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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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 뒷편에 모셔져 있는 [[혜근|혜근(慧勤)]]의 사리탑이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280000,31&flag=Y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혜근]]은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 호는 나옹(懶翁), 시호는 선각(禪覺)이며 1371년([[고려 공민왕|공민왕]] 18)에 [[왕사|왕사(王師)]]가 되어 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5883&cid=50763&categoryId=50784 혜근]",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 뒷편에 모셔져 있는 [[혜근|혜근(慧勤)]]의 사리탑이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280000,31&flag=Y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혜근]]은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 호는 나옹(懶翁), 시호는 선각(禪覺)이며 1371년([[고려 공민왕|공민왕]] 18)에 [[왕사|왕사(王師)]]가 되어 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ref>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05883&cid=50763&categoryId=50784 혜근]", 용어해설,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 이 승탑은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280000,31&flag=Y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이러한 승탑은 부처님의 사리탑인 금강계단의 형식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형식에서 기단을 생략한 아주 소규모의 승탑들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이 승탑이 바로 그 기원적인 작품의 하나로 지목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5919&cid=46710&categoryId=46710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 | 이 승탑은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ref>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단</ref>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ref>탑기단과 상륜 사이 탑의 몸</ref>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ref>"[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12,02280000,31&flag=Y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문화유산정보』<sup>online</sup></online></html>, 문화재청.</ref> 이러한 승탑은 부처님의 사리탑인 금강계단의 형식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형식에서 기단을 생략한 아주 소규모의 승탑들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이 승탑이 바로 그 기원적인 작품의 하나로 지목된다.<ref>"[http://terms.naver.com/entry.nhn?docId=975919&cid=46710&categoryId=46710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html><online style="color:purple">『네이버 지식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 |
===보제존자의 입적과 승탑의 건립=== | ===보제존자의 입적과 승탑의 건립=== | ||
− | [[혜근|혜근(慧勤)]]은 1371년([[고려 공민왕|공민왕]] 21) [[왕사|왕사(王師)]]로 책봉되고 [[순천 송광사|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순천 송광사|송광사]] 주지를 사임하고, 스승인 [[지공|지공화상(指空和尙)]]의 유지를 받들어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양주 회암사|회암사]]의 중창이 끝나고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 격이 되어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혜근]]에 의한 불교의 중흥을 시기한 유생(儒生)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고려 우왕|우왕]]도 할 수 없이 [[혜근]]에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했다. 이때 [[혜근]]은 이미 병이 깊어가고 있었고, 여주 땅에 이르렀을 때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에 잠시 머물다가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5월 이 곳에서 입적하였다.<ref>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4-267쪽.</ref> | + | [[혜근|혜근(慧勤)]]은 1371년([[고려 공민왕|공민왕]] 21) [[왕사|왕사(王師)]]로 책봉되고 [[순천 송광사|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순천 송광사|송광사]] 주지를 사임하고, 스승인 [[지공|지공화상(指空和尙)]]의 유지를 받들어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巖寺)]]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양주 회암사|회암사]]의 중창이 끝나고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 격이 되어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혜근]]에 의한 불교의 중흥을 시기한 유생(儒生)<ref>유도(儒道)의 도를 닦는 선비</ref>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고려 우왕|우왕]]도 할 수 없이 [[혜근]]에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했다. 이때 [[혜근]]은 이미 병이 깊어가고 있었고, 여주 땅에 이르렀을 때 [[여주 신륵사|신륵사(神勒寺)]]에 잠시 머물다가 1376년([[고려 우왕|우왕]] 2) 5월 이 곳에서 입적하였다.<ref>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4-267쪽.</ref> |
[[여주 신륵사|신륵사]] 앞에서 다비를 한 후, 같은 해 7월 [[양주 회암사|회암사]]에 옮겨진 [[혜근]]의 사리는 8월 완공된 승탑에 모셔졌다. 또 그의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여주 신륵사|신륵사]]에서 1379년([[고려 우왕|우왕]] 5)에 따로 승탑을 만들어 모셨다.<ref>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8쪽.</ref> | [[여주 신륵사|신륵사]] 앞에서 다비를 한 후, 같은 해 7월 [[양주 회암사|회암사]]에 옮겨진 [[혜근]]의 사리는 8월 완공된 승탑에 모셔졌다. 또 그의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여주 신륵사|신륵사]]에서 1379년([[고려 우왕|우왕]] 5)에 따로 승탑을 만들어 모셨다.<ref>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8쪽.</ref> | ||
− | {{Blockquote|화장(火葬)이 끝나고 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를 태운 배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 + | {{Blockquote|화장(火葬)이 끝나고 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ref>부처나 성자의 유골</ref>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ref>감추다</ref>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ref>위패(位牌)를 불사르는 곳</ref>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ref>주장(主將)이 되는 상제(喪制). 대개 장자(長子)가 됨</ref>를 태운 배가 [[양주 회암사|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ref>종 모양으로 만들어, 고승의 유골을 안치한 돌탑</ref>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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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7일 (월) 02:30 기준 최신판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
|
대표명칭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
영문명칭 | Bell-shaped Stupa of Buddhist Monk Boje at Silleuksa Temple, Yeoju |
한자 | 驪州 神勒寺 普濟尊者石鍾 |
주소 | 경기도 여주시 신륵사길 73 |
문화재 지정번호 | 보물 제228호 |
문화재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소유자 | 여주 신륵사 |
관리자 | 여주 신륵사 |
크기 | 높이 2.1m |
건립시대 | 고려시대 |
관련승려 | 혜근(慧勤) |
관련탑비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
정의
경기도 여주시 천송동 신륵사(神勒寺)에 있는 고려 말의 승려 혜근(慧勤, 1320-1376)의 승탑.
내용
개요
신륵사(神勒寺) 뒷편에 모셔져 있는 혜근(慧勤)의 사리탑이다.[1] 혜근은 고려 후기의 고승으로 호는 나옹(懶翁), 시호는 선각(禪覺)이며 1371년(공민왕 18)에 왕사(王師)가 되어 왕으로부터 보제존자(普濟尊者)라는 호를 받았다.[2]
이 승탑은 널찍하게 마련된 단층 기단(基壇)[3] 위에 2단의 받침을 둔 후 종 모양의 탑신(塔身)[4]을 올린 모습이다. 탑신은 아무런 꾸밈이 없고, 꼭대기에는 머리장식으로 불꽃무늬를 새긴 큼직한 보주(寶珠:연꽃봉오리모양의 장식)가 솟아 있다.[5] 이러한 승탑은 부처님의 사리탑인 금강계단의 형식에서도 동일하게 적용되고 있으며, 이후 조선시대에 들어서는 이러한 형식에서 기단을 생략한 아주 소규모의 승탑들이 크게 유행하게 되는데 이 승탑이 바로 그 기원적인 작품의 하나로 지목된다.[6]
보제존자의 입적과 승탑의 건립
혜근(慧勤)은 1371년(공민왕 21) 왕사(王師)로 책봉되고 순천 송광사(松廣寺)에 주석하였다. 그러나 만년에 이르러 송광사 주지를 사임하고, 스승인 지공화상(指空和尙)의 유지를 받들어 회암사(檜巖寺)의 중창불사를 마무리하고자 하였다. 1376년(우왕 2) 회암사의 중창이 끝나고 고려 말 전국 사찰의 총본산 격이 되어 불교 중흥의 중심 도량 역할을 하게 되었다. 그러자 혜근에 의한 불교의 중흥을 시기한 유생(儒生)[7]들의 참소가 끊이지 않았고, 이에 우왕도 할 수 없이 혜근에게 개경에서 멀리 떨어진 밀양 영원사(塋原寺)로 거처를 옮기도록 명했다. 이때 혜근은 이미 병이 깊어가고 있었고, 여주 땅에 이르렀을 때 신륵사(神勒寺)에 잠시 머물다가 1376년(우왕 2) 5월 이 곳에서 입적하였다.[8]
신륵사 앞에서 다비를 한 후, 같은 해 7월 회암사에 옮겨진 혜근의 사리는 8월 완공된 승탑에 모셔졌다. 또 그의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서 1379년(우왕 5)에 따로 승탑을 만들어 모셨다.[9]
화장(火葬)이 끝나고 타다 남은 유골을 씻으려는 순간, 구름 한 점 없는 청천(靑天)에서 사방 수백보(數百步)의 이내에만 비가 내렸다. 사리(舍利)[10]가 155과가 나왔다. 기도하니 558과로 분신(分身)하였다. 뿐만 아니라 대중들이 재 속에서도 얻어 개인이 스스로 비장(秘藏)[11]한 것도 부지기수였으며, 3일 간 신광(神光)이 비추었다. 석달여(釋達如) 스님은 꿈에 화장장 소대(燒臺)[12] 밑에 서려 있는 용을 보았는데, 그 모양이 마치 말(馬)과도 같았다. 상주(喪主)[13]를 태운 배가 회암사(檜嵒寺)로 돌아오는데, 비가 내리지 않았는 데도 갑자기 물이 불어났으니, 이 모두가 여룡(驪龍)의 도움이라 했다. 8월 15일에 부도(浮圖)를 회암사 북쪽 언덕에 세우고, 정골사리(頂骨舍利)는 신륵사에 조장(厝藏)하였으니, 열반한 곳임을 기념하기 위해서이다. 이와 같이 사리를 밑에 모시고 그 위에 석종(石鐘)[14]으로서 덮었으니, 감히 누구도 손을 대지 못하게 함이다. | ||
출처: "회암사지선각왕사비", 금석문 세부정보, |
지식 관계망
- 나옹 혜근의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A ekc:isStupaOf B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A ekc:isStupaOf B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혜근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A ekc:isSteleOf B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혜근 | A는 B를 위한 승탑이다 | A ekc:isStupaOf B |
양주 회암사 나옹선사부도 및 석등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양주 회암사지 선각왕사비 | 양주 회암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비 | 여주 신륵사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원주 영전사지 보제존자탑 | 국립중앙박물관 | A는 B에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혜근 | 여주 신륵사 | A는 B에서 입적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혜근",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건축물의 기초가 되는 단
- ↑ 탑기단과 상륜 사이 탑의 몸
-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유도(儒道)의 도를 닦는 선비
-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4-267쪽.
-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68쪽.
- ↑ 부처나 성자의 유골
- ↑ 감추다
- ↑ 위패(位牌)를 불사르는 곳
- ↑ 주장(主將)이 되는 상제(喪制). 대개 장자(長子)가 됨
- ↑ 종 모양으로 만들어, 고승의 유골을 안치한 돌탑
참고문헌
- "여주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문화재검색,
『문화유산정보』online , 문화재청. - "신륵사 보제존자 석종", 답사여행의 길잡이:경기남부와 남한강,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신륵사보제존자사리탑", 미술작품,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신륵사 보제존자석종", 두산백과,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황원갑, "무학왕사와 천보산 회암사",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272-292쪽.