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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城(달성)은 본시 달구벌성 이라 부르는 新羅(신라)때의 고을 성이더니 뒷날 高麗(고려)시대에 이르러 徐氏([[서씨]])의 터전이 되었는데 徐氏([[서씨]])의 옛 기록을 상고 하건 대 일찍이 箕子(기자)의 자손으로 馬韓王(마한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徐阿城(서아성) 곧 利川(이천)에 살면서 땅 이름을 따라 徐氏([[서씨]])가 되니 동쪽을 일컫는 우리 말 새의 유역자로 新羅(신라)의 개국공신 阿城大將軍(아성대장군) 徐豆羅([[서두라]])의  이름이 높이 들렸고 말엽에 阿干公(아간공) 徐神逸([[서신일]])이 화살 맞은 사슴을 살려준 날 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서 그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서 공의 혜를 입고 살아 났으니 나도 공에게 그 은혜를 갚으리라 하며 공의 자손은 세세에 재상이 되리라  한 그대로 과연 八十(팔십)에 아들 徐弼([[서필]])을 나으니 高麗太師(고려태사)內史令(내사령) 貞敏公(정민공)이요 손자 徐熙([[서희]])는 桀丹軍(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웅변으로 물리친 太保(태보) 內史令(내사령) 利川伯(이천백) 章威公(장위공)이요. 증손자 徐訥([[서눌]])은 太師(태사)內史令(내사령)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 元肅公(원숙공)으 로 顯宗妃(현종비) 元修王后(원수왕후)의 아버지이며 그의 새째 아들 徐維行(서유행([[서주행]])이  達川君(달천군) 봉작을 받은 것으로 보아 利川(이천)에서 達城(달성)으로 관향이 나뉜 것은 이때부터 인듯하며 위에 奉翊大夫(봉익대부)版圖判書(판도판서) 徐晉([[서진(고려)|서진]])에게 達城君(달성군)을 또 아들 徐奇俊([[서기준]]) 에게는 達川君(달천군)을 각각 봉했고 또 그의 아들 重大匡 金紫光綠大夫(중대광 금자광록 대부) 門下時中(문하시중) 贊成事(찬성사) 忠靖公(충정공) 徐穎([[서영(고려)|서영]])에게도 達城君(달성군)을 봉했으며 아들 徐鈞衡([[서균형]])은 政堂文學(정당문학) 世子師傅(세자사부)를 역임한 貞平公(정평공)이요 貞平公(정평공)의 아들徐沈([[서침]])은 字(자)가 聖默(성묵)이고 號(호)는 龜溪(구계)이며 鄭圃隱(정포은)의 문인으로서 性理學(성리학)을 연구한 문인이요 벼슬은 朝奉大夫(조봉대부) 典醫小監(전의소감) 中樞院事(중추원사)를 지냈었고 世宗(세종)때 三南均田制處使(삼남균전제처사)가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達城(달성) 안을 군사상 요지로 쓰기위하여 南山(남산) 옛 驛(역) 터를 대신주고 蓮信池(연신지)와  新池(신지)의 이권도 주며 대대로 벼슬과 녹을 주도록 명령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며 한집안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보다는 모든 백성이 은택을 두루 입게하소서 하고 이 지방에서 바치는 環穀(환곡) 한 섬에 다섯 되씩 감해줄 것을 청하여 위에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그대로 실시하여 5백 여 년을 계속해 내려왔으니 공의 은혜를 앙모함이 있어 이제 저 顯宗(현종)때에 龜巖書院([[구암서원]]) 崇賢祠([[숭현사]])를 세워 공과 공의 종족으로 이름난 이들을 제사 해 왔던 것만으로 족할 것이라 헤아려 보건데 徐氏([[서씨]])가 達城(달성)에 터를 잡았던 것이 高麗(고려) 靖宗(정종) 시대라 구백여년 전이요 또 이 터를 나라에 바친 것은 世宗(세종) 시대라 오백 여년인데 공의 은혜로 徐氏([[서씨]]) 문중에서 四佳(사가) [[서거정]]선생과 樂齋(낙재) [[서사원]]선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현 달사들을 배출한 것은 진실로 덕을 끼친 때문이 아니랴. 이같이 땅과 인물이 서로 열리어 아름다운 역사를 지은 것이라 느끼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노래 두어 장을 지어 바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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城(달성)은 본시 달구벌성 이라 부르는 新羅(신라)때의 고을 성이더니 뒷날 高麗(고려)시대에 이르러 徐氏([[서씨]])의 터전이 되었는데 徐氏([[서씨]])의 옛 기록을 상고 하건 대 일찍이 箕子(기자)의 자손으로 馬韓王(마한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徐阿城(서아성) 곧 利川(이천)에 살면서 땅 이름을 따라 徐氏([[서씨]])가 되니 동쪽을 일컫는 우리 말 새의 유역자로 新羅(신라)의 개국공신 阿城大將軍(아성대장군) 徐豆羅([[서두라]])의  이름이 높이 들렸고 말엽에 阿干公(아간공) 徐神逸([[서신일]])이 화살 맞은 사슴을 살려준 날 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서 그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서 공의 혜를 입고 살아 났으니 나도 공에게 그 은혜를 갚으리라 하며 공의 자손은 세세에 재상이 되리라  한 그대로 과연 八十(팔십)에 아들 徐弼([[서필]])을 나으니 高麗太師(고려태사)內史令(내사령) 貞敏公(정민공)이요 손자 徐熙([[서희]])는 桀丹軍(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웅변으로 물리친 太保(태보) 內史令(내사령) 利川伯(이천백) 章威公(장위공)이요. 증손자 徐訥([[서눌]])은 太師(태사)內史令(내사령)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 元肅公(원숙공)으 로 顯宗妃(현종비) 元修王后(원수왕후)의 아버지이며 그의 새째 아들 徐維行(서유행([[서주행]])이  達川君(달천군) 봉작을 받은 것으로 보아 利川(이천)에서 達城(달성)으로 관향이 나뉜 것은 이때부터 인듯하며 위에 奉翊大夫(봉익대부)版圖判書(판도판서) 徐晉([[서진(고려)|서진]])에게 達城君(달성군)을 또 아들 徐奇俊([[서기준]]) 에게는 達川君(달천군)을 각각 봉했고 또 그의 아들 重大匡 金紫光綠大夫(중대광 금자광록 대부) 門下時中(문하시중) 贊成事(찬성사) 忠靖公(충정공) 徐穎([[서영(고려)|서영]])에게도 達城君(달성군)을 봉했으며 아들 徐鈞衡([[서균형]])은 政堂文學(정당문학) 世子師傅(세자사부)를 역임한 貞平公(정평공)이요 貞平公(정평공)의 아들徐沈([[서침]])은 字(자)가 聖默(성묵)이고 號(호)는 龜溪(구계)이며 鄭圃隱(정포은)의 문인으로서 性理學(성리학)을 연구한 문인이요 벼슬은 朝奉大夫(조봉대부) 典醫小監(전의소감) 中樞院事(중추원사)를 지냈었고 世宗(세종)때 三南均田制處使(삼남균전제처사)가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達城(달성) 안을 군사상 요지로 쓰기위하여 南山(남산) 옛 驛(역) 터를 대신주고 蓮信池(연신지)와  新池(신지)의 이권도 주며 대대로 벼슬과 녹을 주도록 명령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며 한집안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보다는 모든 백성이 은택을 두루 입게하소서 하고 이 지방에서 바치는 環穀(환곡) 한 섬에 다섯 되씩 감해줄 것을 청하여 위에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그대로 실시하여 5백 여 년을 계속해 내려왔으니 공의 은혜를 앙모함이 있어 이제 저 顯宗(현종)때에 龜巖書院([[구암서원]]) 崇賢祠([[숭현사]])를 세워 공과 공의 종족으로 이름난 이들을 제사 해 왔던 것만으로 족할 것이라 헤아려 보건데 徐氏([[서씨]])가 達城(달성)에 터를 잡았던 것이 高麗(고려) 靖宗(정종) 시대라 구백여년 전이요 또 이 터를 나라에 바친 것은 世宗(세종) 시대라 오백 여년인데 공의 은혜로 徐氏([[서씨]]) 문중에서 四佳(사가) [[서거정]]선생과 樂齋(낙재) [[서사원(조선)|서사원]]선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현 달사들을 배출한 것은 진실로 덕을 끼친 때문이 아니랴. 이같이 땅과 인물이 서로 열리어 아름다운 역사를 지은 것이라 느끼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노래 두어 장을 지어 바친다
  
 
 
 
 

2022년 10월 14일 (금) 08:29 판

달성서씨 유허비 비문(達城徐氏遺墟碑碑文)

대구 달성공원 (達城公園)의 역사 얽힌 땅은 돌 한덩이 나무 한 그루도 무심히 볼 것이 아니어서 나그네는 멈추고 제 고장 사람들도 이대로 다시 들려보는 것이니 그것은 돌과 나무가 귀해서가 아니라 거기에 아로새겨 놓은 역사가  귀하기 때문이며 그것도 아름다운 역사일 경우에는 더욱 더 그러한 법이다.  여기에 달성(達城)공원은 바로 그 역사 얽힌 곳이니 바라보라 저 玄風(현풍) 琵瑟山 (비슬산)이 동북으로 뻗어 最頂上(최정상)이 되고 다시 서북으로 달려 大德山(대덕 산)을 이루고 그것이 또 북으로 뻗어내려 작은 언덕이 되었다가 그대로 서쪽으로  구불거려 圓山(원산)이 되고 거기서 다시 북으로 뻗어졌다 동으로 굽이 틀어 평지로 내려오다 고개 들고 일어나 동향하여 앉는 것이 바로 여긴데 앞에는 嶺南(영남) 의 웅도 大邱(대구)시가요 뒤에는 臥龍山(와룡산)이 병풍과 같이 둘러쳤으며 멀리  동북에는 八公山(팔공산)이 솟아 둘리고 굽이도는 琴湖江(금호강)이 서로 洛東江 (낙동강)이 흘러들어 강산풍경이 이와 같거늘 어찌 인물의 역사가 없을 가 보냐

城(달성)은 본시 달구벌성 이라 부르는 新羅(신라)때의 고을 성이더니 뒷날 高麗(고려)시대에 이르러 徐氏(서씨)의 터전이 되었는데 徐氏(서씨)의 옛 기록을 상고 하건 대 일찍이 箕子(기자)의 자손으로 馬韓王(마한왕)이 되었고 후손들이 徐阿城(서아성) 곧 利川(이천)에 살면서 땅 이름을 따라 徐氏(서씨)가 되니 동쪽을 일컫는 우리 말 새의 유역자로 新羅(신라)의 개국공신 阿城大將軍(아성대장군) 徐豆羅(서두라)의  이름이 높이 들렸고 말엽에 阿干公(아간공) 徐神逸(서신일)이 화살 맞은 사슴을 살려준 날 밤 꿈에 한 신인이 나타나서 그 사슴은 나의 자식으로서 공의 혜를 입고 살아 났으니 나도 공에게 그 은혜를 갚으리라 하며 공의 자손은 세세에 재상이 되리라  한 그대로 과연 八十(팔십)에 아들 徐弼(서필)을 나으니 高麗太師(고려태사)內史令(내사령) 貞敏公(정민공)이요 손자 徐熙(서희)는 桀丹軍(거란군)이 침입했을 때 웅변으로 물리친 太保(태보) 內史令(내사령) 利川伯(이천백) 章威公(장위공)이요. 증손자 徐訥(서눌)은 太師(태사)內史令(내사령) 門下侍中(문하시중) 平章事(평장사) 元肅公(원숙공)으 로 顯宗妃(현종비) 元修王后(원수왕후)의 아버지이며 그의 새째 아들 徐維行(서유행(서주행)이  達川君(달천군) 봉작을 받은 것으로 보아 利川(이천)에서 達城(달성)으로 관향이 나뉜 것은 이때부터 인듯하며 위에 奉翊大夫(봉익대부)版圖判書(판도판서) 徐晉(서진)에게 達城君(달성군)을 또 아들 徐奇俊(서기준) 에게는 達川君(달천군)을 각각 봉했고 또 그의 아들 重大匡 金紫光綠大夫(중대광 금자광록 대부) 門下時中(문하시중) 贊成事(찬성사) 忠靖公(충정공) 徐穎(서영)에게도 達城君(달성군)을 봉했으며 아들 徐鈞衡(서균형)은 政堂文學(정당문학) 世子師傅(세자사부)를 역임한 貞平公(정평공)이요 貞平公(정평공)의 아들徐沈(서침)은 字(자)가 聖默(성묵)이고 號(호)는 龜溪(구계)이며 鄭圃隱(정포은)의 문인으로서 性理學(성리학)을 연구한 문인이요 벼슬은 朝奉大夫(조봉대부) 典醫小監(전의소감) 中樞院事(중추원사)를 지냈었고 世宗(세종)때 三南均田制處使(삼남균전제처사)가 되었는데 조정에서는 達城(달성) 안을 군사상 요지로 쓰기위하여 南山(남산) 옛 驛(역) 터를 대신주고 蓮信池(연신지)와  新池(신지)의 이권도 주며 대대로 벼슬과 녹을 주도록 명령하였으나 공은 굳이 사양하며 한집안의 사사로운 은혜를 받기보다는 모든 백성이 은택을 두루 입게하소서 하고 이 지방에서 바치는 環穀(환곡) 한 섬에 다섯 되씩 감해줄 것을 청하여 위에서는 크게 칭찬하시고 그대로 실시하여 5백 여 년을 계속해 내려왔으니 공의 은혜를 앙모함이 있어 이제 저 顯宗(현종)때에 龜巖書院(구암서원) 崇賢祠(숭현사)를 세워 공과 공의 종족으로 이름난 이들을 제사 해 왔던 것만으로 족할 것이라 헤아려 보건데 徐氏(서씨)가 達城(달성)에 터를 잡았던 것이 高麗(고려) 靖宗(정종) 시대라 구백여년 전이요 또 이 터를 나라에 바친 것은 世宗(세종) 시대라 오백 여년인데 공의 은혜로 徐氏(서씨) 문중에서 四佳(사가) 서거정선생과 樂齋(낙재) 서사원선생 등 이루 다 헤아릴 수 없는 수많은 명현 달사들을 배출한 것은 진실로 덕을 끼친 때문이 아니랴. 이같이 땅과 인물이 서로 열리어 아름다운 역사를 지은 것이라 느끼운 마음을 금치 못하여 노래 두어 장을 지어 바친다

 

箕子(기자)는 조국 殷(은)나라 폐허를 지나가며

바람 곁에 불리는 보리이삭을 만지면서

麥秀歌(맥수가) 슬픈 노래를 눈물 섞어 부르더니

오늘의 徐氏(서씨) 자손들 達城(달성) 옛터를  오르내리며

번영의 새나라 사람들 속에  섞여들어

조상의 어진 이야기를 자랑스레 뇌이네             

1971년  3월    일 후학  李  殷  相 (이은상) 글을  짓고 후손  徐  東  均 (서동균)    삼가 써서 

달성서씨대종회 삼가 세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