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당연합"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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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648년(진덕여왕 2년) [[신라]]와 당나라 양국이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백제의 영토와 평양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가 차지' 할 것을 합의하고 맺은 군사동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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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년([[신라 진덕여왕]] 2년) 나당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당과 맺은 군사동맹이다.  
  
=='''설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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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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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관계의 결과, 나당연합===
 
7세기 들어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항쟁이 격렬해지고,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이 잦아지자 신라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국이었던 당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였다.<br/>
 
7세기 들어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항쟁이 격렬해지고,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이 잦아지자 신라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국이었던 당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였다.<br/>
신라는 [[의자왕]] 즉위(642년)계속적으로 신라 영토를 공격해 오는 백제의 침입을 막아내는 것이 중요하였고, 고구려와 싸우다 무너진 수(隨)를 계승한 당(唐)은 고구려를 견제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나당연합을 이끌어내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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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라로서는 642년에 [[백제 의자왕]]이 즉위한 계속되는 신라 영토 침입을 막아내는 것이 절실하였다. 또 고구려와 싸우다 무너진 수(隨)를 계승한 당(唐)은 고구려를 견제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나당연합을 이끌어내었다.<br/>
643년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는데, 이는 이 때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실질적 군사동맹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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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3년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이미 이 때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실질적 군사동맹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br/>  
648년 12월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당나라 태종(太宗)을 만나 동맹국으로서의 상호입장을 담판하였고 여기서 전쟁 후에 백제와 고구려 영토에 대한 양국 사이의 영토분할약정(領土分割約定)이 이루어졌다.<ref>이찬(伊湌) 김춘추(金春秋)와 그의 아들 문왕(文王)을 당(唐)나라에 보내 조공하였다. 태종(太宗)이 광록경(光祿卿) 유형(柳亨)을 보내서 교외에서 그를 맞이하여 위로하였다. 이윽고 궁성에 다다르자 춘추의 용모가 영특하고 늠름함을 보고 후하게 대우하였다. 춘추가 국학(國學)에 가서 석전(釋奠)과 강론(講論)을 참관하기를 청하자 태종이 이를 허락하였다. 아울러 자기가 직접 지은 온탕(溫湯)비(碑)와 진사비(晉祠碑), 그리고 새로 편찬한 《진서(晉書)》를 내려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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648년([[신라 선덕여왕]] 12) 12월 [[신라 태종무열왕|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당 태|당나라 태종(太宗)]]을 만나 동맹국으로서의 상호입장을 담판하였다. 여기서 전쟁 후에 백제와 고구려 영토에 대한 양국 사이의 영토분할약정(領土分割約定)이 이루어졌다. 백제의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가 차지 할 것을 합의한 것이다.
어느 날 [김춘추를] 불러 사사로이 만나서 금과 비단을 매우 후하게 주고 묻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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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卿)은 무슨 생각을 마음에 가지고 있는가?”라고 하였다. 춘추가 무릎을 꿇고 아뢰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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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전쟁]]의 결과, [[신라의 삼국통일|삼국통일]]===
“신(臣)의 나라는 바다 모퉁이에 치우쳐 있으면서도 천자(天子)조정을 섬긴 지 여러 해가 되었습니다. 그런데 백제는 강하고 교활하여 여러 차례 함부로 침략해 왔습니다. 더욱이 지난해에는 군사를 크게 일으켜서 깊숙이 쳐들어와 수십 개의 성을 쳐서 함락시켜 조회할 길을 막았습니다. 만약 폐하께서 당나라의 군사를 빌려주어 흉악한 것을 잘라 없애지 않는다면 저희 나라의 인민은 모두 포로가 될 것이며, 산 넘고 바다 건너 행하는 조회도 다시는 바랄 수 없을 것입니다.”라고 하였다. 태종이 매우 옳다고 여겨서 군사의 출동을 허락하였다. 춘추는 또 장복(章服)을 고쳐서 중국의 제도에 따를 것을 청하자 이에 내전(內殿)에서 진귀한 옷을 꺼내어 춘추와 그를 따라 온 사람에게 주었다. 조칙(詔勅)으로 춘추에게 관작을 주어 특진(特進)으로 삼고, 문왕을 좌무위장군(左武衛將軍)으로 삼았다. "[http://db.history.go.kr/item/level.do?itemId=sg&levelId=sg_005r_0030_0130&types=r 삼국사기 신라본기 권5 진덕왕2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데이타베이스』, <sup>online</sup></online></html>국사편찬위원회.</ref><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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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당연합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고구려 패망에도 절대적 역할을 했지만 신라에게 승전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br/>  
나당연합은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는 데 일차적으로 실천되었고 백제·고구려를 패망시키는 데 절대적 역할을 했지만 신라에게 승전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b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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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1만 명의 당군을 배치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2만 명의 당군을 주둔시켜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격하하고 [[신라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아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br/>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1만명의 당군을,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2만명의 당군을 주둔시켜 직접 지배하려 하였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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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구려는 패망 후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나자, 신라는 [[안승|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항당운동(抗唐運動)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이용해 동맹관계를 배반한 당에게 전쟁으로 응징하고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통일목적을 달성했으니 이것이 [[나당전쟁]]이다.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아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br/>
 
고구려는 패망 후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나자, 신라는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항당운동(抗唐運動)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이용해 동맹관계를 배반한 당에게 전쟁으로 응징하고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통일목적을 달성했으니 이것이 나당전쟁이다.
 
  
 
=='''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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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C009/C009.htm "신라의 당군 격퇴와 삼국통일"(오승우)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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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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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호영,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11307 나당전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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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분류:민족기록화]][[분류:개념]]

2017년 12월 27일 (수) 00:23 기준 최신판

나당연합
(羅唐聯合)
Land battle.png
대표명칭 나당연합
한자표기 羅唐聯合
유형 군사
관련개념 나당전쟁



정의

648년(신라 진덕여왕 2년) 나당연합으로 백제와 고구려를 멸망시킨 후에 당과 맺은 군사동맹이다.

내용

이해관계의 결과, 나당연합

7세기 들어 고구려·백제·신라 삼국의 항쟁이 격렬해지고, 고구려와 백제의 공격이 잦아지자 신라는 위급한 상황에 대처하기 위해 고구려와 적대국이었던 당과 동맹을 맺고 고구려와 백제에 대항하였다.
신라로서는 642년에 백제 의자왕이 즉위한 후 계속되는 신라 영토 침입을 막아내는 것이 절실하였다. 또 고구려와 싸우다 무너진 수(隨)를 계승한 당(唐)은 고구려를 견제하는 것이 우선이었으므로 두 나라의 이해관계가 나당연합을 이끌어내었다.
643년 당이 고구려를 침략하자, 신라는 3만명의 군대를 동원해 고구려의 남쪽 국경을 공격하였다. 이미 이 때부터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 실질적 군사동맹이 이루어졌음을 의미한다.
648년(신라 선덕여왕 12) 12월 김춘추(金春秋)가 당나라에 건너가 당나라 태종(太宗)을 만나 동맹국으로서의 상호입장을 담판하였다. 여기서 전쟁 후에 백제와 고구려 영토에 대한 양국 사이의 영토분할약정(領土分割約定)이 이루어졌다. 백제의 영토와 평양 이남의 고구려 땅은 신라가 차지 할 것을 합의한 것이다.

나당전쟁의 결과, 삼국통일

나당연합으로 660년 백제를 멸망시키고 백제·고구려 패망에도 절대적 역할을 했지만 신라에게 승전 대가는 아무 것도 없었다.
당은 백제 땅에 웅진도독부(熊津都督府)를 두고 1만 명의 당군을 배치하고, 평양에 안동도호부(安東都護府)를 두고 2만 명의 당군을 주둔시켜 직접 지배하려 하였다. 663년에는 신라를 계림대도독부(鷄林大都督府)로 격하하고 신라 문무왕을 계림주대도독(鷄林州大都督)으로 삼아 신라까지 지배하려는 야욕을 보였다.
고구려는 패망 후 고구려 부흥군이 크게 일어나자, 신라는 안승(安勝)을 고구려왕으로 추대하고 항당운동(抗唐運動)을 전개하였다. 신라는 고구려 부흥군을 이용해 동맹관계를 배반한 당에게 전쟁으로 응징하고 당을 한반도에서 몰아냄으로써 통일목적을 달성했으니 이것이 나당전쟁이다.

지식 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신라 태종무열왕 나당연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당 태종 나당연합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나당연합 나당전쟁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648년 신라와 당나라가 나당연합을 맺었다
660년 신라가 백제를 멸망시켰다
668년 신라가 고구려를 멸망시켰다
676년 신라가 당나라를 축출하였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1. 웹 자원
    • 이호영, "나당전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춘추", 문화원형 라이브러리, 『문화콘텐츠닷컴』online, 한국콘텐츠진흥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