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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경임, 호는 우복으로 정여관의 아들이다. [[류성룡]]의 문인으로서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이다. 영남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 대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전형을 담당하고 양관대제학으로서 한 시대에 문명을 날리던 현달한 인물이었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3쪽.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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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86년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 [[홍문관]] 교리, [[승정원]] 좌승지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23년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 + | 1586년(조선 선조 19)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 [[홍문관]] 교리, [[승정원]] 좌승지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ref>김도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9920 정경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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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3년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의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김성일]]에게 차임되기도 하였다. 1609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火藥) | + |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의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김성일]]에게 차임되기도 하였다. 1609년(광해군 원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火藥)을 예년의 갑절로 매입하도록 병부(兵部)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써서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사행의 일을 기록한 [[연행만록]]에 포함된 「농강천표」가 2016년 장서각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ref>김도기,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9920 정경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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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정경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정경세의 영향력은 | + | 정경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이황-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정경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그는 학식, 문장과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류성룡의 사후에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류성룡]], [[김성일]], [[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한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4쪽. </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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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장승구, 「상주지역 퇴계학파(退溪學派)의 학문과 사상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철학과 경세론」,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0, No.-,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2, 1-30쪽. | ||
**지명원, 「우복 정경세 시문학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 **지명원, 「우복 정경세 시문학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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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분류 : 인물]] | + | [[분류:인물]] |
2017년 11월 25일 (토) 00:05 기준 최신판
정경세(鄭經世) | |
대표명칭 | 정경세 |
---|---|
한자표기 | 鄭經世 |
생몰년 | 1563-1633 |
본관 | 진주(晉州) |
호 | 우복(愚伏) |
자 | 경임(景任)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저서 | 우복집, 연행만록 |
부 | 정여관(鄭汝寬) |
모 | 정여관 처 합천 이씨 |
성격 | 문신 |
유형 | 학자 |
정의
정경세는 조선 후기 학자이다.
내용
생애
본관은 진주이며, 자는 경임, 호는 우복으로 정여관의 아들이다. 류성룡의 문인으로서 이황-류성룡-정경세로 이어지는 영남학통의 적전이다. 영남 남인으로서는 드물게 인조 대에 이조판서에 올라 일국의 전형을 담당하고 양관대제학으로서 한 시대에 문명을 날리던 현달한 인물이었다.[1]
관직활동
1586년(조선 선조 19) 알성문과에 을과(乙科)로 급제하여 승문원부정자에 임명되었다. 이후 예문관 검열, 홍문관 교리, 승정원 좌승지 등 청요직을 두루 역임하였다. 1623년(광해군 15)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자 3월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이후 대사헌, 이조판서, 대제학 등의 관직을 거치면서 인재를 널리 취하고 사론(士論)을 조정하여 국정에 심혈을 기울였다.[2]
대외활동
1593년(선조 26) 임진왜란이 발발했을 때에는 의병을 이끌고 전쟁에 참여하여 김성일에게 차임되기도 하였다. 1609년(광해군 원년) 동지사로 명나라에 갔으며, 이듬해 돌아와서는 화약(火藥)을 예년의 갑절로 매입하도록 병부(兵部)에 글을 올렸다. 이후 명나라와 교섭하여 그 수입에 힘써서 특지(特旨)로 가선대부(嘉善大夫)의 칭호를 받았다. 사행의 일을 기록한 연행만록에 포함된 「농강천표」가 2016년 장서각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3]
평가
정경세는 주자학 전반에 조예가 깊었지만 특히 예학에 정통하였다. 이황-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17세기 초반 중앙 정계와 영남학파에 미친 정경세의 영향력은 대단하였다. 그는 학식, 문장과 풍부한 정치적 경험을 바탕으로 류성룡의 사후에 영남남인의 구심점으로 활동하였다. 학문적으로는 이황-류성룡으로 이어지는 학통의 정맥으로서 흔히 이황의 3고제로 불리는 류성룡, 김성일, 정구 3인이 모두 사망한 1620년 이후에는 장현광과 더불어 영남학파의 대들보 역할을 하였다. .[4]
지식 관계망
- 학봉 김성일이 아내 안동권씨에게 보낸 편지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연행만록 | 정경세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류성룡 | 정경세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정경세 | 임진왜란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정경세 | 김성일 | A는 B와 교유하였다 | A foaf:knows B |
이황 | 류성룡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정경세 | 진주정씨 우복종택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586년 | 정경세가 문과에 급제하였다. |
1593년 | 정경세가 의병을 이끌고 임진왜란에 참여하였다. |
1609년 | 정경세가 동지사로 명나라에 다녀왔다. |
1623년 | 인조반정으로 정국이 변화하여 정경세가 홍문관 부제학에 제수되었다 |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3쪽.
- ↑ 김도기, "정경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도기, "정경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74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장승구, 「상주지역 퇴계학파(退溪學派)의 학문과 사상 ; 우복(愚伏) 정경세(鄭經世)의 철학과 경세론」, 『퇴계학과 유교문화』, Vol.50, No.-, 경북대학교 퇴계연구소, 2012, 1-30쪽.
- 지명원, 「우복 정경세 시문학 연구」, 단국대학교 대학원 석사학위논문, 199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