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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이 시기는 [[청 태종|청 태종(淸 太宗)]]에 의하여 조선 정책이 달라진 시기였다. [[청 태종]]의 강경책으로 인해 청과 조선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게다가 [[청 태종]] 초기의 대기근과, 조선이 [[모문룡|모문룡(毛文龍)]]을 지원했던 일은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ref>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2013, 236~239쪽.</ref> 2차례에 걸친 [[청]]의 침략으로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였다.<ref>『仁祖實錄』 15년(1637) 1월 庚午: 「龍馬兩胡來城外趣上出城」</ref> [[인조]]의 항복으로 [[소현세자|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ref>『仁祖實錄』 15년(1637) 2월 戊寅: 「九王撤兵還以王世子及嬪宮鳳林大君及夫人西行」</ref> [[인조]]대에는 [[대동법|대동법(大同法)]] 시행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인조]] 즉위 초기부터 [[대동법]]의 확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ref>『仁祖實錄』 1년(1623) 4월 癸亥: 「戶曹啓曰宣惠之法」</ref> 이후로도 계속하여 주요 정치적 과제로 제시되었다. 이때 [[김육|김육(金堉)]]이 등장하여 [[대동법]]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이후 전국 확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ref>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0, 국사편찬위원회, 2013, 485~486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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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
*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 | *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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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더 읽을거리=== | ===더 읽을거리=== |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028 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47028 인조]",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6 인조]", 콘텐츠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http://contents.koreanhistory.or.kr/id/N0076 인조]", 콘텐츠 검색,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사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국사편찬위원회.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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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1월 13일 (월) 21:52 기준 최신판
인조(仁祖) | |
대표명칭 | 인조 |
---|---|
한자표기 | 仁祖 |
생몰년 | 1595년 11월 7일-1649년 5월 8일(음), 재위 1623년 3월 13일-1649년 5월 8일(음) |
본관 | 전주 이씨(全州 李氏) |
호 | 휘 종(倧), 호 송창(松窓) |
자 | 화백(和伯), 천윤(天胤) |
출생지 | 조선 황해도 해주군 |
사망지 | 창덕궁 대조전(昌德宮 大造殿) |
시대 | 조선 |
대표직함 | 왕 |
배우자 | 정비 인렬왕후 한씨(仁烈王后 韓氏) 계비 장렬왕후 조씨(莊烈王后 趙氏) |
부 | 원종(元宗) |
모 | 인헌왕후(仁獻王后) |
자녀 | 6남 1녀, 소현세자(昭顯世子), 효종(孝宗), 인평대군(麟坪大君), 용성대군(龍城大君), 효명옹주(孝明翁主), 승선군(崇善君), 낙선군(樂善君) |
전임자 | 광해군(光海君) |
후임자 | 효종 |
능묘 |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 갈현리 산 25-1 장릉(長陵) 37.773515, 126.7068603 |
성격 | 인물 |
유형 | 왕 |
목차
정의
조선의 제 16대 왕이다.
내용
광해군을 폐위한 반정으로 왕위에 올랐으며, 정묘호란(丁卯胡亂)과 병자호란(丙子胡亂)을 겪었다.
생애
황해도 해주(海州)에서 태어났으며 원종과 인헌왕후의 장남이다. 1607년(선조 40) 능양군(綾陽君) 군호를 받았다.[1] 인조가 왕이 된 계기는 광해군 재위기간에 동생인 능창군(綾昌君)이 역모로 몰려 처형된 사건 때문이었다.[2] 인조는 이에 김류(金瑬), 이귀(李貴), 김자점(金自點) 등과 반정을 모의하였다.[3] 1623년(인조 1) 인조반정이 성공하여 광해군을 폐위시키고 강화도로 유배 보낸 후 경운궁(慶運宮)에서 즉위하였다.[4] 인조의 재위 초기에는 반정공신 사이의 대립 끝에 이괄(李适)의 난이 일어났다.[5] 이로 인해 한양(漢陽)이 점령당하였으며, 왕은 공주(公州)까지 피난갔다가 정충신(鄭忠信) 등이 난을 진압하여 돌아왔다.[6]
이 시기는 청 태종(淸 太宗)에 의하여 조선 정책이 달라진 시기였다. 청 태종의 강경책으로 인해 청과 조선의 관계는 악화되었다. 게다가 청 태종 초기의 대기근과, 조선이 모문룡(毛文龍)을 지원했던 일은 전쟁의 불씨가 되었다.[7] 2차례에 걸친 청의 침략으로 조선은 청과 군신관계를 맺고, 인조는 삼전도(三田渡)에서 삼배구고두(三拜九叩頭)를 행하였다.[8] 인조의 항복으로 소현세자(昭顯世子)와 봉림대군(鳳林大君)이 청에 볼모로 잡혀갔다.[9] 인조대에는 대동법(大同法) 시행이 본격적으로 논의되었다. 인조 즉위 초기부터 대동법의 확대가 논의되기 시작하였으며,[10] 이후로도 계속하여 주요 정치적 과제로 제시되었다. 이때 김육(金堉)이 등장하여 대동법을 꾸준히 추진하였고 이후 전국 확대의 기틀을 마련하였다.[11]
사후
경기도 파주시 탄현면에 인조와 인열왕후의 능인 '장릉(長陵)'이 있는데, 1970년 5월 26일 사적 제 203호로 지정되었다.[12]
거행 의례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인조 | 인렬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인조 | 장렬왕후 | A는 B의 남편이다 | A ekc:hasWife B |
인조 | 왕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인조 | 즉위 | A는 B를 거행하였다 | A ekc:participates B |
시간정보
시간 | 내용 |
---|---|
1623년 3월 13일 | 인조는 즉위식을 거행하였다 |
시각자료
갤러리
인조와 장렬왕후의 능인 파주 장릉.[13]
주석
- ↑ 『仁祖實錄』: 「行狀」
- ↑ 『光海君日記』 7년(1615) 11월 己丑: 「殺佺于圍所」
- ↑ 『仁祖實錄』: 「行狀」
- ↑ 『仁祖實錄』 1년(1623) 3월 癸卯: 「上擧義兵」
- ↑ 『仁祖實錄』 2년(1624) 1월 己卯: 「副元帥李适殺禁府都事高德祥沈大臨宣傳官金芝秀中使金天霖等擧兵反」
- ↑ 『仁祖實錄』 2년(1624) 2월 乙未: 「官軍與賊大戰于鞍峴賊兵大敗遁走」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2013, 236~239쪽.
- ↑ 『仁祖實錄』 15년(1637) 1월 庚午: 「龍馬兩胡來城外趣上出城」
- ↑ 『仁祖實錄』 15년(1637) 2월 戊寅: 「九王撤兵還以王世子及嬪宮鳳林大君及夫人西行」
- ↑ 『仁祖實錄』 1년(1623) 4월 癸亥: 「戶曹啓曰宣惠之法」
-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0, 국사편찬위원회, 2013, 485~486쪽.
- ↑ "파주 장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 ↑ "파주 장릉", 문화재 검색,
『문화재청』online , 문화재청.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광해군일기』
- 『인조실록』
- 계승범, 「계해정변(인조반정)의 명분과 그 인식의 변화」, 『南冥學硏究』 26, 경상대학교 남명학연구소, 2008.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29, 국사편찬위원회, 2013.
- 국사편찬위원회, 『한국사』 30, 국사편찬위원회, 2013.
- 박현모, 「10년 간의 위기: 정묘-병자호란기의 공론정치 비판」, 『한국정치학회보』 37-2, 한국정치학회, 2003.
- 이영춘, 「병자호란(丙子胡亂) 전후의 조선,명(明),청(淸) 관계와 김육의 『조경일록(朝京日錄)』 」, 『朝鮮時代史學報』 38, 조선시대사학회, 2006.
- 이정철, 『대동법: 조선 최고의 개혁』, 역사비평사, 2010.
- 한국역사연구회 17세기정치사연구반, 『조선중기 정치와 정책: 인조~현종 시기』, 아카넷, 2003.