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유관"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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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조선시대 | + |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조복|조복(朝服)]]을 입을 때 착용하는 관모. |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 ||
− | * 조선에서는 황태자, 왕, 왕세자, 왕세손이 착용했고, 중국에서는 황태자 및 왕의 후계자, 황제의 형제, 황제의 아들 중 군왕으로 책봉된 자가 착용.<ref> 『晉書』 | + | * 조선에서는 황태자, 왕, 왕세자, 왕세손이 착용했고, 중국에서는 황태자 및 왕의 후계자, 황제의 형제, 황제의 아들 중 군왕으로 책봉된 자가 착용.<ref> 『晉書』 s「輿服志 第35」, “逺逰冠, 傅玄云: 秦冠也, 似通天, 而前無山述, 有展筩横于冠前. 皇太子及王者․後帝之兄弟․帝之子․封郡王者服之. 諸王加官者自服其官之冠服, 惟太子及王者後常冠焉, 太子則以翠羽爲緌, 綴以白珠, 其餘但青絲而已.”</ref> |
* 조회를 지낼 때 입는 복식 일습인 [[조복]]을 착용할 때 쓰는 관으로 '조회'는 매일 보는 조회. | * 조회를 지낼 때 입는 복식 일습인 [[조복]]을 착용할 때 쓰는 관으로 '조회'는 매일 보는 조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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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진(秦)이 통일을 한 후 신하들에게 점령국 군주의 관을 나눠주면서 생겨남. | + | * 진(秦)이 통일을 한 후 신하들에게 점령국 군주의 관을 나눠주면서 생겨남.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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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재도회 원유관.jpg|『삼재도회(三才圖會)』 원유관 | 파일:삼재도회 원유관.jpg|『삼재도회(三才圖會)』 원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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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예복원유관-왕.JPG|『예복(禮服)』 원유관 | 파일:예복원유관-왕.JPG|『예복(禮服)』 원유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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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왕세자: 모라(毛羅)로 싸고 양끝에는 주색 끈이 있어 전하의 관과 같다. 8량이며 매 양에는 앞뒤로 각 8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ref>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 + | * 왕세자: 모라(毛羅)로 싸고 양끝에는 주색 끈이 있어 전하의 관과 같다. 8량이며 매 양에는 앞뒤로 각 8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ref>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王世子遠遊冠服圖說」, “冠以毛羅裹之, 兩旁朱組制同殿下冠, 而惟冠梁八, 每梁前後各八玉三采.”</ref> |
− | * 왕세손: 7량이며 앞뒤로 각 7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ref>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 + | * 왕세손: 7량이며 앞뒤로 각 7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ref>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王世子遠遊冠服圖說」, “王世孫冠梁七, 每梁前後各七玉三采.”</ref> |
− | * 대한제국 황태자: 오사(烏紗)로 덮고, 앞뒤 각 9봉(縫)이 있으며 매 봉마다 다섯 가지 옥을 9봉 부착하며, 양 옆에 주색 영을 매고 금잠을 꽂으며, 잠을 꽂는 부분과 영을 매는 주위는 모두 금으로 장식한다. <ref> 『禮服』 | + | * 대한제국 황태자: 오사(烏紗)로 덮고, 앞뒤 각 9봉(縫)이 있으며 매 봉마다 다섯 가지 옥을 9봉 부착하며, 양 옆에 주색 영을 매고 금잠을 꽂으며, 잠을 꽂는 부분과 영을 매는 주위는 모두 금으로 장식한다. <ref> 『禮服』 ,「皇太子遠遊冠絳紗袍」, “冠制: 冠烏紗冒之, 前後各九縫, 每縫五采玉九縫, 及冠武並貫簪繫纓處 皆飾以金 金簪朱纓.”</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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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의왕 원유관.JPG| 의왕(義王) 원유관<ref>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관 소장.</ref> | 파일:의왕 원유관.JPG| 의왕(義王) 원유관<ref>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관 소장.</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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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대한제국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통천관|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왕이 착용한던 9량 원유관을 황태자가 착용.<ref>최규순 | + | * 대한제국 고종이 황제로 등극하면서 [[통천관|통천관(通天冠)]]을 쓰고, 왕이 착용한던 9량 원유관을 황태자가 착용.<ref>최규순, 「황제와 황후의 복식, 어떻게 변화했나」,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2010, 264~269쪽.</ref> |
===사여 기록=== | ===사여 기록=== | ||
− | * 고려: 공민왕 19년(홍무 3년) 5월 명 태조가 7량 원유관과 [[강사포]] 사여.<ref> 『高麗史』 卷72, | + | * 고려: 공민왕 19년(홍무 3년) 5월 명 태조가 7량 원유관과 [[강사포]] 사여.<ref> 『高麗史』, 卷72, 「志輿服 1」, ‘1370년 5월 미상(음), 공민왕 19년’, “恭愍王 十九年五月: 太祖高皇帝, 賜遠遊冠七梁, 加金博山, 附蟬七首, 上施珠翠, 犀簪導. 絳紗袍, 紅裳, 白紗中單, 黑領靑緣袖, 裙, 襦, 紗蔽膝, 白假帶, 方心曲領, 紅革帶, 金鉤䚢, 白襪黑舃, 受群臣朝賀服之.”</ref> |
− | * 조선: 세종 20년 10월 4일 9량 원유관복 사여.<ref> 『朝鮮王朝實錄』 | + | * 조선: 세종 20년 10월 4일 9량 원유관복 사여.<ref> 『朝鮮王朝實錄』 「世宗 20年 10月4日」, “藝文大提學洪汝方齎勅及欽賜冠服, 回自京師, 上率百官迎勅如儀. 其勑曰: ‘今賜王遠遊冠服, 至可領也.’ 賜汝方鞍馬, 設宴慰之.”</ref> |
==관련항목== | ==관련항목==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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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고려사(高麗史)』]] | * [[고려사|『고려사(高麗史)』]] | ||
* [[국조오례의서례|『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 [[국조오례의서례|『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
− | * 姜淳弟 | + | * 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V.16 N.1,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
− | * 최규순 | + | * 최규순, 「『대한예전』(大韓禮典)의 복식제도 연구」, 『아세아 연구』, 제 53권 1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10. |
− | * 黃能馥, 陳娟娟 | + | * 黃能馥, 陳娟娟, 『中華歷代服飾藝術』, 中國旅遊出版社, 1999. |
==주석== | ==주석== |
2017년 3월 22일 (수) 13:58 판
원유관(遠遊冠)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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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file:|360px|thumb|center|]] | |
대표명칭 | 원유관(遠遊冠) |
---|---|
이칭별칭 | - |
착용신분 | 왕실 |
착용성별 | 남성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가 조복(朝服)을 입을 때 착용하는 관모.
착용신분과 착용상황
- 조선에서는 황태자, 왕, 왕세자, 왕세손이 착용했고, 중국에서는 황태자 및 왕의 후계자, 황제의 형제, 황제의 아들 중 군왕으로 책봉된 자가 착용.[1]
- 조회를 지낼 때 입는 복식 일습인 조복을 착용할 때 쓰는 관으로 '조회'는 매일 보는 조회.
복식 구성
의왕(義王) 원유관[2]
기본 정보
유래
- 진(秦)이 통일을 한 후 신하들에게 점령국 군주의 관을 나눠주면서 생겨남.
신분별 형태
- 왕: 흑색 라로 만들고, 9량이다. 매 양에는 18개의 옥이 있는데 앞에 9개, 뒤에 9개의 옥이 황(黃)색, 창(蒼)색, 백(白)색, 주(朱)색, 흑(黑)색이며 금비녀를 꽂고, 주색끈 2개를 양 끝에 붙여 턱 아래에서 묶고 나머지를 늘어뜨린다.[3]
- 왕세자: 모라(毛羅)로 싸고 양끝에는 주색 끈이 있어 전하의 관과 같다. 8량이며 매 양에는 앞뒤로 각 8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4]
- 왕세손: 7량이며 앞뒤로 각 7개의 옥을 3가지 색으로 한다.[5]
- 대한제국 황태자: 오사(烏紗)로 덮고, 앞뒤 각 9봉(縫)이 있으며 매 봉마다 다섯 가지 옥을 9봉 부착하며, 양 옆에 주색 영을 매고 금잠을 꽂으며, 잠을 꽂는 부분과 영을 매는 주위는 모두 금으로 장식한다. [6]
의왕(義王) 원유관[7]
사여 기록
관련항목
문헌/회화 → 복식
항목A | 항목B | 관계 |
---|---|---|
노드 | 원유관 | A는 B를 보여준다 |
대명집례 | 원유관 | A는 B를 기록한다 |
대명회전 | 원유관 | A는 B를 기록한다 |
송사 | 원유관 | A는 B를 기록한다 |
진서 | 원유관 | A는 B를 기록한다 |
고려사 | 원유관 | A는 B를 기록한다 |
국조오례의서례 | 원유관 | A는 B를 기록한다 |
복식 → 복식
항목A | 항목B | 관계 |
---|---|---|
원유관 | 조복 | A는 B의 일습이다 |
인물 → 복식
항목A | 항목B | 관계 |
---|---|---|
황태자 | 원유관 | A는 B를 착용한다 |
왕 | 원유관 | A는 B를 착용한다 |
왕세자 | 원유관 | A는 B를 착용한다 |
왕세손 | 원유관 | A는 B를 착용한다 |
복식 → 기관
항목A | 항목B | 관계 |
---|---|---|
원유관 | 노드 | A는 B에서 제작한다 |
기관/소장처 → 복식
항목A | 항목B | 관계 |
---|---|---|
노드 | 원유관 | A는 B를 소장한다 |
참고문헌
- 『대명집례(大明集禮)』
- 『대명회전(大明會典)』
- 『송사(宋史)』
- 『진서(晉書)』
- 『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V.16 N.1,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 최규순, 「『대한예전』(大韓禮典)의 복식제도 연구」, 『아세아 연구』, 제 53권 1호, 고려대학교 아세아문제연구소, 2010.
- 黃能馥, 陳娟娟, 『中華歷代服飾藝術』, 中國旅遊出版社, 1999.
주석
- ↑ 『晉書』 s「輿服志 第35」, “逺逰冠, 傅玄云: 秦冠也, 似通天, 而前無山述, 有展筩横于冠前. 皇太子及王者․後帝之兄弟․帝之子․封郡王者服之. 諸王加官者自服其官之冠服, 惟太子及王者後常冠焉, 太子則以翠羽爲緌, 綴以白珠, 其餘但青絲而已.”
- ↑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관 소장.
- ↑ 『國朝五禮儀序例』 卷2, <冠服圖說>, “冠以羅爲之, 其色玄, 九梁, 每梁十八玉, 前九玉後九玉, 五采先黃次蒼次白次朱次黑, 金簪, 用朱組二屬之於兩旁, 結之頷下, 而垂其餘.”
- ↑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王世子遠遊冠服圖說」, “冠以毛羅裹之, 兩旁朱組制同殿下冠, 而惟冠梁八, 每梁前後各八玉三采.”
- ↑ 『國朝續五禮儀補序例』, 卷2, 「王世子遠遊冠服圖說」, “王世孫冠梁七, 每梁前後各七玉三采.”
- ↑ 『禮服』 ,「皇太子遠遊冠絳紗袍」, “冠制: 冠烏紗冒之, 前後各九縫, 每縫五采玉九縫, 及冠武並貫簪繫纓處 皆飾以金 金簪朱纓.”
- ↑ 오륜대 한국순교자박물관관 소장.
- ↑ 최규순, 「황제와 황후의 복식, 어떻게 변화했나」,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2010, 264~269쪽.
- ↑ 『高麗史』, 卷72, 「志輿服 1」, ‘1370년 5월 미상(음), 공민왕 19년’, “恭愍王 十九年五月: 太祖高皇帝, 賜遠遊冠七梁, 加金博山, 附蟬七首, 上施珠翠, 犀簪導. 絳紗袍, 紅裳, 白紗中單, 黑領靑緣袖, 裙, 襦, 紗蔽膝, 白假帶, 方心曲領, 紅革帶, 金鉤䚢, 白襪黑舃, 受群臣朝賀服之.”
- ↑ 『朝鮮王朝實錄』 「世宗 20年 10月4日」, “藝文大提學洪汝方齎勅及欽賜冠服, 回自京師, 上率百官迎勅如儀. 其勑曰: ‘今賜王遠遊冠服, 至可領也.’ 賜汝方鞍馬, 設宴慰之.”