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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편, 비문 중에는 ‘聖朝光德二年(성조광덕이년)’이라는 문구가 있어 고려시대 연호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957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한편, 비문 중에는 ‘聖朝光德二年(성조광덕이년)’이라는 문구가 있어 고려시대 연호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ref>김세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957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2017년 6월 7일 (수) 14:50 판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聞慶 鳳巖寺 靜眞大師塔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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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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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문명칭 | Stele for Buddhist Monk Jeongjin at Bongamsa Temple, Mungyeong |
한자 | 聞慶 鳳巖寺 靜眞大師塔碑 |
이칭 | 봉암사 정진대사 원오탑비 |
주소 |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원북리 485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172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찬자 | 이몽유(李蒙游) |
서자 | 장단열(張端說) |
각자 | 섬율(暹律) |
서체 | 해서(楷書) |
승려 | 긍양(兢讓) |
승탑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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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경상북도 문경시 가은읍 봉암사(鳳巖寺)에 있는 고려시대의 승려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 878-956)탑비.
내용
개요
봉암사에 있는 신라말 고려초의 선사 정진대사 긍양[靜眞大師 兢讓, 878(헌강왕 4)~956(광종 6)]의 비이다. 이몽유(李夢游)가 짓고 장단열(長端說)이 비면에 정간(井間)을 치고 해서로 써서 섬율(暹律)이 새겼다.-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965년 (광종 16)5월 21일 건립되었으며, 규모는 높이 271.2cm, 폭 163.6cm로 비문은 모두 53행이고 각행 103자 내외이다. 글씨의 크기는 1.4cm 정도이며 서체는 해서로 구양순체이다. 비의 높이는 2.73m이며, 너비는 1.64m로서 경내에 같이 있는 지증대사적조탑비와 그 규모가 똑같다. -한국금석문집성
79세의 나이로 입적하자 왕은 ‘정진(靜眞)’이라는 시호와 ‘원오(圓悟)’라는 탑이름을 내리었다.-문화재청
대사가 입적한 지 9년만인 965년(광종 16년)에 세웠다. 귀부와 이수, 비신을 갖춘 양식으로 보존 상태는 양호하며 53행에 1행 103자의 구조로 된 큰 비이다. 보물 제172호로 지정되었으며 보물 제171호로 지정된 대사의 사리탑과 나란히 있다.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
고려 초기의 조형적 특색을 지닌 비로서, 965년(광종 16) 무렵에 세워졌다. 귀부(龜趺)와 이수(螭首)의 형식은 일반적인 방식이나 비좌(碑座)가 두드러지게 커졌고, 정상의 화염보주(火焰寶珠)는 뚜렷하게 조각되어 있는데 이는 다른 예에서도 볼 수 있는 형식이다. -두산백과
비는 거북받침돌 위로 비몸을 세우고 머리돌을 올린 모습으로, 거북의 등 중앙에 마연된 비를 꽂아두는 부분이 두드러지게 커 보인다. 꼭대기에는 불꽃무늬에 휩싸인 보주가 또렷하게 조각되어 우뚝 솟아있으나, 전체적인 조형이 간략화되었으며 조각기법이 퇴화하였다. -한국금석문집성
비신은 푸른 빛깔을 띤 응회암으로 고려 초기의 석비 형식을 따르고 있으며, 세부 표현이 강한 조각 수법이다. -민백
비문
비문은 크게 서(序)와 명(銘) 부분으로 나누어 볼 수 있는데, 서에는[1] 정진대사가 태어나 출가하고 양부(楊孚)에게서 배운 뒤 중국에 가서 도연(道緣)을 만나고 귀국한 후 봉암사(鳳巖寺)에서 활동하며 태조가 후삼국을 통일한 후 스스로 개경에 가서 만나고 혜종·정종으로부터 대우를 받으며 광종은 궁중에 초청하여 재를 베풀고 호를 내렸고 이후 정진대사는 봉암사에 물러나 입적한 생애를 기술되어 있다.[2]
한편, 비문 중에는 ‘聖朝光德二年(성조광덕이년)’이라는 문구가 있어 고려시대 연호 연구의 귀중한 자료로 평가된다.[3]
지식관계망
"그래프 삽입"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문경 봉암사 | A는 B에 있다 | |
광종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A는 B의 이름을 지었다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긍양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이몽유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장단열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 섬율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임세권, 『한국금석문집성 2: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 봉암사정진대사원오탑비", 금석문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원. - ↑ 김세호, "문경 봉암사 정진대사탑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