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갑인예송"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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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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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선왕후]]의 국상에 대한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논쟁.
  
=='''정의'''==
 
조선 후기 현종·숙종대에 걸쳐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에 대한 조대비(趙大妃: 인조의 계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과 남인간의 두 차례에 걸친 논쟁.
 
 
=='''내용'''==
 
=='''내용'''==
===[[예송논쟁]]이 일어난 원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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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와 [[조선 효종|봉림대군]]===
[[조선 인조|인조]]에게는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도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조선 효종|봉림대군]]에게는 뒤에 [[조선 현종|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조선 효종|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방법이었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고, [[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강빈(姜嬪)]]시아버지인 [[조선 인조|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은 어머니 [[민회빈 강씨|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가서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ref>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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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인조|인조]]에게는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조선 효종|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는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조선 효종|봉림대군]]에게도 훗날 [[조선 현종|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가 [[조선 효종|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절차였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조선 효종|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었다.
이후 [[인선왕후]]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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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세자]]의 부인 [[민회빈 강씨|강빈(姜嬪)]]시아버지인 [[조선 인조|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어머니 [[민회빈 강씨|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ref>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년 10월 7일.</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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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갑인예송]] 발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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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후 봉림대군이 [[조선 효종|효종]]으로 즉위했다가 10년 만에 죽고, 1659년 [[조선 현종|현종]]이 즉위하였다. 그 후 1674년 현종의 어머니이자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였다. 그러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이후 [[인선왕후]]가 죽자 [[조선 인조|인조]]의 계비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계모인 [[장렬왕후|자의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15년 전인 1659년 효종 승하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복 기간 때문에 벌어졌던 1차 예송 때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갑인예송]]의 발발과 경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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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자와 장자===
*1674년(현종 15) 2월 [[조선 현종|현종]]의 어머니이자 [[조선 효종|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게 되자 이번에는 그녀에 대한 [[자의대비|조씨]]의 복제가 문제되었다. 15년 전과 꼭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국제인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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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유생[[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장렬왕후|자의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조선 현종|현종]]은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인선왕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유학(幼學) [[도신징|도신징(都愼徵)]]은 [[자의대비|조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조선 현종|현종]]은 행판중추부사 [[김수항|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효종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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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인의 승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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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현종|현종]]은 [[조선 효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 [[인선왕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조선 효종|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조선 현종|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ref>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ref>
  
 
=='''지식 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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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논문
 
*논문
**손흥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예송(禮訟)의 특징(特徵)과 의미(意味)」, 『儒學硏究』26, 忠南大學校 儒學硏究所, 2012, 57-79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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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세호, 「백호 윤휴의 기해 예송관」, 『韓國思想과 文化』, Vol.76, No.-, 한국사상문화학회, 2015, 205-228쪽.
**장세호, 「백호 윤휴의 기해 예송관」, 『韓國思想과 文化』76, 한국사상문화학회, 2015, 205-22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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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손흥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예송(禮訟)의 특징(特徵)과 의미(意味)」, 『儒學硏究』,Vol.26, No.-, 忠南大學校 儒學硏究所, 2012, 57-79쪽.  
  
===유용한 정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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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웹자원
*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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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두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796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10월 7일.   
*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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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경희,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E0024 예송]",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분류:한글고문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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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사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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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류:이창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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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24일 (금) 23:56 기준 최신판

갑인예송(甲寅禮訟)
Political battle.png
대표명칭 갑인예송
한자표기 甲寅禮訟
유형 사건
시대 조선시대
날짜 1674년
관련인물 조선 현종, 장렬왕후, 송시열, 김수항, 도신징
관련단체 남인 서인


정의

인선왕후의 국상에 대한 자의대비의 복상기간(服喪期間)을 둘러싸고 일어난 서인남인간의 논쟁.

내용

소현세자봉림대군

인조에게는 소현세자(昭顯世子)·봉림대군(鳳林大君)·인평대군(麟坪大君)의 세 아들이 있었다. 소현세자에게는 석철(石鐵)·석린(石麟)·석견(石堅)의 세 아들이 있었으며, 봉림대군에게도 훗날 현종이 되는 아들 한 명이 있었다. 소현세자봉림대군과 함께 청나라에 끌려가 온갖 고초를 겪다가 돌아온 지 석달 만에 죽으니, 당연히 원손(元孫)인 소현세자의 첫째아들이 세손으로 책봉되어 왕위를 잇는 것이 종법에 따른 왕위계승절차였다. 그러나 둘째아들인 봉림대군이 당시 사림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주화파(主和派)의 지지를 받으며 세자로 책봉되었다. 소현세자의 부인 강빈(姜嬪)은 시아버지인 인조를 독살하려 했다는 모함을 받아 죽었다. 또 소현세자의 세 아들도 어머니 강빈의 죄에 연루되어 제주도에 유배되어 첫째·둘째아들이 죽고 막내아들만 살아남게 되었다.[1]

갑인예송 발발

이후 봉림대군이 효종으로 즉위했다가 10년 만에 죽고, 1659년 현종이 즉위하였다. 그 후 1674년 현종의 어머니이자 효종의 왕비인 인선왕후(仁宣王后) 장씨가 사망하였다. 그러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이후 인선왕후가 죽자 인조의 계비이자 효종의 계모인 자의대비가 입어야 하는 상복의 기간이 문제가 되었다. [2] 15년 전인 1659년 효종 승하 때 인조의 계비인 조대비의 상복 기간 때문에 벌어졌던 1차 예송 때와 똑같은 상황이 재현된 것이다.

서자와 장자

경국대전』에는 장자부(長子婦)는 기년복, 중자부(衆子婦)는 대공복으로 정하고 있었다. 예조에서는 처음에 장자부 기년복으로 올렸다가 곧 중자부 대공복으로 고쳐 올렸다..[3] 유생도신징(都愼徵)자의대비의 복제가 처음에는 기년복이었다가 나중에 대공복으로 고쳐진 이유를 따졌다. 현종김수항(金壽恒), 영의정 김수흥등에게 복제가 바뀌게 된 경위를 살피게 하였다. 김수항 등은 '사람들이 기해년에 삼년복 대신 기년복을 한 것은 고례의 중자를 위한 복제로 여겼던 것이며 이번에도 예조에서 이러한 인식에 따라 대공복으로 고쳐 올린 것이다'고 답하였다. 현종인선왕후를 장자부로 보는지 중자부로 보는지를 다시 한번 따져 물었고 신하들은 『경국대전』의 '중자부 대공설'을 따랐다고 답하였다.

남인의 승리

현종효종을 중자(서자), 효종비 인선왕후를 중자부(서자부)로 바라보는 서인예설을 뒤엎고 효종과 효종비 인선왕후를 장자와 장자부로 바라보는 남인예설에 손을 들어줌으로써 자신의 뜻을 분명하게 표현하였다. 현종은 이러한 처분과 함께 서인측 대공복제론에 책임을 물어 서인 영의정 김수흥(金壽興)을 유배하고 남인 허적(許積)을 영의정에 임명하였다.[4]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조선 인조 조선 효종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남인 도신징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조선 효종 조선 현종 A는 아들 B를 두었다 A ekc:hasSon B
조선 효종 인선왕후 A는 B의 아내이다 A ekc:hasHusband B
조선 인조 장렬왕후 A는 B의 아내이다 A ekc:hasHusband B
장렬왕후 갑인예송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서인 김수항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서인 김수흥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남인 허적 A는 B를 구성원으로 갖는다 A foaf:member B
남인 서인 A는 B와 대립하였다 A edm:isRelatedTo B
조선 현종 갑인예송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인선왕후 갑인예송 A는 B와 관련이 있다 A edm:isRelatedTo B

시간정보

시간정보 내용
1659년 기해예송이 일어났다
1674년 갑인예송이 일어났다

주석

  1. 지두환, "예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2014년 10월 7일.
  2.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3.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4.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장세호, 「백호 윤휴의 기해 예송관」, 『韓國思想과 文化』, Vol.76, No.-, 한국사상문화학회, 2015, 205-228쪽.
    • 손흥철, 「우암(尤庵) 송시열(宋時烈)의 예송(禮訟)의 특징(特徵)과 의미(意味)」, 『儒學硏究』,Vol.26, No.-, 忠南大學校 儒學硏究所, 2012, 57-79쪽.
  • 웹자원
    • 지두환, "예송",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4년 10월 7일.
    • 정경희, "예송", 『한국사콘텐츠』online, 국사편찬위원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