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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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_물품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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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물품유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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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운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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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출처= 한국민족문화대백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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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작자= 경상북도 문경시 산북면 금천로 67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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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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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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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태종 8)의 <예조상정상제 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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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46년(세종 28) 3월 <왕비상제 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 [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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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방정례 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국혼정례 國婚定例≫의 중궁전 의대와 왕비의 의대에는 흑웅피화와 온혜로 규정되어 있다. 고종 때 동궁 가례시 재간택 후 보낸 빈궁의대 발기에도 “뎍향직운혀 1부, 다홍근봉금단운혀 1부”의 기록이 있고, 왕자군 길례 발기에도 “다홍화단운혀”가 있어 이 운혜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 [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sup>online</sup></online></html>.</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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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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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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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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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효순,「화제」, 『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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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분류:물품]]

2017년 7월 23일 (일) 01:48 판

틀:물품유물

정의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 무늬를 새긴 여자의 마른신. [1]

내용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태종 8)의 <예조상정상제 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1446년(세종 28) 3월 <왕비상제 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

≪상방정례 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국혼정례 國婚定例≫의 중궁전 의대와 왕비의 의대에는 흑웅피화와 온혜로 규정되어 있다. 고종 때 동궁 가례시 재간택 후 보낸 빈궁의대 발기에도 “뎍향직운혀 1부, 다홍근봉금단운혀 1부”의 기록이 있고, 왕자군 길례 발기에도 “다홍화단운혀”가 있어 이 운혜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3]

운혜·온혜는 ≪상방정례≫와 ≪의대발기≫에 같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종류의 신발을 지칭한다 하겠다. 조선 후기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에도 양반부인인 듯한 여인은 운혜를 신고 시종은 짚신을 신고 있다. 궁중을 비롯한 상류층 부인은 운혜나 당혜를 신고 서민이나 하류층은 짚신을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4]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운혜 가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운혜 발기 A는 B에 기록되었다
운혜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주석

  1. 운혜 [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online.
  2. 운혜 [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online.
  3. 운혜 [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online.
  4. 운혜 [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online.

참고문헌

저서

    • 조효순,「화제」, 『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