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주정씨 우복종택"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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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 진주정씨는 강씨, 하씨와 더불어 [[진양 3성(晉陽3姓)]]의 하나로 불린 진주의 토반, 거족이었다. 이들은 골시대 이래로 진주의 토착세력으로서 강력한 재지적 기반을 구축하는 과거와 관직을 통해 문호를 신장시켜 왔으며 강씨, 하씨 등 진주일대 대성들과의 혼맥을 바탕으로 사회적 기반을 확충해 나갔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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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 ||
− | 정경세의 후손인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ref> 이 중 한글문서인 [[연행만록]] | + | 정경세의 후손인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노력하는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ref> 이 중 한글문서인 「[[연행만록]]」이 2016년 장서각에서 진행한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 |
− |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 + |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다.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ref>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 </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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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5일 (토) 02:18 기준 최신판
진주정씨 우복종택 (晋州鄭氏 偶伏宗宅) |
|
대표명칭 | 진주정씨 우복종택 |
---|---|
한자표기 | 晋州鄭氏 偶伏宗宅 |
유형 | 주택(한옥) |
시대 | 조선 |
관련유물유적 | 연행만록 |
|
목차
정의
경상북도 상주시에 있는 진주 정씨 우복 가문의 종택이다.
내용
진주 정씨와 우복가문
우복 종택은 영조가 우복 정경세(1563-1633)의 덕을 기려 하사한 땅에 5세손 정주원이 1750년대에 건립한 것으로 추정되는 가옥이다. 우복 종택은 동향으로 지어졌다. 전체는 튼 ㅁ자 형태로 ㄱ 자형 안채와 ㅡ자 형 곁채가 ㄷ자 형으로, 그 앞쪽에 전면 5칸 측면 1칸의 사랑채가 배치되었다. 사당은 동쪽에 있다. 뒤쪽에 있는 대산루는 입재 정종로가 1700년 대 후반에 지어 대산루라고 이름붙인 것으로 추정하고 있다. 대산루는 우리나라에서 개인 가옥에서 보기 드분 이층 건물이다. 누정건물로 2층은 흔하지만 2층에 온돌방을 들인 건물은 거의 없다는 점에서 주목받고 있다.[1]
우복 종택 소장 고서와 고문서
정경세의 후손인 정재봉은 선대의 문적을 유지, 보존하는 데 노력하는 성혈을 다하는 한편 한국학 연구를 촉진하는 차원에서 일체의 가문 소장 전적을 한국학중앙연구원에 대여하였다.[2] 이 중 한글문서인 「연행만록」이 2016년 장서각에서 진행한 한글특별전에 전시되었다. 종택에서 소장하고 있던 문서들은 1948년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대부분이 소실되었으며 현재로서는 화재시에 어느 정도의 전적이 소실되었는지 조차 알 수 없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우복 종택에는 결코 적지 않은 양의 전적이 남아 있다. 종택에 소장된 고문서와 고서는 조선 후기 향촌사회사, 유학사는 물론 고문헌학, 서지학 연구에 있어 커다란 보탬이 될 것으로 보인다. [3]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진주정씨 우복종택 | 진주 정씨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진주정씨 우복종택 | 정경세 |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 A ekc:isNamesakeOf B |
연행만록 | 정경세 | A는 B에 의해 저술되었다 | A dcterms:creator B |
연행만록 | 진주정씨 우복종택 | A는 B에 소장되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진주정씨 우복종택 | 정경세 | A는 B에서 이름을 땄다 | A ekc:isNamesakeOf B |
시간 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00년대 | 정택과 정의생을 필두로 한 진주정씨 우복종가가 상주로 입향하였다. |
1500년 전후 | 정번이 율리로 종택을 이건하였다 |
1750년 전후 | 정주원이 종가를 우산으로 이건하였다. |
1946년 | 종택에 발생한 큰 화재로 인해 문건의 절반 이상이 소실되었다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68-9쪽.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287쪽.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고문서연구실, 「尙州 晉州鄭氏 愚伏宗宅 山水軒 所藏 典籍類의 내용과 성격」, 『晉州鄭氏 愚伏宗宅 寄託典籍』, 한국학중앙연구원, 2006, 315쪽.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한국정신문화연구원, 『선비가의 학문과 벼슬 : 진주정씨 우복종택』, 한국정신문화연구원, 2004.
- 논문
- 정성희, 「조선시대 양반가문 소장 曆書類의 현황과 가치」, 『史學硏究』 Vol.86, 한국사학화, 2007.
유용한 정보
- 김성대, "상주 우복종가", 『경북일보』, 작성일: 2016년 07월 03일.
- 진용숙, "名家를 찾아서 - 10. 진주 정씨 우복종택", 『경북일보』, 작성일: 2011년 03월 10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