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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284년에는 인각사가 [[일연|일연(一然)]]의 하산소<ref>왕사로 책봉되어 주석한 곳을 말한다.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41 인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 』<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로 지정되었다. [[일연]]은 인각사에 5년간 머무르면서 나라의 후원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ref>김용검에게 절을 수리하게 한뒤 토지 백여경을 하사하였다. 박기용, 『문학:명저의 탐방;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선비문화 1권, 2004, 58쪽.</ref>, 두 번에 걸쳐 구산선문회를 열면서 인각사가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의 중심사찰이 되도록 하였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41 인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362년([[고려 공민왕|공민왕]] 11)에는 본당 뒤에 무무당이 건립되어 총림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1284년에는 인각사가 [[일연|일연(一然)]]의 하산소<ref>왕사로 책봉되어 주석한 곳을 말한다. "[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41 인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 』<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로 지정되었다. [[일연]]은 인각사에 5년간 머무르면서 나라의 후원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ref>김용검에게 절을 수리하게 한뒤 토지 백여경을 하사하였다. 박기용, 『문학:명저의 탐방;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선비문화 1권, 2004, 58쪽.</ref>, 두 번에 걸쳐 구산선문회를 열면서 인각사가 [[구산선문|구산선문(九山禪門)]]의 중심사찰이 되도록 하였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41 인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또한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362년([[고려 공민왕|공민왕]] 11)에는 본당 뒤에 무무당이 건립되어 총림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1407년에는 인각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점점 사세가 기울어<ref>『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은 병속에 새 찾을 곳 없고, 낙조 속에 비바람에 씻긴 비석만 남아있네"라는 조선시대 초기 문장가인 유호인(1445~1494)이 쓴 글이 인용되는데, 이를통해 당시 인각사의 사세가 매우 기울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ref>, 1555년에는 인각사의 토지가 임고서원(臨皐書院)에 이속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서 폐사상태에 이르렀고, 1721년에 다시 중수하였다.<ref>"[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51 ⑬군위 인각사]" 『금강신문』, 작성일: 2009년 3월 20일.</ref><ref>「강설루중수기」에 따르면 당시 대웅전과 극락전 두 전각의 기둥이 기울고 지붕이 새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그 안에 모셔진 장륙존상도 훼손이 심했으며 경내도 수풀이 우거져 황폐화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법당의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종루인 강설루와 요사를 개수하였다고 한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9쪽.</ref> 1890년에는 일연의 승탑지에 조상의 묘를 쓰려다 실패한 황보씨에 의해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일연선사 비]]와 전각이 파괴되었다. 1992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마쳤고, 이를 토대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년간 국비 등 총 113억 원을 투입하여 인각사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41 인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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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07년에는 인각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점점 사세가 기울어<ref>『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은 병속에 새 찾을 곳 없고, 낙조 속에 비바람에 씻긴 비석만 남아있네"라는 조선시대 초기 문장가인 유호인(1445~1494)이 쓴 글이 인용되는데, 이를통해 당시 인각사의 사세가 매우 기울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ref>, 1555년에는 인각사의 토지가 임고서원(臨皐書院)<ref>"[http://www.doopedia.co.kr/doopedia/master/master.do?_method=view&MAS_IDX=101013000895382 임고서원]", <html><online style="color:purple">『두산백과』<sup>online</sup></online></html>.</ref>에 이속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서 폐사상태에 이르렀고, 1721년에 다시 중수하였다.<ref>"[http://www.ggbn.co.kr/news/articleView.html?idxno=9551 ⑬군위 인각사]" 『금강신문』, 작성일: 2009년 3월 20일.</ref><ref>「강설루중수기」에 따르면 당시 대웅전과 극락전 두 전각의 기둥이 기울고 지붕이 새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그 안에 모셔진 장륙존상도 훼손이 심했으며 경내도 수풀이 우거져 황폐화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법당의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종루인 강설루와 요사를 개수하였다고 한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9쪽.</ref> 1890년에는 일연의 승탑지에 조상의 묘를 쓰려다 실패한 황보씨에 의해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일연선사 비]]와 전각이 파괴되었다. 1992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마쳤고, 이를 토대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년간 국비 등 총 113억 원을 투입하여 인각사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ref>"[http://encysillok.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00014441 인각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조선왕조실록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지리===
 
===지리===
인각사는 화산(華山)의 서북쪽 기슭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화산의 능선이 끝나는 곳에는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면 절이 자리한 인각 마을이 있다. 개울 맞은편에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는데 그 정상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한다. 절 이름과 마을 이름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인각(麟角)'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주변 지형과 관련이 깊다. 이 지역은 기린(麒麟)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인각마을의 위치가 그 뿔의 지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각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ref>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ref><ref>이민수(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1969.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12&gunchaId=av027&muncheId=01&finId=005&NodeId=&setid=453558&Pos=32&TotalCount=49&searchUrl=ok 의흥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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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각사는 화산(華山)의 서북쪽 기슭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화산의 능선이 끝나는 곳에는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면 절이 자리한 인각 마을이 있다. 개울 맞은편에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는데 그 정상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한다. 절 이름과 마을 이름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인각(麟角)'<ref>기린의 뿔. 곧 지극히 드문 사물의 비유</ref>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주변 지형과 관련이 깊다. 이 지역은 기린(麒麟)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인각마을의 위치가 그 뿔의 지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각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ref>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ref><ref>이민수(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1969.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index.jsp?bizName=MK&url=/itkcdb/text/nodeViewIframe.jsp?bizName=MK&seojiId=kc_mk_g012&gunchaId=av027&muncheId=01&finId=005&NodeId=&setid=453558&Pos=32&TotalCount=49&searchUrl=ok 의흥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인각사무무당기===
 
===인각사무무당기===
[[이색|이색(李穡)]]은 「인각사무무당기」에서 무무당의 낙성을 축하하면서 당시 인각사의 가람배치에 대한 평가를 했다. “대체로 불전(佛殿)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 탑이 있으며 왼쪽에 강당이 있고, 오른쪽에 살림채가 있는데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 건물은 멀어 건물 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무무당을 선방 옆에 세워 좌우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고 일단 치하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기존의 선방이 치우쳐 있다는 점을 면키 어려우니 역시 조금 옆으로 옮겨야 절의 모양과 제도가 완벽해지겠다며 지금 못하더라도 뒷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ref>유홍준,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02292047375&code=960100 유홍준의 안목 - '검이불루 화이불치' 어쩌면 그렇게 자연과 잘 어울릴 수 있는가]", 『경향신문』,  작성일: 2016년 3월 28일</ref><ref>『목은집』 목은문고 제1권 기.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20A_0430_010_0040 인각사 무무당의 기문]", 목은집 목은문고 제1권 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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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색|이색(李穡)]]은 「인각사무무당기」에서 무무당의 낙성을 축하하면서 당시 인각사의 가람배치에 대한 평가를 했다. “대체로 불전(佛殿)<ref>불당을 말함</ref>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 탑이 있으며 왼쪽에 강당이 있고, 오른쪽에 살림채가 있는데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 건물은 멀어 건물 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무무당을 선방 옆에 세워 좌우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고 일단 치하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기존의 선방이 치우쳐 있다는 점을 면키 어려우니 역시 조금 옆으로 옮겨야 절의 모양과 제도가 완벽해지겠다며 지금 못하더라도 뒷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ref>유홍준, "[http://m.khan.co.kr/view.html?artid=201602292047375&code=960100 유홍준의 안목 - '검이불루 화이불치' 어쩌면 그렇게 자연과 잘 어울릴 수 있는가]", 『경향신문』,  작성일: 2016년 3월 28일</ref><ref>『목은집』 목은문고 제1권 기. 온라인 참조: "[http://db.itkc.or.kr/dir/item?itemId=BT#/dir/node?dataId=ITKC_BT_0020A_0430_010_0040 인각사 무무당의 기문]", 목은집 목은문고 제1권 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고전종합DB』<sup>online</sup></online></html>, 한국고전번역원.</ref>
  
 
===관련문화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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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24년 4월 12일 (금) 00:38 기준 최신판

군위 인각사
(軍威 麟角寺)
대표명칭 군위 인각사
한자 軍威 麟角寺
주소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 삼국유사로 250(화북리 612)
문화재 지정번호 사적 제374호
문화재 지정일 1992년 05월 28일
교구정보 대한불교조계종
건립시기 642년
경내문화재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군위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 군위 인각사 석불좌상



정의

경상북도 군위군 고로면에 있는 절.

내용

역사

인각사(麟角寺)의 창건과 관련해서는 두 가지 설이 있다. 하나는 642년에 의상(義湘, 625-702)이 창건했다는 것이고, 또 하나는 643년에 원효(元曉, 617-686)가 창건했다는 것이다. 하지만 642년이면 의상이 불과 18세 때이고, 원효가 648년에 황룡사(皇龍寺)에서 출가한 것으로 알려져있어 두 가지 설 모두 신빙성이 떨어진다.[1]1991년 말 경북대학 박물관에서 실시한 발굴조사를 통해 대웅전터로 추정되는 기단부에서 통일신라시대의 유구가 확인되어 신라 말기에는 이미 있었던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2]

1284년에는 인각사가 일연(一然)의 하산소[3]로 지정되었다. 일연은 인각사에 5년간 머무르면서 나라의 후원을 받아 절을 크게 중창하였고[4], 두 번에 걸쳐 구산선문회를 열면서 인각사가 구산선문(九山禪門)의 중심사찰이 되도록 하였다.[5] 또한 이곳에서 『삼국유사』를 저술하기도 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는 본당 뒤에 무무당이 건립되어 총림법회가 열리기도 했다.

1407년에는 인각사가 조계종의 자복사찰(資福寺刹)로 지정되었다. 하지만 이후 점점 사세가 기울어[6], 1555년에는 인각사의 토지가 임고서원(臨皐書院)[7]에 이속되었다. 임진왜란 때는 대부분의 전각이 불에 타서 폐사상태에 이르렀고, 1721년에 다시 중수하였다.[8][9] 1890년에는 일연의 승탑지에 조상의 묘를 쓰려다 실패한 황보씨에 의해 일연선사 비와 전각이 파괴되었다. 1992년 이후 5차에 걸친 발굴조사를 마쳤고, 이를 토대로 2010년부터 2017년까지 8년간 국비 등 총 113억 원을 투입하여 인각사 복원사업을 추진중이다.[10]

지리

인각사는 화산(華山)의 서북쪽 기슭 평지에 자리하고 있다. 화산의 능선이 끝나는 곳에는 개울이 있는데 이 개울을 건너면 절이 자리한 인각 마을이 있다. 개울 맞은편에는 깎아지는 듯한 절벽이 있는데 그 정상은 학소대(鶴巢臺)라고 한다. 절 이름과 마을 이름에 공통적으로 들어간 '인각(麟角)'[11]이라는 명칭은 이러한 주변 지형과 관련이 깊다. 이 지역은 기린(麒麟)이 노닐다가 뿔이 암벽에 걸려서 떨어진 곳이라고 하는데 인각마을의 위치가 그 뿔의 지점에 해당되기 때문에 인각 마을이라 부르게 되었다고 전한다.[12][13]

인각사무무당기

이색(李穡)은 「인각사무무당기」에서 무무당의 낙성을 축하하면서 당시 인각사의 가람배치에 대한 평가를 했다. “대체로 불전(佛殿)[14]은 높은 곳에 있고 마당 가운데 탑이 있으며 왼쪽에 강당이 있고, 오른쪽에 살림채가 있는데 왼쪽 건물은 가깝고 오른쪽 건물은 멀어 건물 배치가 대칭을 이루지 못했는데 이제 무무당을 선방 옆에 세워 좌우 균형을 맞추게 되었다”고 일단 치하했다. 그러나 그래도 여전히 기존의 선방이 치우쳐 있다는 점을 면키 어려우니 역시 조금 옆으로 옮겨야 절의 모양과 제도가 완벽해지겠다며 지금 못하더라도 뒷사람들이 바로잡을 수 있기를 바란다고 쓰고 있다.[15][16]

관련문화재

지식 관계망

  • 보각국사 일연 지식관계망

관련항목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군위 인각사지 군위 인각사 A는 B의 터이다 A edm:isRelatedTo B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군위 인각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탑 군위 인각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군위 인각사 삼층석탑 군위 인각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군위 인각사 미륵당 석불좌상 군위 인각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군위 인각사 석불좌상 군위 인각사 A는 B에 있다 A edm:currentLocation B
일연 군위 인각사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 일연 A는 B를 위한 비이다 A ekc:isSteleOf B
삼국유사 군위 인각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284년 일연군위 인각사에 주석하며 삼국유사를 저술하였다
1289년 일연군위 인각사에서 입적하였다
1362년 군위 인각사에 무무당이 건립되었다
1407년 군위 인각사가 자복사찰로 지정되었다
1890년 군위 인각사 보각국사비가 훼손되었다
1992년 군위 인각사에 대한 발굴조사가 시작되었다
2010년 군위 인각사에 대한 복원사업이 시작되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가상 현실 - 전체 화면 보기

주석

  1.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
  2. "군위 인각사지", 『두산백과』online.
  3. 왕사로 책봉되어 주석한 곳을 말한다.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 』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4. 김용검에게 절을 수리하게 한뒤 토지 백여경을 하사하였다. 박기용, 『문학:명저의 탐방;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선비문화 1권, 2004, 58쪽.
  5.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6. 『신증동국여지승람』에는 "지금은 병속에 새 찾을 곳 없고, 낙조 속에 비바람에 씻긴 비석만 남아있네"라는 조선시대 초기 문장가인 유호인(1445~1494)이 쓴 글이 인용되는데, 이를통해 당시 인각사의 사세가 매우 기울어 있었음을 볼 수 있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
  7. "임고서원", 『두산백과』online.
  8. "⑬군위 인각사" 『금강신문』, 작성일: 2009년 3월 20일.
  9. 「강설루중수기」에 따르면 당시 대웅전과 극락전 두 전각의 기둥이 기울고 지붕이 새 비바람을 가리지 못하니 그 안에 모셔진 장륙존상도 훼손이 심했으며 경내도 수풀이 우거져 황폐화 되었다고 한다. 이에 따라 법당의 불상을 새로 조성하고 종루인 강설루와 요사를 개수하였다고 한다.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9쪽.
  10.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11. 기린의 뿔. 곧 지극히 드문 사물의 비유
  12.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136쪽.
  13. 이민수(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1969. 온라인 참조: "의흥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14. 불당을 말함
  15. 유홍준, "유홍준의 안목 - '검이불루 화이불치' 어쩌면 그렇게 자연과 잘 어울릴 수 있는가", 『경향신문』, 작성일: 2016년 3월 28일
  16. 『목은집』 목은문고 제1권 기. 온라인 참조: "인각사 무무당의 기문", 목은집 목은문고 제1권 기,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참고문헌

  • 김진덕, 「군위 인각사지 5차발굴조사 개보」, 신라사학보 15호, 2009, 271~296쪽.
  • 박기용, 『문학:명저의 탐방; 삼국유사의 산실 인각사』, 선비문화 1권 0호, 2004.
  • 사찰문화연구원, 『전국사찰총서16 - 경북의 전통사찰Ⅲ』, 사찰문화연구원, 2001.
  • 황원갑, 『고승과 명찰』, 바움, 2010.
  • 이민수(역), 『신증동국여지승람』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1969. 온라인 참조: "의흥현", 신증동국여지승람 제 27권 경상도 의흥현, 『한국고전종합DB』online, 한국고전번역원.
  • "⑬군위 인각사" 『금강신문』, 작성일: 2009년 3월 20일.
  • "군위인각사지,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인각사", 『조선왕조실록사전 』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 "군위 인각사지", 『두산백과』online.