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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조선 중기의 무신·반란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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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중기 [[조선 인조|인조]] 대에 반란을 일으킨 무신이다.  
  
 
=='''내용'''==
 
=='''내용'''==
  병조참판 육(陸)후손이다. 선조 때 무과에 급제한 뒤 형조좌랑·태안군수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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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조반정]]주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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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은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ref>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5 이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22년([[조선 광해군|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조선 광해군|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였다.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ref>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5 이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면서 큰 공을 세웠다. 반정을 위해 거병하였을 때 장졸들이 동요하자 '[[이귀|이귀(李貴)]]가 병사(兵使)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무인 이괄의 역량은 반정 성공에 확실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ref>김태훈,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30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 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그러나 [[인조반정|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에 머물렀다.<ref>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5 이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해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이 되자 불만이 많았다.
 
 
 
1623년(인조 1) 포도대장을 지낸 뒤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영변에 출진해 군사 훈련에 힘쓰는 한편 그 지방의 성책(城柵)을 보수해 진의 방비를 엄히 하였다.
 
 
 
이는 당시 후금과의 국제 관계가 긴박해지면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해 윤10월 반정에 참가한 공신들의 공훈을 책정할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의 첫째가 되었다.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전(栴)·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어 서울에서 선전관과 의금부도사 등이 그의 군중(軍中)에 머물던 아들 전을 붙잡아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속한 행군으로 한때 서울을 점령, 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 대패해 피신 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괄 [李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ref>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5 이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Blockquote|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ㆍ군(郡)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br/>
 
[[나세]][[심덕부]]ㆍ[[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왜적이 포로로 잡은 자녀를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여서,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3백 30여 명만이 탈출하여 왔다. 죽음을 벗어난 적은 옥주(沃州)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利山)ㆍ영동(永同)현을 불태웠다.
 
|출처=『고려사절요』 31권,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294A_0320_010_0020&solrQ=query%E2%80%A0%EC%8B%AC%EB%8D%95%EB%B6%80%20%EC%B5%9C%EB%AC%B4%EC%84%A0$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8$solr_curPos%E2%80%A01$solr_solrId%E2%80%A0BD_ITKC_BT_1294A_0320_010_0020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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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의 난]]을 일으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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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은 1623년([[조선 인조|인조]] 1) 당시 변방에 병란의 조짐이 있다고 하여 도원수(都元帥) [[장만|장만(張晩)]]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에 머물게 되었다. 같은 해 윤10월 [[인조반정]] 때 공이 많았음에도 반정모의에 뒤늦게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정사공신(1623년)|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부하 [[이수백|이수백(李守白)]], [[기익헌|기익헌(奇益獻)]] 등과 모의하여 1624년 1월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조선 인조|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8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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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지만 그날 안령(鞍嶺: 현 무악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한밤중에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광희문|광희문(光熙門)]]을 통해 경기도 이천(利川)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음력 2월 14일)에 경안역(慶安驛) 부근에서 [[한명련]]과 함께 부하 장수인 [[이수백]]ㆍ[[기익헌]]에게 살해되었다.<ref>"[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5851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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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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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37/C037.htm '''"백마산성을 지킨 임경업장군"(신영상)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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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절요』 31권,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1294A_0320_010_0020&solrQ=query%E2%80%A0%EC%8B%AC%EB%8D%95%EB%B6%80%20%EC%B5%9C%EB%AC%B4%EC%84%A0$solr_sortField%E2%80%A0%EA%B7%B8%EB%A3%B9%EC%A0%95%EB%A0%AC_s%20%EC%9E%90%EB%A3%8CID_s$solr_sortOrder%E2%80%A0$solr_secId%E2%80%A0BT_AA$solr_toalCount%E2%80%A08$solr_curPos%E2%80%A01$solr_solrId%E2%80%A0BD_ITKC_BT_1294A_0320_010_0020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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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8쪽.
 
# 웹 자원
 
# 웹 자원
#* 민병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1388 나세]",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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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하현강,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3665 이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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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태훈,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30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 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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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s://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55851 이괄의 난]", <html><online style="color:purple">『doopedia』<sup>online</sup></online></html>, 두산백과.
  
 
[[분류:민족기록화]][[분류:인물]]
 
[[분류:민족기록화]][[분류:인물]]
[[분류:민족/교열요청]]
 

2017년 11월 27일 (월) 09:22 기준 최신판

이괄(李适)
민족 일러 조선장군.png
대표명칭 이괄
한자표기 李适
본관 고성(固城)
백규(白圭)
출생지 1587년
사망지 1624년
시대 조선
국적 조선
대표직함 형조좌랑, 함경북도병마절도사
성격 무신


정의

조선 중기 인조 대에 반란을 일으킨 무신이다.

내용

인조반정의 주역

이괄은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1]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하였다. 1623년 3월의 인조반정[2]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면서 큰 공을 세웠다. 반정을 위해 거병하였을 때 장졸들이 동요하자 '이귀(李貴)가 병사(兵使)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무인 이괄의 역량은 반정 성공에 확실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3]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에 머물렀다.[4]

이괄의 난을 일으키다

이괄은 1623년(인조 1) 당시 변방에 병란의 조짐이 있다고 하여 도원수(都元帥) 장만(張晩)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에 머물게 되었다. 같은 해 윤10월 인조반정 때 공이 많았음에도 반정모의에 뒤늦게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부하 이수백(李守白), 기익헌(奇益獻) 등과 모의하여 1624년 1월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다.[5]
하지만 그날 안령(鞍嶺: 현 무악재)에서 벌어진 전투에서 장만이 이끄는 토벌군에 크게 패하여 한밤중에 남은 병사들을 이끌고 광희문(光熙門)을 통해 경기도 이천(利川) 방면으로 퇴각하였다. 그리고 4월 1일(음력 2월 14일)에 경안역(慶安驛) 부근에서 한명련과 함께 부하 장수인 이수백기익헌에게 살해되었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이괄 인조반정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시백 인조반정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괄 정사공신(1623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인조반정 이괄의 난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이괄 이괄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임경업 이괄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장만 이괄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한명련 이괄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시백 이괄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수백 이괄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기익헌 이괄의 난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이괄 이수백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A edm:isRelatedTo B
이괄 기익헌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A edm:isRelatedTo B
한명련 이수백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A edm:isRelatedTo B
한명련 기익헌 A는 B에 의해 죽임을 당했다 A edm:isRelatedTo B
이괄의 난 정묘호란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임경업 정묘호란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1.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김태훈, "이괄의 난", 『한국사 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5.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8쪽.
  6. "이괄의 난", 『doopedia』online, 두산백과.
  7.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8. 그 내용은 당나라 때 신선(神仙)을 매우 좋아했던 고변(高騈)의 〈보허사(步虛詞)〉에, "청계산 도사를 사람들은 알지를 못하니, 하늘을 오르내리는 학 한 마리뿐이로다. 동굴 문 깊이 잠기고 푸른 창은 춥기만 한데, 이슬방울로 주묵 갈아 주역에 권점 찍노라.(靑溪道士人不識 上天下天鶴一隻 洞門深鎖碧窓寒 滴露硏朱點周易)"로 추정된다. - 번역문 출처 : 임정기(역), "즉사(卽事)", 고전번역서,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도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8쪽.
  2. 웹 자원
    •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태훈, "이괄의 난", 『한국사 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 "이괄의 난", 『doopedia』online, 두산백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