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의 두 판 사이의 차이
(→내용) |
(→전해지는 이야기"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문화재청.) |
||
30번째 줄: | 30번째 줄: | ||
====전해지는 이야기<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4880000,31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전해지는 이야기<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4880000,31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 ||
− |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 + |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
− |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 ||
===비문=== | ===비문=== |
2017년 5월 30일 (화) 14:58 판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
|
대표명칭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
---|---|
영문명칭 | Stele for State Preceptor Hyeso at Chiljangsa Temple, Anseong |
한자 | 安城 七長寺 慧炤國師碑 |
주소 |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리 762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48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8년 12월 19일 |
찬자 | 김현(金顯) |
서자 | 민상제(閔賞濟) |
각자 | 배가성(裵可成), 이맹(李孟) |
서체 | 구양순체 |
승려 | 정현(鼎賢) |
|
정의
경기도 안성시 죽산면 칠장사(七長寺)에 있는 고려시대 승려 정현(鼎賢)의 탑비.
내용
탑비
이 비는 고려 문종 14년(1060년)에 혜소국사 정현(慧炤國師 鼎賢)의 입적을 기념하기 위하여 세운 것으로서 글은 김현(金顯)이 짓고 글씨는 민상제(閔賞濟)가 썼으며,[1] 글자를 새기는 일은 배가성(裵可成)·이맹(李孟) 등이 하였다.[2]
탑비의 비신(碑身) 높이는 3.4m, 폭은 1.28m이고, 비신의 양면에는 여의주를 가지고 노는 범(虎) 비슷한데, 비늘이 있다는 짐승인 이호가 양각으로 새겨져 있고, 비신을 보호하기 위한 수호적인 의미와 장식적인 효과를 위해 비신 위에 올려지는 부분인 이수(螭首)에는 거북과 용이 새겨져 있는데, 이는 각각 장수를 상징하며 물과 지상 천상의 세계를 마음대로 드나들 수 있는 힘과 신통력을 지닌 동물로, 이것은 비의 주인공인 혜소국사의 영혼을 천상세계로 인도하며, 비문을 후세에 영원히 전하기 위한 의미를 가지며 화려하고 생동감 있게 새겨져 있다.[3]
전해지는 이야기[4]
- 임진왜란 당시 왜의 장수인 가토가 이 절에 왔을 때, 어떤 노승이 홀연히 나타나 그의 잘못을 꾸짖자 화가 난 가토가 칼을 빼어 베었다. 노승은 사라지고 비석이 갈라지면서 피를 흘리니 가토는 겁이 나서 도망을 쳤다. 현재 이 비의 몸돌이 가운데가 갈라져 있어 이러한 이야기를 뒷받침해 주고 있다.
비문
비문에 의하면, 국사의 이름은 정현(鼎賢), 속성은 이씨이고 10세에 광교사(光敎寺)에서 충회(忠會)에게 구법(求法)하였으며 17세에 영통사(靈通寺)에서 구족계(具足戒)[5]를 받았다. 28세에 칙명에 의하여 대사가 되었으며 41세에 중대사(重大師), 60세가 넘어서는 승통(僧統)이 되었다. 그리고 1046년에 자수승가리일령(紫繡僧伽梨一領)과 금첩법의일령(錦貼法衣一領)이 하사되었고, 1054년 세수 83세, 승랍 74세로 입멸하였다는 등 그의 행적을 적었고, 후미에는 대사를 기리는 명문이 있다.[6]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 안성 칠장사 | A는 B에 있다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 정현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 김현 | A는 B가 비문을 지었다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 민상제 | A는 B가 비문을 썼다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 배기성, 이맹 | A는 B가 비문을 새겼다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 구양순 | A는 B와 관련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위키백과』online .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칠장사(안성)",
『대한민국 구석구석』online , 한국관광공사.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비구와 비구니가 받아 지켜야 할 온전한 계율. 비구는 250계, 비구니는 348계.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구족계",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안성 칠장사 혜소국사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