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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 =='''정의'''== | ||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 | + |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이다. |
=='''내용'''== | =='''내용'''== | ||
+ | ===[[경복궁]]의 역사=== | ||
+ | ====큰 복을 도우리라==== | ||
+ |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조선 정종|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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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거듭된 화재==== | ||
+ | 제3대 [[조선 태종|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태종]]은 궁내에 [[경복궁 경회루|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다. [[조선 세종|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경복궁 강녕전]] 외에 [[경복궁 교태전|교태전(交泰殿)]]·[[경복궁 연생전]]·[[경복궁 흠경각]]·[[경복궁 사정전|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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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그리고 [[조선 선조|선조]]는 복구의 의지가 있었으나 전란 이후라 상황은 안좋았고 결국 [[창덕궁]]을 재건하여 궁으로 사용하였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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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주인 잃은 빈 궁궐==== | ||
+ |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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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경복궁 교태전]]·[[경복궁 강녕전]]·[[경복궁 동행각]]·[[경복궁 서행각]]등 여러 건물을 이전하고 총독부청사와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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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 복원 정비 사업==== | ||
+ |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총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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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경복궁]]이 자리를 잡은 위치와 풍수에 대해서=== | ||
+ |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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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역사=== | ===[[경복궁]]의 역사=== | ||
====조선 전기 [[경복궁]]의 연혁==== | ====조선 전기 [[경복궁]]의 연혁==== | ||
− |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근정전|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천랑(穿廊)]]·[[각루|각루(角樓)]]·[[강녕전|강녕전(康寧殿)]] 7칸, [[연생전|연생전(延生殿)]] 3칸, [[경성전|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 + |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이 당시 궁의 규모는 390여 칸으로 크지 않았다. 정전(正殿)인 [[경복궁 근정전|근정전(勤政殿)]] 5칸에 상하층 [[월대|월대(月臺)]]와 [[행랑]]·[[근정문]]·[[천랑|천랑(穿廊)]]·[[각루|각루(角樓)]]·[[강녕전|강녕전(康寧殿)]] 7칸, [[경복궁 연생전|연생전(延生殿)]] 3칸, [[경복궁 경성전|경성전(慶成殿)]] 3칸, 왕의 평상시 집무처인 [[보평청|보평청(報平廳)]] 5칸 외에 상의원·중추원·[[삼군부|삼군부(三軍府)]] 등이 마련되었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조선 정종|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으나, 제3대 [[조선 태종|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태종]]은 궁내에 [[경복궁 경회루|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는데, 연못을 넓게 파고 장대한 누각을 지어 임금과 신하가 모여 잔치를 하거나 사신을 접대하도록 하였으며, 파낸 흙으로는 침전 뒤편에 [[아미산|아미산(蛾眉山)]]이라는 동산을 만들었다. [[조선 세종|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으며, [[경회루]] 남쪽에 시각을 알리는 [[보루각|보루각(報漏閣)]]을 세우고 궁 서북 모퉁이에 천문관측시설인 [[간의대|간의대(簡儀臺)]]를 마련하였으며, [[경복궁 강녕전]] 서쪽에는 [[흠경각|흠경각(欽敬閣)]]을 짓고 그 안에 시각과 사계절을 나타내는 [[옥루기|옥루기(玉漏器)]]를 설치하였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경복궁 강녕전]] 외에 [[경복궁 교태전|교태전(交泰殿)]]·[[경복궁 연생전]]·[[경복궁 흠경각]]·[[사정전|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임진왜란]] 시기 전소된 [[경복궁]]==== | ====[[임진왜란]] 시기 전소된 [[경복궁]]==== | ||
− |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조선 선조|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 + | 그러나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궁의 복구 문제는 왜란 직후부터 논의되었으나 실천에 옮겨지지는 못하였다. [[조선 선조|선조]]는 환도한 뒤 [[경복궁]]에 가가(假家)라도 지을 것을 명하였고, 1606년에는 [[궁궐영건도감|궁궐영건도감(宮闕營建都監)]]을 설치하고 [[광화문]]과 [[경복궁 근정전]] 등 주요건물만이라도 우선 지을 계획을 세웠으나, 일부 대신들이 '공사가 커서 1, 2년에 끝낼 수 없으므로 후에 일을 시작해야 한다'며 만류하자 실행에 옮기지 못하였다. 여기에다 [[경복궁]]이 길(吉)하지 못하다는 의견도 있어서 결국 왜란 후 [[경복궁]] 대신에 [[창덕궁]]을 재건하기에 이르렀다. 이것은 과거 [[경복궁]]에서 [[조선 단종|단종]]이 쫓겨난 일이 있고 [[조선 중종|중종]] 때에는 [[조광조|조광조(趙光祖)]]가 [[경복궁 사정전]] 뜰에서 왕의 친국(親鞫)에 이어 사약을 받은 일 등이 작용하였던 것으로 보인다. 이후 [[광해군]]도 한때 [[경복궁]]성을 수축케 하고 중건의 뜻을 보이기도 하였으나 결국 실현되지 못하였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경복궁]] 중건 되었으나 다시 주인을 잃다==== | ====[[경복궁]] 중건 되었으나 다시 주인을 잃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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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제식민지 지배 시기 [[경복궁]]을 일본이 없애려 하다==== | ====일제식민지 지배 시기 [[경복궁]]을 일본이 없애려 하다==== | ||
− |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교태전]]·[[강녕전]]·[[동행각]]·[[서행각]]·[[연길당|연길당(延吉堂)]]·[[경성전]]·[[연생전]]·인지당(麟趾堂)·[[흠경각]]·[[함원전|함원전(含元殿)]]·[[만경전|만경전(萬慶殿)]]·[[흥복전|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대조전]]·[[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근정전]]·[[사정전]]·[[수정전|수정전(修政殿)]]·[[천추전|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경복궁 교태전]]·[[경복궁 강녕전]]·[[경복궁 동행각]]·[[경복궁 서행각]]·[[경복궁 연길당|연길당(延吉堂)]]·[[경복궁 경성전]]·[[경복궁 연생전]]·인지당(麟趾堂)·[[경복궁 흠경각]]·[[경복궁 함원전|함원전(含元殿)]]·[[경복궁 만경전|만경전(萬慶殿)]]·[[경복궁 흥복전|흥복전(興福殿)]] 등을 철거하여 그 재목으로 [[창덕궁]]의 [[창덕궁 대조전]]·[[창덕궁 희정당]] 등을 지었다. 궁전 안에는 겨우 [[경복궁 근정전]]·[[경복궁 사정전]]·[[경복궁 수정전|수정전(修政殿)]]·[[경복궁 천추전|천추전(千秋殿)]]·[[집옥재]]·[[경복궁 경회루]] 등과 [[근정문]]·[[홍례문]]·[[신무문|신무문(神武門)]]·[[동십자각]] 등이 남게 되었으며 정문인 [[광화문]]도 [[건춘문]] 북쪽으로 이건하였다. 또한, 궁의 중심건물인 [[경복궁 근정전]] 정면 앞에 매우 큰 석조건물인 총독부청사를 지어 [[경복궁 근정전]]을 완전히 가려 버렸다. 이 밖에 [[경복궁 자선당]] 자리에도 석조건물이 들어서고 건청궁(乾淸宮) 자리에는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광복이후 [[경복궁]] 복구과정==== | ====광복이후 [[경복궁]] 복구과정====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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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 이전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 === | ===근대 이전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 === | ||
− |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문|건춘(建春)]]·[[영추문|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회루]]가 있는데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를 보면 궁 앞면에 [[광화문]]이 있고 동·서쪽에 [[건춘문|건춘(建春)]]·[[영추문|영추(迎秋)]]의 두 문이 있으며 북쪽에 [[신무문]]이 있다. 궁성 네 귀퉁이에는 [[각루]]가 있다. [[광화문]] 안에는 [[흥례문]]이 있고 그 안에 개천(開川) 어구(御溝)가 있어 서쪽에서 동쪽으로 흘러나간다. 어구에 돌다리인 금천교(禁川橋), 곧 영제교(永濟橋)가 놓여 있고 다리를 건너면 [[근정문]]이 있으며 문을 들어서면 정전인 [[경복궁 근정전]]이 이중으로 높이 쌓은 월대 위에 우뚝 솟아 있다. [[경복궁 근정전]] 뒤의 사정문을 들어서면 왕이 정사를 보는 곳인 [[경복궁 사정전]]이 있고 그 동·서쪽에 만춘전(萬春殿)·[[천추전]]이 모두 남향으로 놓여 있다. [[경복궁 사정전]] 뒤 향오문(嚮五門)을 들어서면 정면에 연침(燕寢)인 [[경복궁 강녕전]]이 있고 그 앞 동서 양쪽에 [[연생전]]·[[경복궁 경성전]]이 있다. [[강녕전]] 뒤에는 양의문(兩儀門)이 있고 문 안에 왕비가 거처하는 [[경복궁 교태전]]이 있으며 잇대어서 동쪽에 원길헌(元吉軒)·서쪽에 함광각(含光閣)·동북쪽에 건순각(健順閣)이 있다. 그 뒤로는 후원이 전개되어 소나무가 우거지고 연못·정자 등이 여기저기 자리 잡고 있다. [[흥례문]]으로부터 이곳까지에는 동서로 낭무(廊廡)가 각 건물을 둘러싸고 있다. 이밖에 궁 서쪽에 [[경복궁 수정전]]이 있고 그 위에 [[경복궁 경회루]]가 있는데 [[경복궁 수정전]]은 의정부 청사로 쓰였던 곳이며, [[경복궁 경회루]]는 임금과 신하들이 모여 잔치를 베풀던 곳이다. 또한 [[건춘문]]과 [[영추문]] 안에도 수많은 건물들이 들어차 있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 | ===현재 남아있는 [[경복궁]]의 주요건물 위치=== | ||
− |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근정문]]·[[근정전]]·[[사정전]]·[[천추전]]·[[수정전]]·[[자경전]]·[[경회루]]·[[재수각]]·[[함화당]]·[[향원정]]·[[집옥재]]·[[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강녕전]]·[[자선당]]·[[태원전]]·[[광화문]] 등이다.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자경전(보물 제809호)]]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십장생(十長生)무늬가 특히 주목된다(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 보물 제810호).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굴뚝(경복궁 아미산 의굴뚝, 보물 제811호)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風旗臺)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847호).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 현재 궁내에 남아 있는 주요건물은 [[경복궁 근정문]]·[[경복궁 근정전]]·[[경복궁 사정전]]·[[경복궁 천추전]]·[[경복궁 수정전]]·[[경복궁 자경전]]·[[경복궁 경회루]]·[[경복궁 재수각]]·[[경복궁 함화당]]·[[경복궁 향원정]]·[[경복궁 집옥재]]·[[경복궁 선원전]] 등이며, 복원된 건물은 [[경복궁 강녕전]]·[[경복궁 자선당]]·[[경복궁 태원전]]·[[광화문]] 등이다. [[근정전(국보 제223호)은 조선왕조 정궁의 정전답게 중층의 정면 5칸, 측면 5칸의 장대한 건물이며 건물의 양식은 조선 말기에 속하여 세부의 장식적 처리가 두드러진다. [[근정문]](보물 제812호)은 정면 3칸의 중층지붕건물이다. [[근정문]] 좌우로는 [[행각|행각(行閣)]]이 연결되어 [[경복궁 근정전]]을 둘러싸고 있다. [[경복궁 경회루]](국보 제224호)는 정면 7칸, 측면 5칸의 장대한 누각 건물로 하층은 네모진 돌기둥을 세우고 상층에는 사방에 난간을 두르고 나무기둥을 세웠다. 주변에는 네모난 큰 연못을 파고 우측면에 세 개의 돌다리를 놓았다. 누각 건물로는 현재 국내에서 제일 큰 규모에 속한다. [[경복궁 향원정]]은 육각형 평면을 한 정자로 연못의 한가운데에 있으며 목조구름다리가 연결되어 있다. [[경복궁 자경전|자경전(보물 제809호)]]은 침전건물의 하나인데, 이 건물에는 후원의 담장과 굴뚝에 묘사된 십장생(十長生)무늬가 특히 주목된다(경복궁자경전십장생굴뚝, 보물 제810호). [[사정전]] 북쪽에 있는 [[아미산]]은 여러 단의 화계(花階)와 그 사이의 나무·괴석 등이 눈길을 끌며 전체적으로 사철의 변화에 따른 조화를 보여 주는 한국식 정원 모습을 간직하고 있다. 여기에도 봉황·귀면·당초문 등을 새긴 육각 화문(花文) 장식의 굴뚝(경복궁 아미산 의굴뚝, 보물 제811호)이 있다. 이밖에 18세기에 만든 바람의 방향과 강도를 측정하는 기기인 풍기대(風旗臺)가 보물로 지정되어 있다(보물 제847호). [[국립중앙박물관]]이 [[경복궁]]에 있을 때는 [[경천사십층석탑]]을 비롯한 국보·보물로 지정된 석조물들이 야외에 전시되어 있었으나 용산에 새로 지어진 국립중앙박물관으로 대부분 옮겨져서 현재는 법천사지광국사현묘탑(法泉寺智光國師玄妙塔) 등 일부만 남아 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경복궁]]이 자리를 잡은 위치와 풍수에 대해서=== | ===[[경복궁]]이 자리를 잡은 위치와 풍수에 대해서=== | ||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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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 *논문 | ||
− | **박진훈, 「景福宮에 투영된 조선초기의 理想的 國政運營體系」, | + | **박진훈, 「景福宮에 투영된 조선초기의 理想的 國政運營體系」, 『역사와실학』Vol-60, 역사실학회, 2016, 33-66쪽. |
− | **金昌俊, 「일제 강점기의 경복궁(景福宮)훼손과 복원사업」, 『문화재』 | + | <!-- |
− | + | **金昌俊, 「일제 강점기의 경복궁(景福宮)훼손과 복원사업」, 『문화재』 Vol-30, 1997, 61-77쪽. | |
− | + | --> | |
− | *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웹자원 |
+ | **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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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02:37 기준 최신판
경복궁 (景福宮) |
|
대표명칭 | 경복궁 |
---|---|
한자표기 | 景福宮 |
이칭 | 북궐(北闕) |
유형 | 유적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번호 | 사적 제117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이다.
내용
경복궁의 역사
큰 복을 도우리라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다.[1]
거듭된 화재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경복궁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경복궁 연생전·경복궁 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2]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그리고 선조는 복구의 의지가 있었으나 전란 이후라 상황은 안좋았고 결국 창덕궁을 재건하여 궁으로 사용하였다.[3]
주인 잃은 빈 궁궐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4]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경복궁 교태전·경복궁 강녕전·경복궁 동행각·경복궁 서행각등 여러 건물을 이전하고 총독부청사와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5]
경복궁 복원 정비 사업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총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6]
경복궁이 자리를 잡은 위치와 풍수에 대해서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7]
지식 관계망
- 명성황후 상존호옥책문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경복궁 | 경복궁 근정전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집현전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조선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정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태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선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단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광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흥선대원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을미사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명성황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명성황후 | 명성황후 상존호옥책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95년 | 경복궁이 창건되었다 |
1455년 | 조선 단종이 경복궁에서 쫓겨났다 |
1519년 | 조광조는 경복궁에서 죽었다 |
1592년 |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전소되었다 |
1867년 |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
1895년 | 을미사변이 경복궁에서 일어났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962 | 126.977028 | 경복궁이 위치한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진훈, 「景福宮에 투영된 조선초기의 理想的 國政運營體系」, 『역사와실학』Vol-60, 역사실학회, 2016, 33-66쪽.
- 웹자원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김동현, "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