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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제 귀신사"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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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구정보=[http://www.buddhism.or.kr 대한불교조계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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귀신사는 [[의상|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고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당시의 규모는 짐작할 수 없지만 당대의 대학자인 [[최치원|최치원(崔致遠)]]이 그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이곳에서 쓴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까지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던 듯하다. 「법장화상전」에는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귀신사는 백제 법왕(法王) 때 원당(願堂), 곧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 고승인 [[무경|자수무경(子秀無竟)]]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毋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도 절은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글이 있다.<ref>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95쪽.</ref>
 
귀신사는 [[의상|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고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당시의 규모는 짐작할 수 없지만 당대의 대학자인 [[최치원|최치원(崔致遠)]]이 그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이곳에서 쓴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까지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던 듯하다. 「법장화상전」에는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귀신사는 백제 법왕(法王) 때 원당(願堂), 곧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 고승인 [[무경|자수무경(子秀無竟)]]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毋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도 절은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글이 있다.<ref>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95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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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일신라 말기 [[도윤|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징엄|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중창하였다. [[징엄|원명국사]]는 [[고려 숙종|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의천|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게 출가하여 1122년([[고려 예종|예종]] 17)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구순사(狗脣寺) 혹은 구순사(口脣寺)로 불렸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ref>"[http://gimje.grandculture.net/Contents?local=gimje&dataType=99&contents_id=GC02600662 귀신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디지털김제문화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관련문화유산===
 
===관련문화유산===

2017년 8월 7일 (월) 12:51 판

김제 귀신사
(金堤 歸信寺)
대표명칭 김제 귀신사
한자 金堤 歸信寺
주소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 청도리 112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정의

전라북도 김제시 금산면에 있는 사찰.

내용

귀신사는 의상(義湘)이 창건하여 국신사(國信寺)라고 했던 것에서 비롯된다. 당시의 규모는 짐작할 수 없지만 당대의 대학자인 최치원(崔致遠)이 그의 「법장화상전(法藏和尙傳)」을 이곳에서 쓴 것으로 보아 통일신라 말까지 대사찰로서의 면모를 유지했던 듯하다. 「법장화상전」에는 국신사(國神寺)로 표기되어 있다. 한편 귀신사는 백제 법왕(法王) 때 원당(願堂), 곧 왕실 사찰로 창건되었다고 보는 견해도 있는데, 경내에 있는 석수(石獸)가 백제 왕실의 자복사찰(資福寺刹)에서만 볼 수 있는 석물이라는 견해 때문이다. 또한 조선 후기 고승인 자수무경(子秀無竟)의 「전주무악산귀신사사적사인(全州毋岳山歸信寺事蹟詞引)」에도 절은 백제 왕실의 원당이었다는 글이 있다.[1]

통일신라 말기 철감선사 도윤(澈鑒禪師 道允)이 중창한 뒤 귀신사로 개칭하였으며, 고려시대에는 원명국사 징엄(圓明國師 澄儼)이 중창하였다. 원명국사숙종의 넷째 아들로 8세 때 대각국사 의천(大覺國師 義天)에게 출가하여 1122년(예종 17) 오교도승통(五敎都僧統)이 되었으나, 이자겸(李資謙)의 횡포를 보고 귀신사로 들어왔다. 이 무렵에는 구순사(狗脣寺) 혹은 구순사(口脣寺)로 불렸다. 이름이 왜 바뀌었는지는 알 수 없는데, 절 주위의 지형이 풍수지리설에서 말하는 구순혈형(狗脣穴形)이기 때문이라는 설이 전하지만 명확한 근거는 보이지 않는다.[2]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시각자료

주석

  1.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95쪽.
  2. "귀신사", 『디지털김제문화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사찰문화연구원, "귀신사", 『전통사찰총서 8 - 전북의 전통사찰IV』, 사찰문화연구원, 2008, 94-108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