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례도감"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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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도청: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 부 책임자급인 제조(提調), 실무 관리자급인 도청(都廳). | + | * 도청: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 부 책임자급인 제조(提調), 실무 관리자급인 도청(都廳)을 둔다. |
− | * 일방, 이방, 삼방: 낭청(郎廳)과 감조관(監造官)을 두어 실무를 | + | * 일방, 이방, 삼방: 낭청(郎廳)과 감조관(監造官)을 두어 실무를 담당하고 감독·관리한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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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일반적으로 정1품에 해당하는 [[도제조|도제조(都提調)]]가 1명, 정2품에 해당되는 [[제조|제조(提調)]]가 3명, [[정사|정사(正使)]](정1품) 1명, [[부사|부사(副使)]](정2품) 1명, [[도청|도청(都聽)]](정3~5품) 2명, [[낭청|낭청(郞聽)]](정5~6품) 6명, [[감조관|감조관(監造官)]](정9품) 6명, [[전교관|전교관(傳敎官)]](승지) 1명, [[장축자|장축자(掌畜者:掌苑署別提)]] 1명, [[장차자|장차자(掌次者:典設司官員)]]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밖에 산원(算員) | + | 일반적으로 정1품에 해당하는 [[도제조|도제조(都提調)]]가 1명, 정2품에 해당되는 [[제조|제조(提調)]]가 3명, [[정사|정사(正使)]](정1품) 1명, [[부사|부사(副使)]](정2품) 1명, [[도청|도청(都聽)]](정3~5품) 2명, [[낭청|낭청(郞聽)]](정5~6품) 6명, [[감조관|감조관(監造官)]](정9품) 6명, [[전교관|전교관(傳敎官)]](승지) 1명, [[장축자|장축자(掌畜者:掌苑署別提)]] 1명, [[장차자|장차자(掌次者:典設司官員)]]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밖에 산원(算員)ㆍ녹사(錄事)ㆍ서리(書吏)ㆍ서사(書寫)ㆍ고직(庫直)ㆍ사령(使令) 등이 더 임명되었다. 보통 [[도제조]]는 삼정승 중에서 임명되었고, [[제조]] 중 2명은 예조판서와 호조판서가 당연직으로 선임되었다. [[왕세손]]의 [[가례]] 때에는 [[도제조]]가 없고 [[제조]]만 2명으로 구성되며, [[낭청]]은 3명으로 준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1054489&cid=40942&categoryId=31667 가례도감]", 두산백과,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 네이버.</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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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일 (목) 22:36 기준 최신판
가례도감(嘉禮都監) | |
대표명칭 | 가례도감 |
---|---|
한자표기 | 嘉禮都監 |
이칭 | 가례색(嘉禮色) |
창립시대 | 조선 |
창립일 | 1397년 최초 설치 |
해체일 | 1906년 |
주요업무 | 왕과 왕세자의 혼례식 주관 |
담당업무 | 가례(嘉禮) |
관련기관 | 예조 |
정의
조선시대 왕과 왕세자의 혼례식을 주관하기 위하여 설치되었던 임시 관서이다.
내용
업무
조선시대에 국가의 가례행사에 관계되는 일을 전담하기 위해 임시로 설치한 기구로, 가례가 종료되면 가례도감은 곧 의궤청(儀軌廳)으로 바뀐다. 의궤청(儀軌廳)은 의궤 편찬업무를 시작하고, 의궤를 완성하면 역할이 마무리된다. 1397년(태조 6) 10월 왕세자 이방석(李芳碩)의 혼례를 위해 가례도감을 설치한 것이 효시가 되었다. 본부인 도청(都廳)에서 업무를 총괄하고, 세부 업무는 실무부서인 일방(一房), 이방(二房), 삼방(三房)에서 나눠서 분담한다. 왕자나 공주, 옹주 등의 혼례 때는 가례청(嘉禮廳)을 설치한다.[1]
- 도청: 총 책임자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 부 책임자급인 제조(提調), 실무 관리자급인 도청(都廳)을 둔다.
- 일방, 이방, 삼방: 낭청(郎廳)과 감조관(監造官)을 두어 실무를 담당하고 감독·관리한다.
구성
일반적으로 정1품에 해당하는 도제조(都提調)가 1명, 정2품에 해당되는 제조(提調)가 3명, 정사(正使)(정1품) 1명, 부사(副使)(정2품) 1명, 도청(都聽)(정3~5품) 2명, 낭청(郞聽)(정5~6품) 6명, 감조관(監造官)(정9품) 6명, 전교관(傳敎官)(승지) 1명, 장축자(掌畜者:掌苑署別提) 1명, 장차자(掌次者:典設司官員) 등으로 구성되었다. 이 밖에 산원(算員)ㆍ녹사(錄事)ㆍ서리(書吏)ㆍ서사(書寫)ㆍ고직(庫直)ㆍ사령(使令) 등이 더 임명되었다. 보통 도제조는 삼정승 중에서 임명되었고, 제조 중 2명은 예조판서와 호조판서가 당연직으로 선임되었다. 왕세손의 가례 때에는 도제조가 없고 제조만 2명으로 구성되며, 낭청은 3명으로 준다.[2]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가례도감 | 가례 | A는 B를 담당하였다 | A ekc:administrates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경종단의왕후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효장세자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철종철인왕후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가례도감 의궤청(儀軌廳) | 순종순정황후가례도감의궤 | A는 B를 간행하였다 | A dcterms:publisher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38년 | 인조장렬왕후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651년 | 현종명성왕후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681년 | 숙종인현왕후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696년 | 경종단의왕후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727년 | 효장세자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744년 | 사도세자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759년 | 영조정순왕후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851년 | 철종철인왕후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1906년 | 순종순정황후가례도감의궤를 편찬하였다 |
주석
참고문헌
- 국립고궁박물관, 『국역 황태자가례도감의궤』, 예맥, 2015
- 권오영 외, 『조선 왕실의 嘉禮』,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 김문식, 「1823년 明溫公主의 가례 절차」, 『조선시대사학보』 56, 조선시대사학회, 2011.
- 김문식, 신병주 지음, 『조선 왕실 기록문화의 꽃, 의궤』, 돌베개, 2005.
- 김선아, 「조선시대 치마ㆍ저고리 배색 특성에 관한 고찰-『嘉禮都監儀軌를 중심으로」, 『한국색채학회 논문집』 22권 1호, 한국색채학회, 2008.
- 김아람, 「복식고증을 통한 복온공주 혼례 친영반차도 구현」, 단국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12.
- 김정진, 「朝鮮時代 『嘉禮都監儀軌』에 나타난 班次圖의 構造的 硏究」, 숙명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1988.
- 백영자․김정진, 「조선시대 『嘉禮都監儀軌』의 班次圖에 나타난 服飾 연구」, 『韓國衣類學會誌』 14권 2호, 한국의류학회, 1990.
- 신명호, 『조선의 왕』, 가람기획, 2000.
- 신명호, 『조선 왕실의 의례와 생활, 궁중문화』, 돌베개, 2002.
- 신병주, 『66세의 영조 15세 신부를 맞이하다』, 효형출판, 2001.
- 신병주, 박례경 외 2명 저, 『왕실의 혼례식 풍경 (조선 왕실의 행사 2)』, 돌베개, 2013.
- 신순자, 「『嘉禮都監儀軌』에 나타난 唐衣에 대한 고찰」, 석사학위논문, 세종대학교1989.
- 심승구, 「조선시대 왕실혼례의 추이와 특성」, 『朝鮮時代史學報』 41, 조선시대 사학회, 2007.
- 유송옥, 「조선왕조시대 가례도감의궤와 그에 나타난 복식」, 『大東文化硏究』 20, 성균관대학교 동아시아학술원, 1986.
- 유송옥, 『朝鮮王朝 宮中儀軌服飾』 , 1991.
- 이경자, 「『嘉禮都監儀軌』의 服飾 硏究」, 『服飾』 1권, 한국복식학회. 1977.
- 이욱, 「『덕온공주가례등록』을 통해 본 덕온공주 가례 절차」, 『한국복식』 30,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12.
- 이욱, 「조선후기 後宮 嘉禮의 절차와 변천-慶嬪 金氏 嘉禮를 중심으로」, 『장서각』 19, 한국학중앙연구원, 2008.
- 이은주, 「『덕온공주가례등록』을 통해 본 공주가례복식」, 『한국복식』 30, 단국대학교 석주선기념박물관, 2012.
- 이주미, 「『연잉군가례등록』에 나타난 왕자가례의 절차와 복식」, 이화여자대학교 석사학위논문, 2009.
- 임민혁, 「조선시대 『謄錄』을 통해 본 왕비의 親迎과 권위」, 『韓國史學史學報』 25, 한국사학사학회, 2012.
- 임민혁, 『조선국왕 장가보내기』, 글항아리, 2017.
- 조미나, 「조선왕조 『가례도감의궤』에 나타난 궁녀의 직무에 따른 복식 연구」, 성신여자대학교 박사학위논문, 2012.
- 최경순, 「嘉禮都監儀軌에 나타난 가례복식의 실태에 관한 연구」, 『韓國衣類學會誌』 15권 1호, 한국의류학회, 1991.
- 최연우, 『면복』, 문학동네, 2015.
더 읽을거리
- 신병주, '가례도감(嘉禮都監)',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