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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때 궁녀들과 난행(亂行)하고 또 공주와 사통한다는 추문이 외부에 자자하였으므로 우사간(右司諫) [[최선|최선(崔詵)]]이 소를 올려 간하자 왕은 형제간을 이간한다고 하여 최선을 파면하였다. 그 뒤 직언을 하는 자는 없어지고 그에게 아부하여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ref>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270 충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그 때 궁녀들과 난행(亂行)하고 또 공주와 사통한다는 추문이 외부에 자자하였으므로 우사간(右司諫) [[최선|최선(崔詵)]]이 소를 올려 간하자 왕은 형제간을 이간한다고 하여 최선을 파면하였다. 그 뒤 직언을 하는 자는 없어지고 그에게 아부하여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ref>이종익,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58270 충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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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17:43 기준 최신판
충희(冲曦) | |
대표명칭 | 충희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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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冲曦 |
정의
고려 중기의 승려.
내용
의종의 아우인 현오국사(玄悟國師)으로부터 득도(得度)하였다. 1178년 흥왕사(興王寺)에 있을 때 승려들과 역모를 모의한다는 밀고가 있어 조사를 받았으나 사실이 아님이 밝혀졌다. 1180년에 태후가 유종(乳腫)이 생겨 그를 불러 시탕(侍湯)하게 하였다. 그 때 궁녀들과 난행(亂行)하고 또 공주와 사통한다는 추문이 외부에 자자하였으므로 우사간(右司諫) 최선(崔詵)이 소를 올려 간하자 왕은 형제간을 이간한다고 하여 최선을 파면하였다. 그 뒤 직언을 하는 자는 없어지고 그에게 아부하여 공공연히 뇌물을 주고받게 되었다. 글씨를 잘 썼다고 한다.[1]
지식 관계망
-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종린 | 충희 | A는 B의 스승이다 | A ekc:hasDisciple B |
충희 | 개성 흥왕사 | A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참고문헌
- 이종익, "충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