 기이하게 여기었다. 병술년 가을에 《능엄경(楞嚴經)》을 보다가 깨달은 것이 있어 돌아가 그의 스승에게 고하니, 스승이 칭탄하였다. 이로부터 잠을 자지 않고 밥 먹는 것도 잊은 채 참선에만 전심하였다. 기축년 가을에 진주(鎭州)의 길상사(吉祥寺)에 이르러 살았으며, 임진년 여름에는 묘향산 금강굴(妙香山金剛窟)에 머무렀는데, 공부가 더욱 진보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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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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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법유학
그가 26세 되던 1353년(공민왕 2) 가을에 입원하여 법원사에서 지공의 허락을 받고 다음해 1월 법천사에서 혜근을 만났다. 1354년 1월 법천사에 이르러 혜근을 참례하고 무령, 오대산을 유력하였다. 그후 서산 영엄사에 이르러 다시 혜근을 조우하고 두어해 머물면서 혜근에서 사사받았다. 그리고 귀국시 연도 광제선사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아가 하직하고 귀국하였다.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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계사년 가을에 몸을 빼쳐 연경(燕京)으로 달려가 서천지공(西天指空)에게 참례하여 절하고 일어나 말하기를, “3천 8백 리에 친히 화상(和尙)의 면목을 뵈었습니다.” 하니, 지공이 말하기를, “고려(高麗) 사람을 모두 죽이겠구나.” 하였으니, 이는 허락한다는 뜻이다. 여러 사람들이 매우 놀랐다.
다음해인 갑오년 정월에 법천사(法泉寺)에 이르러서 나옹(懶翁)에게 참례하니 나옹이 한 번 보고 깊고 큰 그릇이라고 생각하였다. 무령(霧嶺)을 유람하고 오대산(五臺山)을 지나서 두 번째로 나옹을 서산영암사(西山靈嵒寺)에서 뵙고 두어 해를 머물렀다. 그가 선정(禪定)하고 있을 때에는 밥 먹을 때를 당하여도 알지 못하는 때가 있었으니, 옹이 보고 말하기를, “네가 죽었느냐.” 하니, 사(師)가 웃으며 대답하지 아니하였다. 옹(翁)이 하루는 사와 더불어 섬돌 위에 앉았다가 묻기를, “옛날 조주(趙州)가 수좌(首座)와 더불어 앉아서 돌다리를 보고 묻기를, ‘이것은 어떤 사람이 만들었느냐.’ 하니, 수좌가 답하기를, ‘이응(李膺)이 만들었습니다.’ 하였다.
(중략)
그렇건만 산천을 두루 유람하고 스승과 벗을 참방(參訪)할 뜻이 그치지 아니하였다. 강소(江蘇), 절강(浙江) 지방에 유람하려 하였으나, 그때 남쪽 지방에 변란이 있어서 길이 막혔으므로 중지하였다.
병신년 여름에 우리 나라에 돌아오고자 작별을 고하니, 옹이 손수 한 종이에 글을 써서 전송하여 말하기를, “그 일상생활을 보니 모든 기틀이 세상과 더불어 다른 데가 있다. 선악과 성사(聖邪)를 생각지 않고 인정과 의리에 순종하지 않는다. 말을 내고 기운을 토할 때에는 화살과 칼날이 서로 버티는 것 같고, 글귀의 뜻이 기틀에 맞음은 물이 물에 돌아가는 것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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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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활동
자초는 원나라에서 귀국한지 3년 후인 1359년 여름에 경남 천성산 원효암에 머물고 있던 혜근을 찾았으며 여기서 혜근에게 불자를 받았다. 그가 혜근을 찾은 것은 지공으로부터 받은 수기 때문이었다고 추정된다. 그후 자초는 귀국 후 두번째로 신광사에 있던 혜근을 찾아가 1361년 10월부터 1363년 7월 동안 머물면서 혜근에게 사사받았다.[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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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가 이미 돌아오니 나옹(懶翁) 또한 지공(指空)의 삼산양수수기(三山兩水授記)를 갖고 돌아와 천성산(天聖山) 원효암(元曉菴)에 머무르고 있었다.
기해년 여름에, 사가 가서 나옹을 뵈오니 불자(拂子)를 그에게 주었다. 옹이 신광사(神光寺)에 있으므로 사 또한 거기에 머물렀더니, 옹의 무리 중에 사를 꺼리는 자가 있었다. 사가 알고 떠나가니, 옹이 사에게 말하기를, “법통을 전하는 데 있어서 옷과 바리때[衣鉢]는 말과 글귀보다 못하다.” 하고, 시를 지어 사에게 주며 말하기를, “한가한 중들이 남이니 나니 교계하는 마음을 일으켜서, 망령되게 옳으니 그르니 하고 말들을 하니, 매우 옳지 않다. 산승(山僧)이 이 네 귀[四句]의 송(頌)으로써 길이 뒷날의 의심을 끊는다.”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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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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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초는 신광사를 나와 고달산에서 도를 닦다가, 1371년 나옹이 왕사에로 책봉되어 송광사에 머물렀던 때에 혜근에게 의발을 전해받았다. 그리고 1376년 여름에 회암사 중창불사에 참여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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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師)가 고달산(高達山) 탁암(卓菴)에 들어가 도를 닦고 있었는데, 신해년 겨울에 전조(前朝)의 공민왕이 나옹을 봉하여 왕사(王師)로 하고, 옹이 송광사(松廣寺)에 머무르면서 의발을 사에게 전하니 사가 게(偈)를 지어 사례하였다.
병진년 여름에 나옹이 회암사(檜巖寺)에 옮겨 가서 크게 낙성회를 개설하게 되었다. 급히 편지를 보내어 사를 불러다가 수좌(首坐)를 삼으니, 사가 극력 사양하였다. 옹이 말하기를, “많이 주관하는 것이 많이 사퇴하는 것만 같지 못한 것이지.” 하고, 제덕산(濟德山)에서는 수좌를 삼지 않고 와서 편실(便室)에 있게 하였다. 옹이 세상을 떠나니, 사가 여러 산으로 노닐면서 뜻을 감추고 남에게 알리고자 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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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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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 ↑ 민백
- ↑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 189쪽.
- ↑ 황인규 190쪽.
- ↑ 황인규, 191쪽
- ↑ 황인규, 193쪽.
참고문헌
- 고익진, "무학",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탁효정, 여말선초 무학자초의 활동과 위상,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4 - 회암사와 불교사, 양주회암사지박물관, 2016, 176-207쪽.
- 황인규, 無學自超 硏究
- 황인규, 仁王山寺와_無學大師
- 황인규, 무학자초의 생애와 활동에 대한 검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