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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檜巖寺)의 건립시기는 사료의 부족으로 잘 찾아지지 않는다. 하지만 [[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f>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ref>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고려 우왕|우왕]] 4) [[나옹|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고 한다.<ref>한정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4301191 회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ref>당시 회암사의 규모는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색(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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회암사(檜巖寺)[[신증동국여지승람|《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ref>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ref>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고려 우왕|우왕]] 4) [[나옹|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고 한다.<ref>한정수, "[http://www.grandculture.net/ko/Contents?dataType=99&contents_id=GC04301191 회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ref>당시 회암사의 규모는 고려 말에 목은 [[이색|이색(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ref>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무학(無學)]]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조선 명종|명종]] 때 [[보우|보우(普雨)]]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ref>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ref>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1821년([[조선 순조|순조]] 21)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지공(指空)]]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1828년([[조선 순조|순조]] 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우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14038 회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조선 태조]]는 [[나옹]]의 제자인 [[무학|무학(無學)]]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조선 명종|명종]] 때 [[보우|보우(普雨)]]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ref>국내관광진흥팀, "[http://korean.visitkorea.or.kr/kor/bz15/travel/history/content/cms_view_449983.jsp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html><online style="color:purple">『대한민국 구석구석』<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ref>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1821년([[조선 순조|순조]] 21)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지공(指空)]]과 [[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1828년([[조선 순조|순조]] 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우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였다.<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714038 회암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2017년 7월 22일 (토) 19:07 판

양주 회암사
(楊州 檜巖寺)
대표명칭 양주 회암사
한자 楊州 檜巖寺
주소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산14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 128호
문화재 지정일 1964년 6월 10일
건립시기 1328년(충숙왕 15)
창건자 지공(指空)
경내문화재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정의

경기도 양주시 회암동 천보산(天寶山)에 있는 절.


내용

역사

회암사(檜巖寺)는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에 1174년 금나라의 사신이 회암사에 왕래했다는 이야기가 나오는 것으로 보아 12세기쯤 창건된 것으로 추정할 수 있다.[1] 그 뒤 1328년(충숙왕 15) 인도에서 원나라를 거쳐 들어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羅爛陀寺)를 본떠서 266칸의 대규모 사찰로 중창하였으며, 1378년(우왕 4) 나옹(懶翁)이 중건하였다고 한다.[2][3]

조선 태조나옹의 제자인 무학(無學)을 회암사에 머무르게 하여 불사가 있을 때마다 대신을 보내 찬례토록 하였으며, 왕 위에서 물러난 뒤에는 친히 회암사에 머물면서 수도생활을 했다. 그 뒤로도 회암사는 조선 왕실과 지속적인 인연을 맺어오다가 명종보우(普雨)가 머물면서 다시 번창하게 된다. 하지만 명종의 어머니인 문정왕후(文定王后)의 후원으로 기세를 올리던 보우는 문정왕후가 죽은 뒤로 제주도로 유배되어 살해되었고, 문정왕후와 보우에 대한 유생들의 반감이 회암사를 폐사시켰다.[4] 대사찰이 폐사되면서 1821년(순조 21)에 이응준이란 자가 술사 조대진의 말을 듣고 이 곳 법당자리에 선친의 묘소를 옮기기 위하여 절터에 남아있던 지공(指空)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하지만 이후 이 사실이 알려지자 나라에서 두 사람을 섬으로 유배하고 1828년(순조 28)에 비를 원래의 위치에 다시 세우면서 옛터의 오른쪽에 작은 절을 짓고 회암사의 절 이름을 계승하였다.[5]

1922년에는 봉선사 주지 홍월초(洪月初)가 새로 보전을 지어 불상을 봉안하고 지공, 나옹, 무학의 세 화상의 진영을 모셨다고 한다. 이후 1977년에 호선이 서북쪽에 큰 법당을 지었다. 1964년 이곳을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하여 보존·관리해오다가 1996년부터 우회도로 개설과 사지에 대한 장기적인 조사·발굴 계획을 수립하여 현재 경기도 박물관에서 조사·발굴하고 있다.[6]

회암사와 왕실불교

조선 국왕의 회암사 행차

조선 태조는 개국 후 무학(無學)왕사(王師)로 삼고 회암사(檜巖寺)에 주석하도록 하면서 그곳으로 자주 행차하였다. 또 상왕으로 물러난 후에는 태상전(太上殿)을 짓고 기거하기도 했다. 조선 태종은 불교에 대해 다소 강경한 입장을 보였지만, 태조를 뵙기 위해 회암사를 찾을 수 밖에 없었고, 태종비인 원경왕후(元敬王后)는 회암사에 수불을 안치하여 왕실의 복을 빌기도 했다. 조선 세종은 효령대군의 회암사에서의 불사를 후원했고, 풍양(豊壤) 일대로의 강무(講武) 행차 때 회암사를 지나며 시주했다. 조선 세조 또한 정현왕후(貞顯王后)와 함께 회암사를 방문하고 중창하는 불사를 약속했다는 기록이 있다.[7]

회암사의 왕실후원자

조선 태조는 회암사와 무학(無學)에 대한 애정이 각별하였다. 무학이 회암사에서 능엄회(楞嚴會)를 베풀 때 쌀·콩 등을 내렸고, 무학의 부도를 만들 때 경기지역의 백성을 징발하도록 하고 쌀을 하사하기도 했다. 상왕이 되어서도 많은 전답을 하사하는 등 후원을 계속하였다.[8]

효령대군(孝寧大君)은 1434년 회암사의 중수를 건의하여 회암사를 중건하고, 이곳에서 불사를 개최하기도 하였다. 이후 회암사를 원찰로 삼고 왕래하면서 재를 베풀었고 원각법회를 개최하는 등 후원을 아끼지 않았다. 당시 조선 세종은 억불정책을 시행하면서도 회암사에 대한 후원만은 묵인해주었는데, 이는 할아버지인 조선 태조의 회암사에 대한 남다른 관심을 염두에 두었기 때문이라고 할 수 있다.[9]

문정왕후는 회암사의 중수불사를 실시하였고, 완공 이후 대규모의 무차대회(無遮大會)[10] 를 열기도 했다. 문정왕후는 보우(普雨)와 각별한 관계를 가지고 있었는데 회암사에 애정을 갖고 중창하게 된 것도 이 때문이었을 것으로 보고있다.[11]

정청(正廳)의 위치

풍수지리적인 관점에서 보면 회암사의 가장 중요한 혈처에는 정청(正廳)이 위치한다. 정청은 왕실사찰로서 회암사의 성격을 잘 드러내주는 건축물이다. 공민왕공양왕은 남경(南京) 행차에서 돌아가는 길에 정청에 머무르며 불사를 베풀고 많은 물품을 하사하였다. 또 왕은 탄신 축하를 이곳에서 받기도 했는데, 동행한 왕세자와 왕세자비가 정청에서 철야 예불을 올렸다. 조선이 개국한 이후에 정청은 조선 태조가 회암사에 방문하면 머무르는 공간으로 사용되기도 했다.[12]

왕실발원 미술

1997년부터 실시되고 있는 회암사지 발굴을 통해 많은 유물들이 출토되었는데 그 중에는 왕실발원으로 조성된 작품들도 다수 있다. 먼저 청동금탁은 조선 태조신덕왕후(神德王后), 왕세자 등의 발원에 의해 조성된 것으로 불사를 후원하는 명문이 새져겨있다. 효령대군발원 기와는 회암사의 중수, 중창 사실을 알려주며, 용문(龍文)과 봉황문(鳳凰文)이 새겨진 기와는 당시 궁궐의 주요 건축물에만 사용할 수 있었던 것이어서 회암사와 왕실과의 관련성을 잘보여주고 있다. 문정왕후는 명종의 병세회복과 건강, 왕비의 세자탄생 등을 기원하며 400점의 불화를 제작하여 회암사 중수 때 전국의 사찰에 분급하고자 하였는데 이는 어머니로서의 모성이 드러나는 조선시대 최대 불사였다고 할 수 있다.[13]

관련문화유산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양주 회암사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양주 회암사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 앞 쌍사자 석등 양주 회암사 A는 B에 있다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나옹 A는 B를 위한 비이다
나옹 양주 회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이색 양주 회암사 A는 B와 관련있다
무학 양주 회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보우 양주 회암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지공 양주 회암사 A는 B를 창건하였다
조선 태조 양주 회암사 A는 B와 관련있다
공민왕 양주 회암사 A는 B와 관련있다
공양왕 양주 회암사 A는 B와 관련있다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328년 원나라에서 온 지공이 인도의 나란타사를 본떠서 양주 회암사를 중창했다.
1378년 나옹양주 회암사를 중건했다.
1397년 조선 태조양주 회암사양주 회암사지 무학대사탑을 건립하도록 하였다.
1565년 양주 회암사가 유생들에 의해 불태워져 폐허가 되었다.
1821년 이응준이 양주 회암사에서 지공무학의 비를 철거하였다
1828년 양주 회암사지공무학의 비를 원래 위치에 다시 세웠다
1964년 양주 회암사가 국가지정 사적 제128호로 지정되었다
1996년 경기도 박물관에서 양주 회암사에 대한 조사, 발굴을 시작했다

시각 자료

영상

주석

  1.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2. 한정수, "회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당시 회암사의 규모는 고려 말에 목은 이색(李穡)이 쓴 《천보산회암사수조기(天寶山檜巖寺修造記)》에서 확인해볼 수 있는데, 총 262칸에 전각들로 이루어진 회암사의 가람은 동방에 제일이며 법당에는 15척의 불상 7구와 10척의 관음상이 봉안되어 있다고 적혀있다.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4.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작성일: 2016년 9월 19일.
  5. "회암사", 『두산백과』online.
  6. 국내관광진흥팀,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7.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8-27쪽.
  8.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신덕연구총서Ⅱ, 2015, 30-44쪽.
  9.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30-44쪽.
  10. 승려·속인·남녀노소·귀천의 차별 없이 평등하게 널리 일반대중을 대상으로 하여 잔치를 베풀고 물품을 골고루 나누어주면서 집행하는 법회.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30-44쪽.
  12. 박정해, 「회암사 입지의 풍수환경과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제40집, 2014, 151-152쪽.
  13.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45-66쪽.

참고문헌

  • 박정해, 「회암사 입지의 풍수환경과 해석」, 동북아문화연구 제40집, 2014, 143-158쪽.
  • 임연태, 「양주 회암사」, 시와세계 제26호, 2009, 163-172쪽.
  • 조유선,"양주 회암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정수, "회암사", 『한국향토문화전자대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 그 위용을 드러내다』, 회암사지박물관, 2012.
  •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와 왕실문화』,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Ⅱ, 2015.
  • 회암사지박물관, 『회암사와 불교사』, 회암사지박물관 연구총서Ⅳ, 2016.
  • 국내관광진흥팀, "조선 불교의 흥망성쇠 현장으로-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
  • 국내관광진흥팀, "양주 회암사지"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한국관광공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