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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 =='''지식 관계망'''== |
2017년 12월 17일 (일) 21:00 기준 최신판
다리 (髢髻)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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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다리 |
---|---|
한자표기 | 髢髻 |
이칭별칭 | 다래(月乃), 월자(月子), 가체(加髢) |
구분 | 수식 |
착용신분 | 왕비, 왕세자빈, 왕세손빈, 외명부, 궁녀 |
착용성별 | 여성 |
정의
신라시대 이후 조선 말기까지 왕비, 왕세자빈 등의 왕실 여성 및 상류층 부녀자, 궁녀들이 착용한 머리꼭지로, 길게 땋은 머리 모양이다..[1]
내용
머리 모양을 크고 풍성하게 하기 위해 본인의 머리에 다른 사람의 머리카락이나 다른 소재를 덧붙일 수 있게 만든 머리꼭지이다. 조짐머리, 어여머리, 새앙머리 등 각종 머리모양에 따라 필요로 하는 다리의 양과 모양이 다르다. 이두를 써서 달이[月伊]·다래[月乃]라고도 하였다.[2]
다리[髢]가 유행하면서 사족(士族)의 부녀들은 많은 비용을 지불하면서까지 머리를 장식하였다. 이에 소용되는 비용이 점점 커지고, 사치스러워지자 영조는 1756년(영조 32)에 처음으로 사족 부녀가 다리[髢]를 사용하는 것을 금하고 족두리를 쓰게 하였다. 그래도 여전히 다리가 성행하자 영조는 1758년(영조 34)에 재차 다리[髢髻]의 사용을 금지하고 궁중의 양식[宮樣]인 족두리를 사용하라고 명령했다. 그러나 다리 금지령은 1763년(영조 39)에 철회되었다. 다리 대신 족두리를 사용하게 했지만, 족두리는 궁중의 양식인데다 족두리를 보석으로 장식하는 데 소요되는 비용이 다리와 맞먹었기 때문이었다. 이에 영조는 다시 다리[髢髻]의 사용은 허용하되 가체(加髢)는 금지하라고 명령하였다. 하지만 이 역시 지켜지지 않고 가체가 성행하자, 정조는 1788년(정조 12)에 또 다시 가체금지령을 내렸다. 정조는 가체를 금지시키고, 쪽진 머리와 머리에 쓰는 관으로는 족두리를 권장하였다. 이 금지령은 『가체신금사목(加髢申禁事目)』이라는 책자로 인쇄되어 전국에 배포되었다.[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왕비 | 다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자빈 | 다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왕세손빈 | 다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내명부 | 다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외명부 | 다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궁녀 | 다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일반 백성 | 다리 | A는 B를 착용하였다 | A ekc:wears B |
다리 | 홍장삼 | A는 B와 같이 착용하였다 | A ekc:goesWith B |
다리 | 가체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다리 | 가체신금사목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다리 | 의궤 | A는 B에 기록되어 있다 | A ekc:mentions B |
시간정보
공간정보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주석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241쪽.
- ↑ 국립고궁박물관, 『왕실문화도감』, 국립고궁박물관, 2013, 241쪽.
- ↑ 김문식,「18세기 서울 여성의 머리장식」, 『문헌과 해석』42, 문헌과 해석사, 2006, 38쪽.
- ↑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名選 下』, 단국대학교 출판부, 2005, 47쪽.
- ↑ "계변가화", 미술작품,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高美娟, 「韓國女性의 頭飾에 관한 硏究 -朝鮮時代를 中心으로-」,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3.
- 김아람, 「복식 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金正子, 「우리나라 女性의 髮樣에 대한 硏究 - 文獻과 遺物을 中心으로-」, 『服飾』6권, 한국복식학회, 1982.
- 박영미, 「조선 후기 가체 유행에 관한 연구」,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3.
- 박정균, 「조선시대 여인의 가체금지령 전ㆍ후 신분별 머리 모양분석-드라마 왕과 나, 이산을 중심으로-」, 한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朴貞植, 「朝鮮時代의 女子髮樣考察-中·後期操作方法-」, 『대한가정학회지』 제21권 3호, 대한가정학회, 1983.
- 宋昇姬, 「가체를 중심으로 한 조선후기 여성의 머리장식 연구 –신윤복의 풍속화를 중심으로-」, 충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4.
- 柳寶英, 「우리나라 女性의 쓰개에 관한 硏究-현존 유물을 중심으로-」, 원광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96.
- 李映周, 「조선시대 加髢변화에 관한 연구」, 동덕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0.
- 이은주, 「19세기 조선 왕실 여성의 머리모양」, 『服飾』 58권 3호, 한국복식학회, 2008.
- 임영자ㆍ조미영, 「조선후기 기녀의 머리형태가 일반여성의 머리 형태에 미친 영향」, 『服飾』 54권 3호, 한국복식학회, 2004.
- 張暎淳, 「朝鮮時代 以來 女性의 머리 型態變遷에 關한 史的 考察」, 계명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78.
- 최경순, 「조선조 加髢논의와 그 요인」, 『복식문화연구』 4권 1호, 복식문화학회, 1996.
- 崔民植, 「조선후기 내명부의 머리 양식 및 고찰」, 한남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