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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역사=== | ===[[경복궁]]의 역사=== | ||
− |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조선 정종|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조선 태조|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조선 정종|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 *제3대 [[조선 태종|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태종]]은 궁내에 [[경복궁 경회루|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다. [[조선 세종|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경복궁 강녕전]] 외에 [[경복궁 교태전|교태전(交泰殿)]]·[[경복궁 연생전]]·[[경복궁 흠경각]]·[[경복궁 사정전|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제3대 [[조선 태종|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조선 태종|태종]]은 궁내에 [[경복궁 경회루|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다. [[조선 세종|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경복궁 강녕전]] 외에 [[경복궁 교태전|교태전(交泰殿)]]·[[경복궁 연생전]]·[[경복궁 흠경각]]·[[경복궁 사정전|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그리고 [[조선 선조|선조]]는 복구의 의지가 있었으나 전란 이후라 상황은 안좋았고 결국 [[창덕궁]]을 재건하여 궁으로 사용하였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그리고 [[조선 선조|선조]]는 복구의 의지가 있었으나 전란 이후라 상황은 안좋았고 결국 [[창덕궁]]을 재건하여 궁으로 사용하였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 | + |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경복궁 교태전]]·[[경복궁 강녕전]]·[[경복궁 동행각]]·[[경복궁 서행각]]등 여러 건물을 이전하고 총독부청사와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경복궁 교태전]]·[[경복궁 강녕전]]·[[경복궁 동행각]]·[[경복궁 서행각]]등 여러 건물을 이전하고 총독부청사와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 |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경복궁]]이 자리를 잡은 위치와 풍수에 대해서=== | ===[[경복궁]]이 자리를 잡은 위치와 풍수에 대해서=== | ||
− |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 + |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ref>김동현,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02434 경복궁]",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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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복궁]]의 역사=== | ===[[경복궁]]의 역사=== |
2017년 11월 4일 (토) 21:55 판
경복궁 (景福宮) |
|
대표명칭 | 경복궁 |
---|---|
한자표기 | 景福宮 |
이칭 | 북궐(北闕) |
유형 | 유적 |
시대 | 조선시대 |
지정번호 | 사적 제117호 |
지정일 | 1963년 1월 21일 |
|
목차
정의
서울특별시 종로구 세종로에 있는 조선시대의 정궁(正宮).
내용
경복궁의 역사
- 이성계가 왕이 되어 곧 도읍을 옮기기로 하고, 즉위 3년째인 1394년에 신도궁궐조성도감(新都宮闕造成都監)을 열어 궁의 창건을 시작하였으며 이듬해에 완성하였다. 궁의 명칭은 『시경』 주아(周雅)에 나오는 "이미 술에 취하고 이미 덕에 배부르니 군자만년 그대의 큰 복을 도우리라(旣醉以酒 旣飽以德 君子萬年 介爾景福)."에서 두 자를 따서 경복궁이라고 지었다. 정종이 즉위하면서 도읍을 다시 개성으로 옮기어 궁을 비우게 되었다.[1]
- 제3대 태종 때 또 다시 환도하여 정궁으로 이용되었다. 태종은 궁내에 경회루(慶會樓)를 다시 지었다. 세종은 이곳에 집현전을 두어 학문하는 신하들을 가까이에 두었다. 1553년에는 궁내에 불이 났는데 강녕전에서 불이 나 근정전 북쪽의 전각 대부분이 소실되었다. 이듬해에 경복궁 강녕전 외에 교태전(交泰殿)·경복궁 연생전·경복궁 흠경각·사정전(思政殿)을 복구했다.[2]
- 1592년 임진왜란으로 궁은 전소되고 말았다. 이때 창덕궁·창경궁 등도 모두 불에 타버려 난이 끝나고 왕이 환도하였을 때 정릉동의 구(舊) 월산대군가(月山大君家)를 임시 어소(御所)로 정하였다. 그리고 선조는 복구의 의지가 있었으나 전란 이후라 상황은 안좋았고 결국 창덕궁을 재건하여 궁으로 사용하였다.[3]
- 궁의 중건이 완료된 것은 소실된 지 약 270년이 흐른 1867년의 일이다(중건공사 개시: 1865년, 중건공사 완료: 1867년 말). 흥선대원군 이하응(李昰應)의 강력한 의지로 여느 궁궐의 규모나 격식을 훨씬 능가하는 대규모로 다시 세워지게 되었다. 궁이 완성되고 나서 1868년에 왕은 경복궁으로 옮겼다. 그러나 이때 조선왕조는 외국 열강들의 세력다툼으로 혼란에 빠져 있었다. 1895년에는 궁 안에서 명성황후(明成皇后)가 시해되는 사건이 벌어지고, 왕은 이어(移御)한 지 27년째인 1896년에 러시아공관으로 거처를 옮겨, 경복궁은 주인을 잃은 빈 궁궐이 되었다.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ref>
- 1910년 국권을 잃게 되자 일본인들은 궁안의 전(殿)·당(堂)·누각 등 4,000여 칸의 건물을 헐어서 민간에 방매(放賣)하고, 1917년 창덕궁의 내전에 화재가 발생하자 경복궁의 경복궁 교태전·경복궁 강녕전·경복궁 동행각·경복궁 서행각등 여러 건물을 이전하고 총독부청사와 미술관을 지어 궁의 옛 모습을 거의 인멸시켰다.[4]
- 1991년부터 침전·동궁·흥례문·태원전·광화문 등 5개 권역으로 나누어, 20년에 걸쳐 5단계로 진행되었다. 이로써 고종 당시 지어진 건물의 40%가 복원되고, 일제에 의해 철거되었다가 1968년에 철근콘크리트로조 지어졌던 광화문도 원래의 모습을 갖게 되었다.[5]
경복궁이 자리를 잡은 위치와 풍수에 대해서
경복궁이 자리 잡은 위치는 도성의 북쪽 북악산 기슭으로 풍수지리설에 입각한 주산(主山)의 바로 아래이다. 궁의 전면으로 넓은 시가지가 전개되고 그 앞에 안산(案山)인 남산이 있으며 내수(內水)인 청계천과 외수(外水)인 한강이 흐르는 명당(明堂) 터이다. 궁의 왼쪽으로 종묘가 있고 궁의 오른쪽에 사직단이 자리 잡고 있는데, 이는 중국에서 고대부터 지켜져 오던 도성 건물배치의 기본형식인 좌묘우사(左廟右社)를 따른 것이다. 고종 때 중건된 궁의 형태는 전체적으로 장방형으로 되어 있으며 궁성의 둘레는 1만 여척으로, 시가지를 내려다보듯이 남면(南面)하였고 궁의 주요건물들도 모두 남향으로 되어 있다. 건물의 배치는 앞부분과 뒷부분으로 나눌 수 있는데, 앞부분에는 정전과 편전들이 놓이고 뒷부분에는 침전과 후원이 자리 잡고 있어 이른바 전조후침(前朝後寢)의 격식을 갖추고 있다. 이것은 조선시대의 다른 궁궐들이 정전과 침전을 좌우에 놓거나 배치에 있어 앞뒤의 관계가 불분명한 것과 대조를 이루는데, 경복궁이 조선조의 정궁이므로 특히 엄격한 규범을 나타내고자 하였던 것으로 풀이된다.[6]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경복궁 | 경복궁 근정전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경복궁 경회루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집현전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아미산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보루각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간의대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경복궁 강녕전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경복궁 교태전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광화문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경복궁 | 조선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정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태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선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임진왜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선 단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조광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흥선대원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을미사변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경복궁 | 명성황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명성황후 | 명성황후 상존호옥책문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395년 | 경복궁이 창건되었다 |
1455년 | 조선 단종이 경복궁에서 쫓겨났다 |
1519년 | 조광조는 경복궁에서 죽었다 |
1592년 | 임진왜란이 일어나 경복궁이 전소되었다 |
1867년 | 흥선대원군은 경복궁을 중건하였다 |
1895년 | 을미사변이 경복궁에서 일어났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57962 | 126.977028 | 경복궁이 위치한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작성일: 2015년 7월 1일.
참고문헌
더 읽을 거리
- 논문
- 박진훈, 「景福宮에 투영된 조선초기의 理想的 國政運營體系」, 『역사와실학』Vol-60, 역사실학회, 2016, 33-66쪽.
- 웹자원
- 김동현, "경복궁",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김동현, "경복궁",