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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정의==
[[집현전]] 부제학인 [[설순]]이 [[세종]] 16(1434년)에 왕명을 받아 편찬·간행한 『삼강행실도』에 언해를 붙여 간행한 책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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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34년에 [[집현전]] 부제학인 [[설순 | 설순(偰循)]]이 왕명을 받아 편간한 『삼강행실도』에 한글로 해석한 언해(諺解)를 붙여 1481년에 간행한 책이다.  
  
 
==내용==
 
==내용==
1434년([[세종]] 16)에 [[집현전]] 부제학 [[설순|설순(偰循, ?~1435)]]이 왕명을 받아 편찬·간행한 『삼강행실도』에 언해를 붙여 간행한 책이다.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등 타인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의 사적(事蹟)과 그림을 수록한 책이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1481년(성종 12)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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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한글 표기와 번역 양식에 따라 1481년 원간본 계통, 1581년(선조 14) 중간본 계통, 1730년([[영조]] 6) 중간본 계통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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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등 타인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의 사적(事蹟)과 그림을 수록한 책이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1481년(성종 12)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이 자료는 1730년 교서관과 각 도의 감영에서 간행된 책이다. 앞 시기에 간행된 판본과 이 판본의 가장 큰 차이는 언해가 훨씬 상세해지고 원문에 충실해졌다는 점에 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전통 회화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원간본은 세종 대의 한글 표기를 반영한 희소한 문헌 중 하나로 국어학적 가치가 있다. 『삼강행실도』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여러 차례 발행되었다는 점에서 각 시대별 한글의 변천 과정을 보여주는 좋은 자료이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06.28, 46-47쪽.</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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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한글 표기와 번역 양식에 따라 1481년 원간본 계통, 1581년([[선조]] 14년) 중간본 계통, 1730년([[영조]] 6년) 중간본 계통으로 구분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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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의 『삼강행실도』는 1730년 [[교서관]]과 각 도의 감영(監營:조선시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관아)에서 간행된 것이다. 앞 시기에 간행된 판본과 이 판본의 가장 큰 차이는 언해(諺解)가 훨씬 상세해지고 원문에 충실해졌다는 점에 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전통 회화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원간본은 세종 대의 한글 표기를 반영한 희소한 문헌 중 하나로 국어학적 가치가 있다. 『삼강행실도』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여러 차례 발행되어서 각 시대별 한글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46-47쪽.</REF>
==부연항목==
 
 
 
*효행록
 
*변계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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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연설명==
 
  
1428년 진주의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에 대하여 강상죄(綱常罪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죄)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다. [[세종]]은 엄벌을 내리기에 앞서 신하들과 함께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ref>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452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삼강행실도] </ref> 이 때 판무사 [[변계량 | 변계량(卞季良)]]이 "[[효행록]]과 같은 서적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읽히고 외우게 하여 효제와 예의에 충실하게 하라"고 건의하였다. 1434년 세종의 명에 의해 조자고이십사효량합벽(趙子固二十四孝量合壁)과 [[효행록]], 그리고 삼국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孝, 忠, 列의 모범 사례를 수집, 보충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간행되었다.<ref> 한관일 「 『三綱行實圖』의 社會敎育的 意義」, 『교육과학연구』9권,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5, </ref> 그러나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이때문에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곧바로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반포를 계획했으나 [[정창손]] 등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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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의 편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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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428년 진주의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해 강상죄(綱常罪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죄)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다. [[세종]]은 엄벌을 내리기에 앞서 신하들과 함께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ref>이원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452 삼강행실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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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삼강행실도의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1481년(성종 12)으로 추정된다. 1480년 [[어우동 사건]]으로 인해 사대부 집안 부녀자들의 음행(淫行) 문제가 불거졌다. 이 사건으로 인해 부녀자들에 대한 교화의 필요성을 느낀 성종은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간행 및 반사(頒賜)를 지시했는데 주목할 만한 점은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전체가 아닌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만을 간행했다는 것이다. 이러한 일의 원인을 파악하기 위해서는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간행에 직접적인 계기를 제공한 어우동 사건 뿐만이 아니라  부녀자들에 대한 유교윤리 보급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시대 상황도 고려해볼 필요가 있다. 성종 8년에 제정되었던 [[재가금지법 | 재가금지법(再嫁禁止法 : 재가한 부인의 자손은 관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이 제정되어 부녀자의 재가를 막는 간접적인 수단으 되었다. 이 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부경이부(不更二夫)의 규범을 보급할 필요가 있었는데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는 이러한 도덕 규범에 부합하는 서적이었다. 이에 [[어우동]]사건을 계기로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를 간행하여 烈의 규범을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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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때 판무사 [[변계량 | 변계량(卞季良)]]이 [[효행록 | 효행록(孝行錄)]]과 같은 서적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읽히고 외우게 하여 효제와 예의에 충실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434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조선 시대 홍문관의 정삼품 당상관 벼슬)[[설순 | 설순(偰循)]]의 주도 하에 [[조맹견]]의 『조자고이십사효서화합벽(趙子固二十四孝書畵合壁)』과 [[효행록]]이, 그리고 삼국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효자·충신·열녀의 모범 사례를 수집, 보충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간행되었다.<ref> 한관일, 「『三綱行實圖』의 社會敎育的 意義」, 『교육과학연구』9권,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5. </ref> 그러나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이를 아쉬워했던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곧바로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반포를 계획했으나, [[정창손]] 등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ref>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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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언해본이 간행된 후 성종 21년 보다 효과적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보급을 위해 기존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을 산정한  『삼강행실도 산정본(三綱行實圖 刪定本)』을 반사했다. 이후 보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모두 이 산정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ref>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ref>
 
  
==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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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언해===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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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삼강행실도의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1481년(성종 12)으로 추정된다. 1480년 [[성종]]은 [[어우동]] 사건을 계기로 부녀자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삼강행실열녀도 |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간행 및 반사(頒賜)<REF>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내려 나누어 줌</REF>를 지시했다.
파일:삼강행실도_몽주운명.jpg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http://jsg.aks.ac.kr/home/exhibit/special.do] 한글전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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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전체가 아닌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만을 간행한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는 부녀자들에 대한 유교윤리 보급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시대 상황과 당시 ‘[[어우동 사건]]’이 지배층 사회에 일으킨 파장, 그리고 성종이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제도 정비를 추진하고 있었던 점 등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성종은 어우동 사건이 발생하기 3년 전인 1405년(성종 8)에 [[재가금지법]](再嫁禁止法)<ref>재가한 부인의 자손은 관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ref>을 제정하여 부녀자의 재가를 막으려 한 적이 있었다. 이 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경이부(不更二夫)<ref>아녀자가 두 지아비를 두지 않는다는 뜻. 재가하지 않는다는 의미</ref>의 규범을 보급할 필요가 있었고,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는 이러한 도덕 규범에 부합하는 서적이었다. 그러므로 성종은 어우동 사건을 계기로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를 간행하여 열(烈)의 규범을 보급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ref>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ref>
파일:삼강행실도_양산.jpg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600000,38]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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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공공누리_디지털양산문화대전.jpg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http://yang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yangsan&dataType=0403&contents_id=GC014P0995]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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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삼강행실도의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1481년(성종 12)으로 추정된다. 1480년 [[성종]]은 부녀자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삼강행실열녀도 |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간행 및 반사(頒賜)<REF>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내려 나누어 줌</REF>를 지시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전체가 아닌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만을 간행한 것은 주목할만한 점인데, 이는 바로 이전 해에 발생한 [[어우동 사건]] 때문이었다. 양반가의 안주인과 공신, 대신들간의 성추문은 사회적으로 큰 몰의를 빚었고 성종에게도
파일:삼강행실도_대전_01.jpg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190000,25]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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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은 성리학에 입각한 법제를 정비하는 동시에 부녀자들에 대한 유교윤리 보급에도 신경을 쓰고 있던 것으로 보인다.  
파일:삼강행실도_대전_02.jpg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190000,25]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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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대 상황과 당시 사회적으로 큰 몰의를 빚은 '어우동 사건',  
파일:삼강행실도_국립민속박물관.JPG | 민속 023920 [http://nfm.museum.go.kr/nfm/getDetailArtifact.do?MCSJGBNC=PS01002001001&MCSEQNO1=023920&MCSEQNO2=00000&SEARCH_MODES=KEYWORDS&SEARCH_STR=#]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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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한 성종 8년에 제정되었던 [[재가금지법]](再嫁禁止法)<ref>재가한 부인의 자손은 관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ref>은 부녀자의 재가를 막는 간접적인 수단이 되었다. 이 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경이부(不更二夫)<ref>아녀자가 두 지아비를 두지 않는다는 뜻. 재가하지 않는다는 의미</ref>의 규범을 보급할 필요가 있었는데,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는 이러한 도덕 규범에 부합하는 서적이었다. 이에 [[어우동]]사건을 계기로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를 간행하여 열(烈)의 규범을 보급하고자 한 것이다.
</galle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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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언해본이 간행된 후 성종 21년에는 보다 효과적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보급을 위해 기존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을 산정(刪定)<ref>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을 깎고 다듬어서 글을 잘 정리함</ref>한 『삼강행실도 산정본(三綱行實圖 刪定本)』을 반사(頒賜)<ref>임금이 물건을 나누어주는 것</ref>하였다. 이후 보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모두 이 산정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ref>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ref>
  
==관련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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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삼강행실도 언해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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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http://dh.aks.ac.kr/Encyves/Graph/A017/A017.htm 속삼강행실도 언해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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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강행실도 언해]]||간행년||1730년(영조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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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간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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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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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각자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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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갤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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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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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 삼강행실도 01 표지.jpg | 표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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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 삼강생실도 02 효자편.jpg | 효자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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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양산.jpg  | 본문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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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몽주운명.jpg | 본문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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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 삼강행실도 03 대전.jpg | 본문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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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한글팀 삼강행실도 04 국립민속박물관.JPG | 본문 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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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몽주운명.jpg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전시 [http://jsg.aks.ac.kr/home/exhibit/special.do] 한글전시도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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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양산.jpg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21,01600000,38]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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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공공누리_디지털양산문화대전.jpg | 경상남도 유형문화재 제160호 [http://yangsan.grandculture.net/Contents?local=yangsan&dataType=0403&contents_id=GC014P0995] 공공누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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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대전_01.jpg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190000,25]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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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대전_02.jpg  | 대전광역시 문화재자료 제19호  [http://www.cha.go.kr/korea/heritage/search/Culresult_Db_View.jsp?mc=NS_04_03_01&VdkVgwKey=31,00190000,25] 문화재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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파일:삼강행실도_국립민속박물관.JPG |  민속 023920 [http://nfm.museum.go.kr/nfm/getDetailArtifact.do?MCSJGBNC=PS01002001001&MCSEQNO1=023920&MCSEQNO2=00000&SEARCH_MODES=KEYWORDS&SEARCH_STR=#] 국립민속박물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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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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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yglo, 서울 디자인 산 : 삼강행실도(게시일: 2012. 7. 15.)''' - [https://www.youtube.com/ 유튜브]에서 "삼강행실도"로 검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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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yglo, 서울 디자인 산 : 삼강행실도(게시일: 2012. 7. 15.)''' - https://youtu.be/Y-nGI-e91MM
  
*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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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https://youtu.be/Y-nGI-e91MM nexyglo, 서울 디자인 산 : 삼강행실도(게시일: 2012. 7. 15.)]'''
*#한관일 「 『三綱行實圖』의 社會敎育的 意義」, 『교육과학연구』9권,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5,
 
*#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온라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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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nexyglo, 서울 디자인 산 : 삼강행실도(게시일: 2012. 7. 15.)'''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65718 민족문화대백과사전 : 삼강행실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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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iframe width="640" height="360" src="https://youtu.be/Y-nGI-e91MM" frameborder="0" allowfullscreen></ifram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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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석==
 
==주석==
 
<referenc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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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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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 거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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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행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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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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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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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관일 「 《三綱行實圖》의 社會敎育的 意義」, 『교육과학연구』9권,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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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
*웹자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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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원호,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6452 삼강행실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분류:한글고문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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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한글고문서]]
[[분류:장원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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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전시자료]] [[분류:문헌]]  
[[분류:인문정보편찬연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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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장원석]] [[분류:김선미]] [[분류:서동신]]
[[분류:스토리텔링]]
 

2017년 11월 30일 (목) 23:08 기준 최신판

삼강행실도
한글팀 삼강행실도 양산.jpg
한자명칭 三鋼行實圖
영문명칭 Illustrated Conduct of the Three Bonds
작자 설순
간행시기 1730년(영조6년)
간행처 집현전
소장처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청구기호 4-4106
유형 고서
크기(세로×가로) 36.2×22.0㎝
판본 목판본
수량 2冊
표기문자 한글, 한자


정의

1434년에 집현전 부제학인 설순(偰循)이 왕명을 받아 편간한 『삼강행실도』에 한글로 해석한 언해(諺解)를 붙여 1481년에 간행한 책이다.

내용

장서각 한글특별전 내용

『삼강행실도』는 우리나라와 중국의 효자·충신·열녀 등 타인의 모범이 될 만한 인물의 사적(事蹟)과 그림을 수록한 책이다. 『삼강행실도』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정확하지 않으나, 대략 1481년(성종 12) 경으로 추정되고 있다. 언해본 『삼강행실도』는 한글 표기와 번역 양식에 따라 1481년 원간본 계통, 1581년(선조 14년) 중간본 계통, 1730년(영조 6년) 중간본 계통으로 구분된다. 사진의 『삼강행실도』는 1730년 교서관과 각 도의 감영(監營:조선시대 관찰사가 업무를 보던 관아)에서 간행된 것이다. 앞 시기에 간행된 판본과 이 판본의 가장 큰 차이는 언해(諺解)가 훨씬 상세해지고 원문에 충실해졌다는 점에 있다. 『삼강행실도』는 조선의 윤리 및 가치관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되고, 전통 회화사의 연구에도 귀중한 자료가 된다. 특히 원간본은 세종 대의 한글 표기를 반영한 희소한 문헌 중 하나로 국어학적 가치가 있다. 『삼강행실도』는 15세기부터 18세기까지 여러 차례 발행되어서 각 시대별 한글의 변천 과정을 볼 수 있는 좋은 자료이다..[1]

삼강행실도의 편찬

1428년 진주의 김화가 아버지를 살해한 사건이 발생해 강상죄(綱常罪 : 사람이 지켜야 할 도리에 어긋난 죄)로 엄벌하자는 주장이 논의되었다. 세종은 엄벌을 내리기에 앞서 신하들과 함께 세상에 효행의 풍습을 널리 알릴 수 있는 방법을 강구하였다.[2]
이 때 판무사 변계량(卞季良) 효행록(孝行錄)과 같은 서적을 반포하여 백성들에게 읽히고 외우게 하여 효제와 예의에 충실하게 할 것을 건의하였다. 1434년 왕명을 받은 집현전 부제학(副提學:조선 시대 홍문관의 정삼품 당상관 벼슬)인 설순(偰循)의 주도 하에 조맹견의 『조자고이십사효서화합벽(趙子固二十四孝書畵合壁)』과 효행록이, 그리고 삼국시대로부터 조선 초기까지의 효자·충신·열녀의 모범 사례를 수집, 보충하여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가 간행되었다.[3] 그러나 한문을 읽지 못하는 일반 백성들에게 끼치는 영향은 미미했다. 이를 아쉬워했던 세종은 1443년 훈민정음이 창제되자 곧바로 삼강행실도 언해본의 반포를 계획했으나, 정창손 등의 반대에 부딪쳐 무산되었다. [4]

삼강행실도 언해

이후 삼강행실도의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된 시기는 1481년(성종 12)으로 추정된다. 1480년 성종어우동 사건을 계기로 부녀자들의 교화를 목적으로 하는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간행 및 반사(頒賜)[5]를 지시했다.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 전체가 아닌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만을 간행한 것은 주목할 만한 점이다. 이는 부녀자들에 대한 유교윤리 보급의 중요성이 대두되었던 시대 상황과 당시 ‘어우동 사건’이 지배층 사회에 일으킨 파장, 그리고 성종이 성리학 이념에 입각한 제도 정비를 추진하고 있었던 점 등 세 가지 요소가 맞물린 결과라고 볼 수 있다. 앞서 성종은 어우동 사건이 발생하기 3년 전인 1405년(성종 8)에 재가금지법(再嫁禁止法)[6]을 제정하여 부녀자의 재가를 막으려 한 적이 있었다. 이 법의 정당성을 부여하기 위해 불경이부(不更二夫)[7]의 규범을 보급할 필요가 있었고,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는 이러한 도덕 규범에 부합하는 서적이었다. 그러므로 성종은 어우동 사건을 계기로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를 간행하여 열(烈)의 규범을 보급하고자 한 것으로 보인다.[8]
『삼강행실열녀도(三綱行實烈女圖)』의 언해본이 간행된 후 성종 21년에는 보다 효과적인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의 보급을 위해 기존의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을 산정(刪定)[9]한 『삼강행실도 산정본(三綱行實圖 刪定本)』을 반사(頒賜)[10]하였다. 이후 보급된 『삼강행실도(三綱行實圖)』는 모두 이 산정본을 수정, 보완한 것이다. [11]


연계 자원 보러 가기
몽주운명
속삼강행실도


지식 관계망

  • 삼강행실도 언해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세종 삼강행실도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설순 삼강행실도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집현전 삼강행실도 편찬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dm:isRelatedTo B
교서관 삼강행실도 편찬 A는 B에 참여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삼강행실도 설순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A dcterms:creator B
집현전 설순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삼강행실도 교서관 A는 B에 의해 간행되었다 A dcterms:publisher B
삼강행실도 삼강행실도 편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강행실도 언해 삼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효행록 삼강행실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강행실도 언해 삼강행실도 A는 B의 언해본이다 A edm:isDerivativeOf B
세조 성종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세종 세조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성종 삼강행실도 언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강행실열녀도 언해 삼강행실도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강행실도 언해 삼강행실열녀도 언해 A는 B를 포함한다 A dcterms:hasPart B
삼강행실열녀도 언해 삼강행실열녀도 언해 편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성종 삼강행실열녀도 언해 편찬 A는 B를 명령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재가금지법 삼강행실열녀도 언해 편찬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성종 재가금지법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삼강행실열녀도 언해 편찬 어우동사건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어우동 어우동사건 A는 B를 주도하였다 A edm:isRelatedTo B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삼강행실도 언해 A는 B에 소장되었다 A edm:currentLocation B

시간정보

시간 내용
1434년 세종삼강행실도 언해의 편찬을 명했다
1481년 어우동사건을 계기로 삼강행실도 언해의 언해본이 최초로 간행되었다
1490년 성종의 명으로 삼강행실도 언해의 산정본(刪定本)이 간행되었다
1581년 선조삼강행실도 언해의 중간본 간행을 명했다
1730년 영조삼강행실도 언해의 중간본 간행을 명했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581892 126.978970 삼강행실도는 국립민속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7.392238 127.054309 삼강행실도는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에 소장되어 있다
36.336710 127.335169 삼강행실도는 대전역사박물관에 소장되어 있다
35.335594 129.037482 삼강행실도는 양산시청에 소장되어 있다

시각자료

갤러리

영상

  • nexyglo, 서울 디자인 산 : 삼강행실도(게시일: 2012. 7. 15.) - 유튜브에서 "삼강행실도"로 검색

주석

  1.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46-47쪽.
  2. 이원호, "삼강행실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3. 한관일, 「『三綱行實圖』의 社會敎育的 意義」, 『교육과학연구』9권,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5.
  4. 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5. 임금이 녹봉이나 물건을 내려 나누어 줌
  6. 재가한 부인의 자손은 관직을 맡지 못하게 하는 법
  7. 아녀자가 두 지아비를 두지 않는다는 뜻. 재가하지 않는다는 의미
  8. 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9. 쓸데없는 글자나 구절을 깎고 다듬어서 글을 잘 정리함
  10. 임금이 물건을 나누어주는 것
  11. 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한글 - 소통과 배려의 문자』, 한국학중앙연구원 출판부, 2016.
  • 논문
    • 한관일 「 《三綱行實圖》의 社會敎育的 意義」, 『교육과학연구』9권, 청주대학교 교육문제연구소, 1995.
    • 김훈식, 「朝鮮初期 『三綱行實圖』 보급의 대상」, 『仁濟論叢 Vol.12』, 인제대학교, 1996.
  • 웹자원
    • 이원호, "삼강행실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