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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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점의 편지에는 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畵師)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수신인 이진사는 박태보에게 [[조세걸]]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영정제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주선한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인명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f>유지복, 「[http://jsg.aks.ac.kr/cmm/fms/FileDown.do?fileSn=0&atchFileId=OLD_000000000001443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ref><br/> | 5점의 편지에는 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畵師)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수신인 이진사는 박태보에게 [[조세걸]]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영정제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주선한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인명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ref>유지복, 「[http://jsg.aks.ac.kr/cmm/fms/FileDown.do?fileSn=0&atchFileId=OLD_000000000001443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ref><br/>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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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간찰의 서체=== | ===간찰의 서체=== | ||
− | 이진사에게 보낸 5점의 간찰 중 2점은 유려한 행초로 | + | 이진사에게 보낸 5점의 간찰 중 2점은 유려한 행초로 씌어 있다. 아버지 [[박세당]]의 행초 필적에 비해 둥글게 돌아가는 원필세(圓筆勢)의 흐름이 더욱 돋보인다. 이를 외할아버지 [[윤선거]]와 사촌 [[박태상]]의 장인인 서화가 [[조속]]의 글씨와 비교하면 [[윤선거]]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조속]]의 깔끔하고 단아한 필치를 섞어놓은 듯한 운필을 보여 외가 쪽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서풍이 [[박태보]]의 글씨에 절충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ref>유지복, 「[http://jsg.aks.ac.kr/cmm/fms/FileDown.do?fileSn=0&atchFileId=OLD_000000000001443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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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8년 1월 11일 (목) 22:58 기준 최신판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 |
대표명칭 |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 |
---|---|
유형 | 간찰 |
저자 | 박태보 |
저술시기 | 1688년 |
시대 | 조선 |
수량 | 5점 |
표기문자 | 행초 |
목차
정의
박태보가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이다.
내용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은 실학자 서계 박세당(朴世堂)이 문인 이정신(李正臣)에게 써준 시문과 간찰을 모은 서첩[1]이다. 이 중 하첩에는 박태보(1654~1689) 명의로 보낸 간찰 6점이 실려 있다. 그 가운데 5점은 겉봉의 수신처가 ‘李進士’ 또는 ‘伯翼兄’이라 쓰여 있어 백익(伯翼)인 이진사에게 보낸 간찰임을 알 수 있다. 부친 박세당의 영정을 그리는 일과 관련한 내용을 보낸 것으로 추정되는 간찰로서 회화사적으로 주목을 받는 자료이다.[2]
간찰의 내용
5점의 편지에는 영정 제작에 들어가는 비용과 재료에 대한 구체적인 언급과 함께 영정을 그릴 화사(畵師)를 당시 명성이 있던 평양화가 조세걸(曺世傑, 1635~?)로 결정하려는 과정이 담겨있다. 그 내용에 따르면 수신인 이진사는 박태보에게 조세걸을 연결시켜주는 역할을 하며 영정제작에 관한 제반 사항을 주선한 인물로 보이는데, 그 인명이 명확하지 않은 점이 아쉬움으로 남는다.[3]
조세걸이 박세당에게 그림을 그려주는 등 두 사람은 20여 년에 걸쳐 인연이 깊었다. 해당 간찰에는 조세걸이 박세당의 야복본과 학창의를 입은 전신상 두 점을 그렸다고 쓰여 있는데, 반신상으로 그려진 박세당 초상 또한 조세걸의 작품으로 추정되고 있다.[4]
간찰의 서체
이진사에게 보낸 5점의 간찰 중 2점은 유려한 행초로 씌어 있다. 아버지 박세당의 행초 필적에 비해 둥글게 돌아가는 원필세(圓筆勢)의 흐름이 더욱 돋보인다. 이를 외할아버지 윤선거와 사촌 박태상의 장인인 서화가 조속의 글씨와 비교하면 윤선거의 호방하고 자유분방한 필치와 조속의 깔끔하고 단아한 필치를 섞어놓은 듯한 운필을 보여 외가 쪽으로부터 전승되어 온 서풍이 박태보의 글씨에 절충되어 있음을 여실히 보여준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 박태보 | A는 B가 썼다 | A dcterms:creator B |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 조세걸 | A는 B를 언급하였다 | A ekc:mentions B |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 박세당 초상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 박태보가 이 진사에게 보낸 간찰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 박세당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박태보 | 박세당 | A는 B의 아들이다 | A ekc:hasFather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행초로 쓰여진 간찰[6]
영상
주석
- ↑ 유지복,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12쪽.
- ↑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
- ↑ 윤진영, 「평양화사 조세걸의 도사활동과 화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248-257쪽.
- ↑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4쪽.
- ↑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25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논문
- 유지복, 「《西溪遺墨》을 통해 본 朴世堂家의 서풍」, 『藏書閣(장서각)』 제28호, 한국학중앙연구원, 2012.
- 윤진영, 「평양화사 조세걸의 도사활동과 화풍」, 『미술사의 정립과 확산』 1권, 사회평론, 2006.
- 웹 자원
- 유지복,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유지복, "박세당 필적 서계유묵",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김학수, 「《서계유묵》의 내용과 가치」, 『朴世堂의 西溪遺墨』,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