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혜"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ncyves Wiki
이동: 둘러보기, 검색
(내용)
(내용)
 
(사용자 2명의 중간 판 11개는 보이지 않습니다)
1번째 줄: 1번째 줄:
 
{{물품정보
 
{{물품정보
 
|사진= 한글팀_운혜_01.JPG
 
|사진= 한글팀_운혜_01.JPG
|사진출처=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사진출처=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2월 21일.
 
|대표명칭= 운혜
 
|대표명칭= 운혜
 
|한자표기= 雲鞋
 
|한자표기= 雲鞋
16번째 줄: 16번째 줄:
  
 
=='''정의'''==
 
=='''정의'''==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 무늬를 새긴 여자의 마른신. <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 무늬를 새긴 여자의 마른신이다. <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ref>
 +
 
 
=='''내용'''==
 
=='''내용'''==
[[운혜|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의 「[[예조상정상제|예조상정상제(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1446년 3월 「[[왕비상제|왕비상제(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2월 21일.</ref>
+
[[운혜|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태종 8)의 「[[예조상정상제|예조상정상제(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1446년(세종 28) 3월 「[[왕비상제|왕비상제(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ref>
 
===운혜 사용 기록===
 
===운혜 사용 기록===
『[[상방정례|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국혼정례|국혼정례(國婚定例) ]]』의 중궁전 의대와 왕비의 의대에는 흑웅피화와 온혜로 규정되어 있다. 고종 때 동궁 가례시 재간택 후 보낸 빈궁의대 발기에도 "뎍향직운혀 1부, 다홍근봉금단운혀 1부"의 기록이 있고, 왕자군 길례 발기에도 "다홍화단운혀"가 있어 이 운혜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2월 21일.</ref>
+
『[[상방정례|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국혼정례|국혼정례(國婚定例) ]]』의 중궁전 의대와 왕비의 의대에는 흑웅피화와 온혜로 규정되어 있다. 고종 때 동궁 가례시 재간택 후 보낸 빈궁의대 발기에도 "뎍향직운혀 1부, 다홍근봉금단운혀 1부"의 기록이 있고, 왕자군 길례 발기에도 "다홍화단운혀"가 있어 이 운혜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ref>
  
 
===운혜가 언급된 사료===
 
===운혜가 언급된 사료===
운혜·온혜는 『[[상방정례]]』와 『[[의대발기]]』에 같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종류의 신발을 지칭한다 하겠다. 조선 후기 [[신윤복|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에도 양반부인인 듯한 여인은 운혜를 신고 시종은 짚신을 신고 있다. 궁중을 비롯한 상류층 부인은 운혜나 당혜를 신고 서민이나 하류층은 짚신을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2월 21일.</ref>
+
운혜·온혜는 『[[상방정례]]』와 『[[의대발기]]』에 같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종류의 신발을 지칭한다 하겠다. 조선 후기 [[신윤복|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에도 양반부인인 듯한 여인은 운혜를 신고 시종은 짚신을 신고 있다. 궁중을 비롯한 상류층 부인은 운혜나 당혜를 신고 서민이나 하류층은 짚신을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ref> 조효순,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0414  운혜(雲鞋)]",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ref>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
* '''왕세자 가례 차비관 발기 지식관계망'''
 +
<html>
 +
<script>function reload() {window.location.reload();} </script>
 +
<input type="button" value="Graph" onclick="reload();">
 +
<iframe width="100%" height="670px" src="http://dh.aks.ac.kr/Encyves/Graph/A110/A110.ht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
</html>
 
===관계정보===
 
===관계정보===
{|class="wikitable sortable"
+
{|class="wikitable sortable" style="background:white; width:100%; text-align:center;"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56번째 줄: 63번째 줄:
  
 
==참고문헌==
 
==참고문헌==
*저서
+
 
 +
<!--
 +
*단행본
 
** 조효순, 「화제」, 『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 조효순, 「화제」, 『한국의 복식』, 한국문화재보호협회, 1982
 +
-->
  
 +
===더 읽을 거리===
 
*논문
 
*논문
** 이효선, 「일제강점기 고무신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5.
+
** 이효선, 「일제강점기 고무신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5.
** 김아람, 「복식 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전통의상학 전공, 석사학위논문, 2013.
+
** 김아람, 「복식 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전통의상학 전공 석사학위논문, 2013.
** 우경민, 「조선후기 여성 신체관과 기녀복식의 표현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의상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
** 우경민, 「조선후기 여성 신체관과 기녀복식의 표현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의상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 박현정, 「조선후기 기녀이미지를 응용한 신발디자인」, 동덕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의상디자인학과 의상디자인전공, 석사학위논문, 2008.
+
** 박현정, 「조선후기 기녀이미지를 응용한 신발디자인」, 동덕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의상디자인학과 의상디자인전공 석사학위논문, 2008.
  
 
[[분류:한글고문서]] [[분류:물품]]
 
[[분류:한글고문서]] [[분류:물품]]

2017년 11월 25일 (토) 04:49 기준 최신판

운혜(雲鞋)
조효순, "운혜",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2월 21일.
대표명칭 운혜
한자표기 雲鞋
시대 조선
용도 복식, 신발



정의

앞부리와 뒤꿈치에 구름 무늬를 새긴 여자의 마른신이다. [1]

내용

온혜(溫鞋)라고도 한다. 운혜의 기록이 처음 보이는 것은 1408년(태종 8)의 「예조상정상제(禮曹詳定喪制)」이다. 이에 의하면 궁중 상복에 정비(靜妃:太宗妃))·대비·숙빈은 백사혜(白絲鞋), 공주·옹주는 백피온혜(白皮溫鞋), 각전 시녀와 수사(水賜)는 백피혜(白皮鞋)로 규정하고 있다. 1446년(세종 28) 3월 「왕비상제(王妃喪制)」에 기록된 혜의 규정을 보면 졸곡 후 세자는 백피혜이고 시녀도 백피혜이다. 대궐 각차비인(各差備人)은 백운혜이며 졸곡 후에는 흑운혜이다. 대전 각차비인도 흑운혜이고 견마배(牽馬陪)는 운혜이다. 또한, 세종 때 명기로 혼전(魂殿)에 둔 복식의 발기를 보면 "분홍단자동화(粉紅段子同靴) 일", "분홍단자온혜 일"이라 기록되어 있다. 이로써 조선 초기부터 궁중에서 사용되었음을 알 수 있다.[2]

운혜 사용 기록

상방정례(尙方定例)』에도 세자 가례시 세자궁 빈궁의대에 자적향직화온혜(紫的鄕織花溫鞋)·흑웅피화온혜(黑熊皮花溫鞋), 대군 가례시 부인의 의복과 공주·옹주 가례시 의복에도 흑웅피화온혜로 규정하고 있음을 볼 수 있다. 영조 때 제정된 『국혼정례(國婚定例) 』의 중궁전 의대와 왕비의 의대에는 흑웅피화와 온혜로 규정되어 있다. 고종 때 동궁 가례시 재간택 후 보낸 빈궁의대 발기에도 "뎍향직운혀 1부, 다홍근봉금단운혀 1부"의 기록이 있고, 왕자군 길례 발기에도 "다홍화단운혀"가 있어 이 운혜는 조선 초기부터 조선말까지 궁중에서 신었음을 알 수 있다.[3]

운혜가 언급된 사료

운혜·온혜는 『상방정례』와 『의대발기』에 같이 쓰이고 있는 것으로 보아 한 종류의 신발을 지칭한다 하겠다. 조선 후기 신윤복(申潤福)의 풍속화에도 양반부인인 듯한 여인은 운혜를 신고 시종은 짚신을 신고 있다. 궁중을 비롯한 상류층 부인은 운혜나 당혜를 신고 서민이나 하류층은 짚신을 신었던 것으로 보인다.[4]

지식 관계망

  • 왕세자 가례 차비관 발기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운혜 가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운혜 발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운혜 왕세자 흉배 패물 발기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운혜 신윤복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운혜 온혜 A는 B에 해당한다 A dcterms:type B
예조상정상제 운혜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왕비상제 운혜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상방정례 온혜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국혼정례 온혜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의대발기 온혜 A는 B를 언급하였다 A ekc:mentions B

주석

  1.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
  2.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
  3.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
  4. 조효순, "운혜(雲鞋)",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02월 21일.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이효선, 「일제강점기 고무신에 관한 연구」, 이화여자대학교 대학원 의류학과 석사학위논문, 2015.
    • 김아람, 「복식 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대학원 전통의상학과 전통의상학 전공 석사학위논문, 2013.
    • 우경민, 「조선후기 여성 신체관과 기녀복식의 표현미」, 성균관대학교 일반대학원 의상학과 석사학위논문, 2012.
    • 박현정, 「조선후기 기녀이미지를 응용한 신발디자인」, 동덕여자대학교 디자인대학원 의상디자인학과 의상디자인전공 석사학위논문, 2008.