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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례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금침|금침(衾枕)]]이다. 이불에 사용된 직물은 [[도류단]], [[저우사]], [[별문영초]], [[왜주]], [[별문영견]] 등 최고급의 비단이 사용되었다. 또한 계절에 맞춰 솜을 둔 것도 있고 겹으로만 제작한 것도 있으며, 솜을 얇게 두고 누빈 것도 있다. [[누비]]를 할 때에도 누비의 간격을 달리하여 세누비, 잔주누비를 만들었으며, 솜을 두껍게 두어 넓게 누빔으로써 오목오목한 효과를 낸 오목누비와 솜을 얇게 둠으로써 납작한 느낌이 나오도록 한 납작누비도 있다. 베개는 용도와 장소에 따라 별궁침, 가례시침으로 구분했으며, 베개 양 [[마구리]]의 수에 따라서도 공침으로 구분하였다. 이들 베개에는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용, 봉황뿐 아니라 부부의 금슬을 상징하는 오리,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해학반도]], [[기린]]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등의 수를 놓았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12쪽.</REF> | 가례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금침|금침(衾枕)]]이다. 이불에 사용된 직물은 [[도류단]], [[저우사]], [[별문영초]], [[왜주]], [[별문영견]] 등 최고급의 비단이 사용되었다. 또한 계절에 맞춰 솜을 둔 것도 있고 겹으로만 제작한 것도 있으며, 솜을 얇게 두고 누빈 것도 있다. [[누비]]를 할 때에도 누비의 간격을 달리하여 세누비, 잔주누비를 만들었으며, 솜을 두껍게 두어 넓게 누빔으로써 오목오목한 효과를 낸 오목누비와 솜을 얇게 둠으로써 납작한 느낌이 나오도록 한 납작누비도 있다. 베개는 용도와 장소에 따라 별궁침, 가례시침으로 구분했으며, 베개 양 [[마구리]]의 수에 따라서도 공침으로 구분하였다. 이들 베개에는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용, 봉황뿐 아니라 부부의 금슬을 상징하는 오리,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해학반도]], [[기린]]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등의 수를 놓았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12쪽.</REF> | ||
+ | ==부연설명== | ||
+ | 1882년 순종의 첫번째 [[가례]](혼례)이다. 3차에 걸친 간택(揀擇:왕,왕자,공주의 배우자를 선택함)에서 [[민태호]]의 딸, [[순명효황후]]가 뽑혔다. 가례(혼례)의 절차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사용된 복식은 『[[가례도감의궤]]』와 『[[일방의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례도감의궤』에서는 250여년의 복식명과 의차(衣次:옷감)이 모두 같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실의례라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복식을 제작한 궁녀들의 기록인 '발기'에는 현존하는 왕실 유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복식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의차(옷감)도 차이를 보인다. <ref>안예영, 「1882(壬午)年 王世子 嘉禮 硏究-《가례도감의궤》와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궁중ᄇᆞᆯ긔</span>〉 중심으로」, 『장서각』2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134-135쪽.</ref> | ||
+ | 왕세자빈([[순명효황후]])의 1882년 가례(혼례)관련 발기는 의대 발기가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임오쳔만셰동궁마마가례시빈궁마누라의침방의문져라주오신기」, 「임오쳔만셰가례시빈궁마마의긔[침방]」, 「임오쳔만세동궁마마가례시간후보오실빈궁마누라의발기」, 「임오쳔만세동궁마마가례시[삼간시]빈궁마누라의발긔」,「임오쳔만셰동궁마마가례시빈궁마누라의발긔」, 의차(衣次:옷감)발기가 「壬午正月嘉禮時揀擇處子衣次」 1건이 있으며, 수방(繡房:궁궐에서 수놓는 일을 하던 곳)발기로 「{{PAGENAME}}」가 있다.</span> | ||
+ | <ref>안예영, 「1882(壬午)年 王世子 嘉禮 硏究-《가례도감의궤》와 〈<span style="font-family:함초롬돋움">궁중ᄇᆞᆯ긔</span>〉 중심으로」, 『장서각』2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131쪽.</ref> | ||
+ | 흉배(胸背)는 조선시대 왕족과 관리들이 있는 복식의 가슴과 등에 붙이는 장식품이다.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내었다. 왕과 왕세자는 용무늬를 수놓은 원형의 흉배를 가슴, 등 그리고 양 어깨에 붙였다.<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867 흉배]",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ref> | ||
+ | 적의는 왕비의 복식으로, 혼례와 같은 왕실의 경사스런 행사에서는 금으로 수놓은 흉배를 붙여 사용하였다.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9188 적의]",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ref> | ||
+ | 향갑은 향을 담는 조그만 상자이다. 거실이나 침실에 놓아두거나, 여성들의 경우 장신구로 만들어 몸에 지니기도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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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운혜(雲鞋)는 앞과 뒤에 구름무늬를 새긴 여성의 신발이다. 『상방정례』와 각종 의례 발기 등에서 언급되고 있어 조선전기부터 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 | ||
+ | <ref>"[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 <html><online style="color:purple">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ref> | ||
+ |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에의 허리부분에 차는 여성들의 장신구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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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해학반도(海鶴蟠桃)는 바다, 학, 반도복숭아 등으로 오래 살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 ||
+ | <ref>조기형,이상억,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687362&cid=50293&categoryId=50293 해학반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 『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ref | ||
==관련항목== | ==관련항목== |
2017년 4월 14일 (금) 21:07 판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
영문명칭 | A list of clothes and accessories for the wedding ceremony of Sunjong |
---|---|
작자 | 미상 |
간행시기 | 1882년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청구기호 | 1242 |
유형 | 고문서 |
크기(세로×가로) | 25.7×260.4cm |
판본 | 필사본 |
수량 | 1장 |
표기문자 | 한글 |
정의
1882년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의 가례를 위해 장만한 흉배, 베개, 노리개 등을 기록한 발기이다.
내용
1882년 당시 왕세자였던 순종의 가례를 위해 장만한 흉배, 베개, 노리개 등을 기록한 발기이다. 본 발기의 배면에는 <임요쳔만셰 동궁마마 가례시 륭흉 침 노리개 ᄇᆞᆯ긔>라는 기록이 있어 그 용처를 확인할 수 있다. 분홍색, 연보라색, 송화색, 연보라색, 갈색, 송화색, 갈색 등의 한지를 연결하였으며, 가례에 필요한 흉배를 비롯하여, 적의에 사용될 수장식, 주머니, 향갑, 운혜, 방석, 부채, 노리개, 베개 등의 물목을 기록하였다. 가례에서 중요한 것 중 하나가 금침(衾枕)이다. 이불에 사용된 직물은 도류단, 저우사, 별문영초, 왜주, 별문영견 등 최고급의 비단이 사용되었다. 또한 계절에 맞춰 솜을 둔 것도 있고 겹으로만 제작한 것도 있으며, 솜을 얇게 두고 누빈 것도 있다. 누비를 할 때에도 누비의 간격을 달리하여 세누비, 잔주누비를 만들었으며, 솜을 두껍게 두어 넓게 누빔으로써 오목오목한 효과를 낸 오목누비와 솜을 얇게 둠으로써 납작한 느낌이 나오도록 한 납작누비도 있다. 베개는 용도와 장소에 따라 별궁침, 가례시침으로 구분했으며, 베개 양 마구리의 수에 따라서도 공침으로 구분하였다. 이들 베개에는 왕과 왕비를 상징하는 용, 봉황뿐 아니라 부부의 금슬을 상징하는 오리, 장수를 상징하는 십장생, 해학반도, 기린과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모란 등의 수를 놓았다. [1]
부연설명
1882년 순종의 첫번째 가례(혼례)이다. 3차에 걸친 간택(揀擇:왕,왕자,공주의 배우자를 선택함)에서 민태호의 딸, 순명효황후가 뽑혔다. 가례(혼례)의 절차는 『국조오례의』를 따르고 있다. 사용된 복식은 『가례도감의궤』와 『일방의궤』에서 확인할 수 있다. 『가례도감의궤』에서는 250여년의 복식명과 의차(衣次:옷감)이 모두 같게 기록되어 있다. 이는 왕실의례라는 특성 때문이다. 그러나 실제 복식을 제작한 궁녀들의 기록인 '발기'에는 현존하는 왕실 유품에서 확인할 수 있는 복식명칭을 그대로 사용하고 있으며 의차(옷감)도 차이를 보인다. [2]
왕세자빈(순명효황후)의 1882년 가례(혼례)관련 발기는 의대 발기가 「임오쳔만셰동궁마마가례시빈궁마누라의침방의문져라주오신기」, 「임오쳔만셰가례시빈궁마마의긔[침방]」, 「임오쳔만세동궁마마가례시간후보오실빈궁마누라의발기」, 「임오쳔만세동궁마마가례시[삼간시]빈궁마누라의발긔」,「임오쳔만셰동궁마마가례시빈궁마누라의발긔」, 의차(衣次:옷감)발기가 「壬午正月嘉禮時揀擇處子衣次」 1건이 있으며, 수방(繡房:궁궐에서 수놓는 일을 하던 곳)발기로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가 있다.
[3]
흉배(胸背)는 조선시대 왕족과 관리들이 있는 복식의 가슴과 등에 붙이는 장식품이다. 문양에 따라 품계를 나타내었다. 왕과 왕세자는 용무늬를 수놓은 원형의 흉배를 가슴, 등 그리고 양 어깨에 붙였다.[4]
적의는 왕비의 복식으로, 혼례와 같은 왕실의 경사스런 행사에서는 금으로 수놓은 흉배를 붙여 사용하였다. [5]
향갑은 향을 담는 조그만 상자이다. 거실이나 침실에 놓아두거나, 여성들의 경우 장신구로 만들어 몸에 지니기도 하였다.
[6]
운혜(雲鞋)는 앞과 뒤에 구름무늬를 새긴 여성의 신발이다. 『상방정례』와 각종 의례 발기 등에서 언급되고 있어 조선전기부터 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
[7]
노리개는 저고리 고름이나 치마에의 허리부분에 차는 여성들의 장신구이다.
[8]
해학반도(海鶴蟠桃)는 바다, 학, 반도복숭아 등으로 오래 살거나 없어지지 않는 것을 상징한다.
<ref>조기형,이상억, 『한자성어•고사명언구사전』, 2011. 온라인 참조: ,"해학반도",
관련항목
중심 | 연결정보 | 대상 |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인물 | 순종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인물 | 고종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개념 | 가례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시간정보
중심 | 시간정보명 | 시간값 |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간행년 | 1882년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간행년 | 고종19년 |
공간정보
중심 | 연결정보 | 공간정보이름 | 경도 | 위도 |
---|---|---|---|---|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 소장처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 37.39197 | 127.054387 |
참고문헌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212쪽.
- ↑ 안예영, 「1882(壬午)年 王世子 嘉禮 硏究-《가례도감의궤》와 〈궁중ᄇᆞᆯ긔〉 중심으로」, 『장서각』2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134-135쪽.
- ↑ 안예영, 「1882(壬午)年 王世子 嘉禮 硏究-《가례도감의궤》와 〈궁중ᄇᆞᆯ긔〉 중심으로」, 『장서각』22, 한국학중앙연구원, 2009, 131쪽.
- ↑ "흉배",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 - ↑ "적의",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 - ↑ "향갑",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 - ↑ "운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 - ↑ "노리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최종확인:2017년 4월 14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