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중기록화관 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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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황제]]가 착용하는 관으로, 우리나라에서는 대한제국시기에 황제로 등극한 [[고종]]과 [[순종]]이 [[조복]]을 입을 때 썼던 관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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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가 착용하는 관으로, [[고종]]과 [[순종]]이 [[황제의 조복]]을 입을 때 착용하였다.
  
 
=='''내용'''==
 
=='''내용'''==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후 신하들에게 점령국 군주의 관을 나눠주었는데, 이때 [[통천관]]은 황제의 [[조복]]에 착용했다고 한다.<ref>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35~36쪽.</ref> 어원은 ‘하늘과 통하는 관’이라고 글자 그대로 풀기도 하지만, 전거는 찾을 수 없어 불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후 신하들에게 점령국 군주의 관을 나눠주었는데, 이때 [[통천관]]은 황제의 [[조복]]에 착용했다고 한다.<ref>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35~36쪽.</ref> 어원은 ‘하늘과 통하는 관’이라고 글자 그대로 풀기도 하지만, 전거는 찾을 수 없어 불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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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은 곧고 정수리 부분에서 약간 기울어져 뒷면 아래로 곧게 내리 뻗었다. 철로 [[양]]을 만들었으며 앞에는 [[전통|전통(展筩)]]이 있고 관의 앞부분에는 얇은 금으로 만든 넓은 산모양의 장식을 더했다.<ref>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황제제도 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지식산업사, ?쪽, 2012.</ref><br/>
 
1993년 평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을 정비하기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관을 안치하는 현실(玄室)의 북쪽으로 5m 떨어진 지점의 지하에서 태조 [[왕건]]의 동상이 발견되었다. 앞에 산모양이 있는 24량의 [[통천관]]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모양이 같았다. 그러나 관에 붙은 8개의 일(日), 월(月)의 형태는 중국 [[황제]]의 [[통천관]]의 제도에 없는 고려만의 특징적인 요소이다.<ref>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황제제도 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지식산업사, ?쪽, 2012.</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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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태조 왕건이 쓴 통천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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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은 곧고 정수리 부분에서 약간 기울어져 뒷면 아래로 곧게 내리 뻗었다. 철로 [[양]]을 만들었으며 앞에는 [[전통|전통(展筩)]]이 있고 관의 앞부분에는 얇은 금으로 만든 넓은 산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1993년 평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을 정비하기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관을 안치하는 현실(玄室)의 북쪽으로 5m 떨어진 지점의 지하에서 태조 [[왕건]]의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청동상은 [[왕건]]의 젊은 시절 모습을 만든 것으로, [[통천관]]을 쓰고 있었다. 앞에 산모양이 있는 24량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형태가 같았다. 그러나 관에 붙은 8개의 일(日), 월(月)의 형태는 중국 [[황제]]의 [[통천관]] 제도에는 없는 고려만의 특징적인 요소이다.<ref>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황제제도 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지식산업사, 2012, 3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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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4년(1897)에 8월 14일 나라의 연호를 ‘광무(光武)’로 쓸 것을 확정하고,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같은 해 10월 11일 제국의 국호를 ‘[[대한|대한(大韓)]]’으로 결정한 다음날 [[원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황제]]로 등극시 착용하였다. 조칙을 반포할 때 [[황제]]가 [[조복]]으로 착용하는 [[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국가전례서인 [[대한예전|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통천관|통천관(通天冠)]]과 [[통천관]]을 착용할 때 입는 일습인 ‘통천관복(通天冠服)’이 ‘[[익선관|익선관(翼善冠)]]과 [[익선관]]을 착용할 때 입는 일습인 '익선관복(翼善冠服)’으로 기록되어 있다. 이는 대한제국 시기 [[면복]]의 다음 등급으로 정해진 것이 [[익선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 아니라 [[통천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라는 점과 중단, 대대, 폐슬, 패옥 등 예복의 기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익선관복’은 ‘통천관복’으로 규정이 되었어야 한다.<ref>최규순, 「황제와 황후의 복식, 어떻게 변화했나」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264~269쪽, 2010.</ref>[[증보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와 『[[예복|예복(禮服)]]』에서는 황제의 면복 다음에 ‘[[통천관|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의 제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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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제국 황제가 쓴 통천관'''<br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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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종]] 34년(1897)에 8월 14일 나라의 연호를 ‘광무(光武)’로 쓸 것을 확정하고,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같은 해 10월 11일 제국의 국호를 ‘[[대한|대한(大韓)]]’으로 결정하였다. 다음날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황제]]로 등극하고 조칙을 반포하였다. 때 [[황제의 조복]][[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국가전례서인 [[대한예전|『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통천관복(通天冠服)’이 '익선관복(翼善冠服)’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 [[면복]]의 다음 등급으로 정해진 복식이 [[익선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 아니라 [[통천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라는 점과 중단, 대대, 폐슬, 패옥 등 예복의 기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익선관복’은 ‘통천관복’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ref>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국립고궁박물관, 2011, 264~269쪽.</ref> [[증보문헌비고|『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예복|『예복(禮服)]]에서는 [[황제의 대례복|면복]] 다음에 ‘[[통천관|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의 제도가 나온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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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의 [[통천관]]'''<br/>
 
'''중국의 [[통천관]]'''<br/>
'''한(漢)'''<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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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漢)의 [[통천관]] 형태는 『후한서(後漢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br/>
형태는 『후한서(後漢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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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lockquote|통천관은 본래 진의 제도다. 높이가 9촌이고, 정면은 곧게 서있는데 정수리 부분에서 약간 기울어지고 뒤로 나가서 아래로 곧게 내리 뻗어 있다. 철로 권량(卷梁)을 만들었으며 앞에는 전통(展筩)이 있고 관의 앞부분에는 얇은 금으로 만든 넓은 산모양의 장식을 더한다. 천자가 항상 쓰는 것이다. 옷을 입는데 심의(深衣)의 형태이다.…… 홑옷에 검은색으로 옷깃과 소매의 가장자리를 두른 중의(中衣)를 조복으로 한다.(“通天冠, 髙九寸, 正豎, 頂少邪却, 乃直下, 爲鐵卷梁, 前有山, 展筩爲述, 乗輿所常服. 服衣, 深衣制, 有袍, 隨五時色, 袍者, 或曰: 周公抱成王宴居, 故施袍. 『禮記 』‘孔子衣縫掖之衣’. 縫掖其袖合而縫大之, 近今袍者也. 今下至賤更小史, 皆通制袍. 單衣, 皁緣領袖中衣, 爲朝服云.”
{{Blockquote|통천관은 본래 진의 제도다. 높이가 9촌이고, 정면은 곧게 서있는데 정수리 부분에서 약간 기울어지고 뒤로 나가서 아래로 곧게 내리 뻗어 있다. 철로 권량(卷梁)을 만들었으며 앞에는 전통(展筩)이 있고 관의 앞부분에는 얇은 금으로 만든 넓은 산모양의 장식을 더한다. 천자가 항상 쓰는 것이다. 옷을 입는데 심의의 형태이다.…… 홑옷에 검은색으로 옷깃과 소매의 가장자리를 두른 중의를 조복으로 한다.(“通天冠, 髙九寸, 正豎, 頂少邪却, 乃直下, 爲鐵卷梁, 前有山, 展筩爲述, 乗輿所常服. 服衣, 深衣制, 有袍, 隨五時色, 袍者, 或曰: 周公抱成王宴居, 故施袍. 『禮記 』‘孔子衣縫掖之衣’. 縫掖其袖合而縫大之, 近今袍者也. 今下至賤更小史, 皆通制袍. 單衣, 皁緣領袖中衣, 爲朝服云.”
 
 
|출처= 『後漢書』, 卷40, 「輿服志 第30」.}}
 
|출처= 『後漢書』, 卷40, 「輿服志 第30」.}}
'''진(晉)'''<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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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晉)나라의 [[통천관]]은 한나라와 유사하다. 다만 산형(山形)의 장식이 금으로 되어 있거나 니금(泥金)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나라 [[사마염|사마염(司馬炎)]]의 초상에서는 당의 [[통천관]] 특징이 보인다. 수(隋)와 당(唐)의 [[통천관]]은 24양(梁)에 매미 12수(首)를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한나라와 유사한데, 다만 산형의 장식이 금으로 되어 있거나 니금(泥金)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나라 [[사마염|사마염(司馬炎]], 236~290)의 초상은 당대의 특징이 보인다.<ref>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39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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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요(遼)·금(金)·원(元)의 [[통천관]]도 한나라의 제도와 같다. 명(明)의 [[통천관]]은 금박산(金博山)과 12수(首)의 매미 장식에 주취(朱翠), 흑개책(黒介幘), 조영(組纓), 옥잠도(玉簮導)를 장식한다. 홍무 26년 [[피변(皮弁)]]제도가 제정된 이후 [[통천관]]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청(淸)은 한족의 복식을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천관]]이 사라졌다.<ref>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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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진무제 사마염.jpg| 진무제(晉武帝) 사마염(司馬炎)의 통천관+면판 초상.<ref>『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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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宋)''', '''요(遼)''', '''금(金)''', '''원(元)'''<br/>
 
한나라의 제도와 같다.<ref>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40쪽.</ref><br/>
 
'''명(明)'''<br/>
 
금박산(金博山)과 12수(首)의 매미 장식에 주취(朱翠), 흑개책(黒介幘), 조영(組纓), 옥잠도(玉簮導)를 장식한다. 홍무 26년 [[피변(皮弁)]]의 제도가 제정된 이후 통천관은 사용되지 않았다.<ref>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40쪽.</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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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재도회 통천관.jpg| 『삼재도회』 통천관.
 
파일:삼재도회 통천관.jpg| 『삼재도회』 통천관.
 
파일:삼재도회 피변.jpg| 『삼재도회』 피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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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淸)'''<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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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족의 복식을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천관이 사라졌다.<ref>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40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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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의 [[통천관]]'''<br/>
 
'''일본의 [[통천관]]'''<br/>
일본 류쿠 왕국 ‘쇼씨 왕조의 전래품’의 통천관은 검은색 바탕에 12량, 붉은 색 끈 등으로 보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기록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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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류쿠 왕국의 유물인 ‘쇼씨 왕조의 전래품’에서 나온 통천관은 검은색 바탕에 12량, 붉은 색 끈 등으로 보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기록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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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예복-통천관.jpg| 『예복(禮服)』통천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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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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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용 및 참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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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례도|삼례도(三禮圖)]]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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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송사|송사(宋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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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진서|진서(晉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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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서|후한서(後漢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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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후한서|『후한서(後漢書)]]
* [[고려사|고려사(高麗史)]]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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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사|『고려사(高麗史)]]
* [[국조오례의서례|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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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국조오례의서례|국조오례의서례(國朝五禮儀序例)]]
 
* 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 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국립고궁박물관, 2011.
 
*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국립고궁박물관, 2011.
 +
* 국립고궁박물관, 『류쿠 왕국의 보물』, 국립고궁박물관, 2014.
 
* 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황제제도 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지식산업사, 2012.
 
* 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황제제도 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지식산업사, 2012.
 
* 黃能馥, 陳娟娟, 『中華歷代服飾藝術』, 中國旅遊出版社, 1999.
 
* 黃能馥, 陳娟娟, 『中華歷代服飾藝術』, 中國旅遊出版社, 1999.

2017년 12월 17일 (일) 17:59 기준 최신판


통천관
(通天冠)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
대표명칭 통천관
한자표기 通天冠
구분 관 및 쓰개
착용신분 황제
착용성별



정의

대한제국 황제가 착용하는 관으로, 고종순종황제의 조복을 입을 때 착용하였다.

내용

진(秦)이 중국을 통일한 후 신하들에게 점령국 군주의 관을 나눠주었는데, 이때 통천관은 황제의 조복에 착용했다고 한다.[1] 어원은 ‘하늘과 통하는 관’이라고 글자 그대로 풀기도 하지만, 전거는 찾을 수 없어 불명확하다고 볼 수 있다.

고려 태조 왕건이 쓴 통천관
정면은 곧고 정수리 부분에서 약간 기울어져 뒷면 아래로 곧게 내리 뻗었다. 철로 을 만들었으며 앞에는 전통(展筩)이 있고 관의 앞부분에는 얇은 금으로 만든 넓은 산모양의 장식을 더했다. 1993년 평양에서 고려 태조 왕건의 무덤인 현릉을 정비하기 위한 발굴조사 과정에서 관을 안치하는 현실(玄室)의 북쪽으로 5m 떨어진 지점의 지하에서 태조 왕건의 청동상이 발견되었다. 청동상은 왕건의 젊은 시절 모습을 만든 것으로, 통천관을 쓰고 있었다. 앞에 산모양이 있는 24량으로 당나라의 제도와 형태가 같았다. 그러나 관에 붙은 8개의 일(日), 월(月)의 형태는 중국 황제통천관 제도에는 없는 고려만의 특징적인 요소이다.[2]

대한제국 황제가 쓴 통천관
고종 34년(1897)에 8월 14일 나라의 연호를 ‘광무(光武)’로 쓸 것을 확정하고, 일련의 준비과정을 거쳐 같은 해 10월 11일 제국의 국호를 ‘대한(大韓)’으로 결정하였다. 다음날 환구단에서 제사를 지낸 후 황제로 등극하고 조칙을 반포하였다. 이 때 황제의 조복통천관을 쓰고 강사포를 입었다. 대한제국 시기에 편찬된 국가전례서인 『대한예전(大韓禮典)』에는 ‘통천관복(通天冠服)’이 '익선관복(翼善冠服)’으로 기록되어 있다. 그러나 대한제국 시기 면복의 다음 등급으로 정해진 복식이 익선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 아니라 통천관을 비롯한 일습 복식이라는 점과 중단, 대대, 폐슬, 패옥 등 예복의 기타 요소를 모두 갖추고 있는 점으로 보아 ‘익선관복’은 ‘통천관복’의 오류인 것으로 보인다.[3] 『증보문헌비고(增補文獻備考)』『예복(禮服)』에서는 면복 다음에 ‘통천관(通天冠), 강사포(絳紗袍)’의 제도가 나온다.

중국의 통천관
한(漢)의 통천관 형태는 『후한서(後漢書)』에 자세하게 기록되어 있다.

Quote-left.png 통천관은 본래 진의 제도다. 높이가 9촌이고, 정면은 곧게 서있는데 정수리 부분에서 약간 기울어지고 뒤로 나가서 아래로 곧게 내리 뻗어 있다. 철로 권량(卷梁)을 만들었으며 앞에는 전통(展筩)이 있고 관의 앞부분에는 얇은 금으로 만든 넓은 산모양의 장식을 더한다. 천자가 항상 쓰는 것이다. 옷을 입는데 심의(深衣)의 형태이다.…… 홑옷에 검은색으로 옷깃과 소매의 가장자리를 두른 중의(中衣)를 조복으로 한다.(“通天冠, 髙九寸, 正豎, 頂少邪却, 乃直下, 爲鐵卷梁, 前有山, 展筩爲述, 乗輿所常服. 服衣, 深衣制, 有袍, 隨五時色, 袍者, 或曰: 周公抱成王宴居, 故施袍. 『禮記 』‘孔子衣縫掖之衣’. 縫掖其袖合而縫大之, 近今袍者也. 今下至賤更小史, 皆通制袍. 單衣, 皁緣領袖中衣, 爲朝服云.” Quote-right.png
출처: 『後漢書』, 卷40, 「輿服志 第30」.


진(晉)나라의 통천관은 한나라와 유사하다. 다만 산형(山形)의 장식이 금으로 되어 있거나 니금(泥金)을 사용했을 것으로 추측된다. 진나라 사마염(司馬炎)의 초상에서는 당의 통천관 특징이 보인다. 수(隋)와 당(唐)의 통천관은 24양(梁)에 매미 12수(首)를 붙이는 것이 특징이다. 송(宋)·요(遼)·금(金)·원(元)의 통천관도 한나라의 제도와 같다. 명(明)의 통천관은 금박산(金博山)과 12수(首)의 매미 장식에 주취(朱翠), 흑개책(黒介幘), 조영(組纓), 옥잠도(玉簮導)를 장식한다. 홍무 26년 피변(皮弁)의 제도가 제정된 이후 통천관은 더 이상 사용되지 않았다. 청(淸)은 한족의 복식을 착용하지 않았기 때문에 통천관이 사라졌다.[4]



일본의 통천관
일본 류쿠 왕국의 유물인 ‘쇼씨 왕조의 전래품’에서 나온 통천관은 검은색 바탕에 12량, 붉은 색 끈 등으로 보아 중국과 우리나라의 기록에 있는 것과 같은 모양이다.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황제 통천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왕건 통천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고종 통천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순종 통천관 A는 B를 착용하였다 A ekc:wears B
황제의 조복 통천관 A는 B를 일습으로 갖춘다 A dcterms:hasPart B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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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1. 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35~36쪽.
  2. 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황제제도 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지식산업사, 2012, 39쪽,.
  3. 국립고궁박물관, 『대한제국 잊혀진 100년 전의 황제국』, 국립고궁박물관, 2011, 264~269쪽.
  4. 姜淳弟, 「冠帽 硏究(III)-通天冠․遠遊冠․梁冠을 중심으로」, 『생활과학연구논집』 16권 1호, 가톨릭대학교 생활과학연구소, 1996, 40쪽.
  5. 『역대제왕도(歷代帝王圖』
  6. 국립고궁박물관, 『류쿠 왕국의 보물』, 국립고궁박물관, 2014, 62쪽.
  7.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1937),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소장.
  8. 『황실황족성감(皇室皇族聖鑑)』(1937), 국립고궁박물관(http://www.gogung.go.kr/) 소장.
  9. 노명호,『고려 태조왕건의 동상-황제제도 고구려 문화 전통의 형상화』, 지식산업사, 39쪽.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