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채제공"의 두 판 사이의 차이
(새 문서: 분류:한글고문서_인물기사) |
|||
1번째 줄: | 1번째 줄: | ||
− | [[분류: | + | {{인물정보 |
+ | |사진= | ||
+ | |사진출처= | ||
+ | |대표명칭=채제공 | ||
+ | |한자표기=蔡濟恭 | ||
+ | |영문명칭= | ||
+ | |본관= 평강(平康) | ||
+ | |이칭= | ||
+ | |시호=문숙(文肅) | ||
+ | |호= 번암(樊巖), 번옹(樊翁) | ||
+ | |자= 백규(伯規) | ||
+ | |생년=1720 | ||
+ | |몰년=1799 | ||
+ | |출생지= 충청도 홍주 | ||
+ | |사망지= | ||
+ | |시대=조선 | ||
+ | |국적= | ||
+ | |대표저서=[[번암집]] | ||
+ | |대표직함= 영의정, 호조판서 | ||
+ | |배우자= | ||
+ | |부= [[채응일]] | ||
+ | |모= 채응일 처 연안이씨 | ||
+ | |자녀= | ||
+ | |전임자= | ||
+ | |후임자= | ||
+ | |상훈= | ||
+ | |능묘= | ||
+ | |성격= | ||
+ | |유형= | ||
+ | }} | ||
+ | |||
+ | ==정의== | ||
+ | 조선후기의 문신으로 [[조선 영조|영조]]와 [[조선 정조|정조]]대의 지낸 인물이다. | ||
+ | |||
+ | ==내용== | ||
+ |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 ||
+ | 채제공(1720~1799)은 18세기 후반 남인의 영수로 알려진 정치가이다. 충청도 홍주에서 [[채응일|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연안 이씨 [[이만성|이만성(李萬成)]]의 딸이다. | ||
+ | 채제공이 태어나 성장할 무렵의 정치 상황이 그의 가문이 속한 남인들에게 매우 좋지 않았다. [[조선 숙종|숙종]]대의 [[갑술환국]], [[조선 영조|영조]] 초반에 있었던 무신란의 여파로 남인 계열의 주요 인물들이 사사되거나 연루되어 벼슬에 나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대 남인 문장가로 알려진 [[강박|강박(姜樸)]]과 영조대 남인 세력의 구심을 이루었던 [[오광운|오광운(吳光運)]]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강박]]은 [[오광원]]의 형 [[오필운]]의 딸과 채제공의 혼인을 주선하여, 채제공이 [[오광운]]의 뒤를 이어 남인 정파를 주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 ||
+ |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채제공의 정계활동=== | ||
+ | ====영조대의 정계활동==== | ||
+ | 채제공은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하였고, 1743년(영조 19)에는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영조의 눈에 들어 [[한림소시]]에 응하여 청요직에 진출한다. 이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753년에 호서암행어사로 [[균역법]]에 대한 백성의 여론을 파악하였고, [[홍문관]]의 관리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워, 이로 인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이천부사|이천(伊川)부사]], [[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열성지장(列聖誌狀)]]』과 『[[어제상훈보편|어제상훈보편(御製常訓補篇)]]』의 교정 및 편차에 참여한 공로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768년에는 『[[어제속집경당편집]]』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체제공은 1770년 병조판서에 제수되면서 중앙 관계로 복귀했다. 이후 수년 간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번갈아 제수되었고 종계변무의 논의도 주도하였다. 이 때에는 약방제조의 일도 겸하여 영조의 건강을 살폈다. 1770년에 인사권을 가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사적으로 어리석은 무리들을 모아 제자로 일컫고 기회를 도모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 ||
+ |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정조대의 정계활동==== | ||
+ | 1776년 정조의 조정에서도 채제공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조 국장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국장도감제조로 일하면서 영조의 평생 업적을 정리하는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과 영조실록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사도세자의 일이나 세손 시절 왕위 계승 또는 추숭 문제에 개입했던 김상로(金尙魯), 이덕사, 조재한 등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세손 시절 정조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소론계 청류 서명선(徐命善)이 주도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채제공은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추숭을 주장하는 무리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 등으로 공격받고, 이덕사·조재한의 역옥에 연루되었다는 죄목 등으로 공격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788년(정조 12)에 정조가 친필로 채제공에게 하유하여 우의정에 발탁하였다. 1789년 좌의정이 되어 [[사도세자(장조)]]의 묘소를 옮겨 [[현륭원]]으로 봉하는 일을 주도하여 처리하였다. 우의정 [[김종수|김종수(金鍾秀)]]와 함께 탕평정국을 주도했다. <ref>김지영,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95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 ||
+ |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 ||
+ | <ref>박광용,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5646 채제공]",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 | |||
+ | ==지식 관계망== | ||
+ | ===관계정보=== | ||
+ | {|class="wikitable sortable" | ||
+ |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 | |- | ||
+ | | {{PAGENAME}} || [[조선 성종]] || A는 B의 어버이다 || | ||
+ | |- | ||
+ | | [[한확]] || {{PAGENAME}} || A는 B의 어버이다 || | ||
+ | |- | ||
+ | | [[한확 처 남양 홍씨]] || [[한확]] || A는 B의 아내이다 || | ||
+ | |- | ||
+ | | {{PAGENAME}} || [[조선 덕종|도원군(조선 덕종)]] || A는 B의 아내이다|| | ||
+ | |- | ||
+ | | [[조선 덕종|도원군(조선 덕종)]] || [[조선 세조]] || A는 B의 자식이다 || | ||
+ | |- | ||
+ | | [[정희황후]] || [[조선 세조]] || A는 B의 아내이다 || | ||
+ | |- | ||
+ | | {{PAGENAME}} || [[조선 성종]]|| A는 B의 어버이다 || | ||
+ | |- | ||
+ | | [[조선 성종]] || [[연산군]] || A는 B의 어버이다 || | ||
+ | |- | ||
+ | | [[갑자사화]] || {{PAGENAME}}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
+ | |- | ||
+ | | {{PAGENAME}} || [[어제내훈]]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737 | ||
+ | |- | ||
+ | | {{PAGENAME}} || [[대불정수능엄경 편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1462 | ||
+ | |- | ||
+ | |} | ||
+ | ===시간정보=== | ||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
+ | !style="width:20%px"|시간정보!!style="width:80%px"|내용 | ||
+ | |- | ||
+ | |1462 || {{PAGENAME}}가 [[대불정수능엄경 편찬]]에 참여하였다 | ||
+ | |- | ||
+ | |1737 || {{PAGENAME}}가 [[어제내훈]]을 저술하였다 | ||
+ | |- | ||
+ | |} | ||
+ | ===공간정보=== | ||
+ | {|class="wiki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 ||
+ | !style="width:5%px"|위도!!style="width:5%px"|경도!!style="width:90%px"|내용 | ||
+ | |- | ||
+ | |37.5799333 || 126.9900831 || {{PAGENAME}}가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하였다. | ||
+ | |- | ||
+ | |} | ||
+ | |||
+ | ==주석== | ||
+ | <references/> | ||
+ | |||
+ | ==참고문헌== | ||
+ | ===유용한 정보=== | ||
+ | *"[https://www.culturecontent.com/content/contentView.do?search_div=CP_THE&search_div_id=CP_THE003&cp_code=cp0439&index_id=cp04390148&content_id=cp043901480001&search_left_menu=4 소혜왕후 한씨]",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콘텐츠닷컴』<sup>online</sup></online></html>, 한국콘텐츠진흥원. | ||
+ | *장진영, "[http://www.k-heritage.tv/brd/board/275/L/CATEGORY/328/menu/254?brdCodeField=CATEGORY&brdCodeValue=328&bbIdx=2510&brdType=R <내훈(內訓)>을 쓰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채널』<sup>online</sup></online></html>, 한국문화재재단, 2011년 12월 8일. | ||
+ | [[분류:인물]] | ||
+ | [[분류:한글고문서]] | ||
+ | [[분류:이혜영]] |
2017년 8월 9일 (수) 00:00 판
채제공(蔡濟恭) | |
대표명칭 | 채제공 |
---|---|
한자표기 | 蔡濟恭 |
생몰년 | 1720-1799 |
본관 | 평강(平康) |
시호 | 문숙(文肅) |
호 | 번암(樊巖), 번옹(樊翁) |
자 | 백규(伯規) |
출생지 | 충청도 홍주 |
시대 | 조선 |
대표저서 | 번암집 |
대표직함 | 영의정, 호조판서 |
부 | 채응일 |
모 | 채응일 처 연안이씨 |
목차
정의
내용
성장배경과 가족관계
채제공(1720~1799)은 18세기 후반 남인의 영수로 알려진 정치가이다. 충청도 홍주에서 채응일(蔡膺一)의 아들로 태어났다. 어머니는 연안 이씨 이만성(李萬成)의 딸이다. 채제공이 태어나 성장할 무렵의 정치 상황이 그의 가문이 속한 남인들에게 매우 좋지 않았다. 숙종대의 갑술환국, 영조 초반에 있었던 무신란의 여파로 남인 계열의 주요 인물들이 사사되거나 연루되어 벼슬에 나가기 어려운 형편이었다. 당대 남인 문장가로 알려진 강박(姜樸)과 영조대 남인 세력의 구심을 이루었던 오광운(吳光運)등에게서 학문을 배웠다. 강박은 오광원의 형 오필운의 딸과 채제공의 혼인을 주선하여, 채제공이 오광운의 뒤를 이어 남인 정파를 주도할 수 있도록 도와주었다. [1]
채제공의 정계활동
영조대의 정계활동
채제공은 1735년(영조 11) 15세로 향시에 급제하였고, 1743년(영조 19)에는 문과에 병과로 급제하여 승문원에서 관직 생활을 시작하였다. 1748년 영조의 눈에 들어 한림소시에 응하여 청요직에 진출한다. 이후 주요 관직을 역임하고 영조의 두터운 신임을 받았다. 1753년에 호서암행어사로 균역법에 대한 백성의 여론을 파악하였고, 홍문관의 관리로 경연에 참여하였다. 1755년 나주괘서사건이 일어났을 때 공을 세워, 이로 인해 동부승지가 되었다. 이후 이천(伊川)부사, 대사간을 거쳤고 『열성지장(列聖誌狀)』과 『어제상훈보편(御製常訓補篇)』의 교정 및 편차에 참여한 공로로 도승지에 임명되었다. 1768년에는 『어제속집경당편집』의 편찬을 담당하였다. 체제공은 1770년 병조판서에 제수되면서 중앙 관계로 복귀했다. 이후 수년 간 호조판서와 병조판서에 번갈아 제수되었고 종계변무의 논의도 주도하였다. 이 때에는 약방제조의 일도 겸하여 영조의 건강을 살폈다. 1770년에 인사권을 가진 병조판서에 임명되었는데 오래지 않아 사적으로 어리석은 무리들을 모아 제자로 일컫고 기회를 도모하였다는 비판을 받고 물러났다. [2]
정조대의 정계활동
1776년 정조의 조정에서도 채제공은 주요한 역할을 담당하였다. 영조 국장을 실질적으로 지휘하는 국장도감제조로 일하면서 영조의 평생 업적을 정리하는 행장·시장·어제·어필의 편찬 작업과 영조실록 편찬사업에 참여하였다. 사도세자의 일이나 세손 시절 왕위 계승 또는 추숭 문제에 개입했던 김상로(金尙魯), 이덕사, 조재한 등을 처단할 때 형조판서 겸 판의금부사로서 옥사를 처결하였다. 1780년(정조 4) 홍국영(洪國榮)의 세도가 무너지고 세손 시절 정조를 보호하는데 앞장섰던 소론계 청류 서명선(徐命善)이 주도하는 정권이 들어섰다. 채제공은 홍국영과의 친분, 사도세자의 추숭을 주장하는 무리들과 연계되어 있다는 의심 등으로 공격받고, 이덕사·조재한의 역옥에 연루되었다는 죄목 등으로 공격받아 관직에서 물러났다. 1788년(정조 12)에 정조가 친필로 채제공에게 하유하여 우의정에 발탁하였다. 1789년 좌의정이 되어 사도세자(장조)의 묘소를 옮겨 현륭원으로 봉하는 일을 주도하여 처리하였다. 우의정 김종수(金鍾秀)와 함께 탕평정국을 주도했다. [3] 1793년에 잠깐 영의정에 임명되었을 때는, 전일의 영남만인소에서와 같이 사도세자를 위한 단호한 토역(討逆)을 주장하여 이후 노론계의 집요한 공격이 야기되기도 하였다. 그 뒤는 주로 수원성역을 담당하다가 1798년 사직하였다. [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채제공 | 조선 성종 | A는 B의 어버이다 | |
한확 | 채제공 | A는 B의 어버이다 | |
한확 처 남양 홍씨 | 한확 | A는 B의 아내이다 | |
채제공 | 도원군(조선 덕종) | A는 B의 아내이다 | |
도원군(조선 덕종) | 조선 세조 | A는 B의 자식이다 | |
정희황후 | 조선 세조 | A는 B의 아내이다 | |
채제공 | 조선 성종 | A는 B의 어버이다 | |
조선 성종 | 연산군 | A는 B의 어버이다 | |
갑자사화 | 채제공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채제공 | 어제내훈 | A는 B를 저술하였다 | 1737 |
채제공 | 대불정수능엄경 편찬 | A는 B에 참여하였다 | 1462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462 | 채제공가 대불정수능엄경 편찬에 참여하였다 |
1737 | 채제공가 어제내훈을 저술하였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99333 | 126.9900831 | 채제공가 창경궁 경춘전에서 사망하였다. |
주석
- ↑ 김지영, "채제공",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채제공",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지영, "채제공",
『한국사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박광용, "채제공",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유용한 정보
- "소혜왕후 한씨",
『문화콘텐츠닷컴』online , 한국콘텐츠진흥원. - 장진영, "<내훈(內訓)>을 쓰다",
『문화유산채널』online , 한국문화재재단, 2011년 12월 8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