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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년 10월 13일 [[경운궁 선원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봉안되어 있던 영조어진이 소실되자 화원 [[조석진]], [[채용신]] 외 여러 화사들이 1744년 [[조선 영조|영조]]가 51세 되던 해에 그려진 원본을 이모하여 제작한 [[어진]]이다. 화면 우측 상단에 “영조대왕어진광무사년경자이모(英祖大王御眞光武四年庚子移摸)”라는 표제가 있어서 광무4년(1900년)에 제작된 이모본임을 알 수 있다.<br/> | 1900년 10월 13일 [[경운궁 선원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봉안되어 있던 영조어진이 소실되자 화원 [[조석진]], [[채용신]] 외 여러 화사들이 1744년 [[조선 영조|영조]]가 51세 되던 해에 그려진 원본을 이모하여 제작한 [[어진]]이다. 화면 우측 상단에 “영조대왕어진광무사년경자이모(英祖大王御眞光武四年庚子移摸)”라는 표제가 있어서 광무4년(1900년)에 제작된 이모본임을 알 수 있다.<br/> | ||
− | 범본은 [[육상궁|육상궁(毓祥宮 | + | 범본은 [[육상궁|육상궁 냉천정(毓祥宮 冷泉亭)]]에 봉안된 본을 사용하였다. 육상궁 봉안본은 1744년에 주관화사 [[장경주]], 동참화사 [[김두량]], [[조창희]]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조선 영조|영조]]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모친 [[숙빈 최씨]]를 모시기 위하여 [[육상궁]]이란 묘를 세우고, 여기에 생모를 모시는 도리를 다하고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때문에 이 <영조 어진>은 진전 향사용의 대폭 전신상이 아닌 작은 크기의 반산상으로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ref>조선미, 『한국의 초상화, 形과 影의 예술』, 돌베게, 2009, 88쪽.</ref><br/> |
<영조 어진>의 원본은 제작 당시부터 ‘칠분을 득한 핍진한 상’이라며 감탄했던 기록이 전할 정도로 걸작으로 평가되었고 이 <영조 어진>도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의 솜씨로 원본을 제대로 옮긴 수작이다. | <영조 어진>의 원본은 제작 당시부터 ‘칠분을 득한 핍진한 상’이라며 감탄했던 기록이 전할 정도로 걸작으로 평가되었고 이 <영조 어진>도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의 솜씨로 원본을 제대로 옮긴 수작이다. | ||
2017년 10월 24일 (화) 04:19 판
영조 어진 | |
한자명칭 | 英祖 御眞 |
---|---|
작가 | 조석진, 채용신 |
제작시기 | 1900년 |
소장처 | 국립고궁박물관 |
문화재지정사항 | 보물 제932호 |
유형 | 어진 |
크기(세로×가로) | 203×83㎝ |
목차
정의
조선시대 임금인 영조(재위 1724∼1776)의 51세 때 모습을 그린 어진.
내용
어진의 제작 및 보관
1900년 10월 13일 경운궁 선원전에서 일어난 화재로 봉안되어 있던 영조어진이 소실되자 화원 조석진, 채용신 외 여러 화사들이 1744년 영조가 51세 되던 해에 그려진 원본을 이모하여 제작한 어진이다. 화면 우측 상단에 “영조대왕어진광무사년경자이모(英祖大王御眞光武四年庚子移摸)”라는 표제가 있어서 광무4년(1900년)에 제작된 이모본임을 알 수 있다.
범본은 육상궁 냉천정(毓祥宮 冷泉亭)에 봉안된 본을 사용하였다. 육상궁 봉안본은 1744년에 주관화사 장경주, 동참화사 김두량, 조창희 등이 참여하여 제작하였다. 영조는 무수리 출신이었던 모친 숙빈 최씨를 모시기 위하여 육상궁이란 묘를 세우고, 여기에 생모를 모시는 도리를 다하고자 자신의 초상화를 걸어두었다. 때문에 이 <영조 어진>은 진전 향사용의 대폭 전신상이 아닌 작은 크기의 반산상으로 그려졌던 것으로 추정된다.[1]
<영조 어진>의 원본은 제작 당시부터 ‘칠분을 득한 핍진한 상’이라며 감탄했던 기록이 전할 정도로 걸작으로 평가되었고 이 <영조 어진>도 당대 최고의 초상화가들의 솜씨로 원본을 제대로 옮긴 수작이다.
어진에 묘사된 모습
<영조 어진>은 좌안칠분면에 복부까지 내려오는 반신상으로, 익선관, 곤룡포 차림이다. 의복의 옷주름 처리에서 당대의 양식대로 외곽선을 나타내지 않았고 앞가슴의 보(補) 위로 올라간 각대 역시 18세기 중엽의 시대색을 반영하고 있다. 배채법을 사용했는데 사모부분은 검은색으로 얼굴 부위는 분홍색으로 획일적으로 칠했다. 곤룡포는 붉은 색으로 안에 받쳐 입은 포(袍)는 흰색으로 칠한 후 앞에서 다시 채색하였다.[2]
영조는 늘 안색이 붉고 윤기가 있었다고 하는데, 이 <영조 어진>의 안면도 붉은 빛이 가득하다. 눈매는 치켜 올라가 있고 콧날은 오뚝하게 서있다. 수염은 매우 길지만 숱이 적어 성근 모습이다. 전체적으로 젊은 시절의 모습을 그린 <연잉군 초상>의 용모 그대로지만 깊어진 팔자주름, 숱이 적어진 수염 등에서 시간의 변화를 볼 수 있다.
연잉군 초상 국립고궁 소장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 | 어진 | A는 B에 해당한다 | A dcterms:type B |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 | 조선 순종 | A는 B를 묘사하였다 | A ekc:depicts B |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 | 김은호 | A는 B가 그렸다 | A dcterms:creator B |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 | 국립현대미술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 | 순종 초상 사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순종 어진(상복본) | 순종 초상 사진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순종 어진(상복본) | 고려대학교 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순종 초상 사진 | 이와타 카나에 | A는 B가 촬영하였다 | A dcterms:creator B |
조선 순종 | 순종 초상 사진 | A는 B에 나타난다 | A ekc:isShownOn B |
순종 초상 사진 | 국립고궁박물관 | A는 B에 소장되어 있다 | A edm:currentLocation B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1923년 |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이 제작되었다. |
공간정보
위도 | 경도 | 내용 |
---|---|---|
37.4312230 | 127.0204160 | 순종 어진(육군대장복본)은 국립현대미술관에 소장되어 있다. |
시각자료
주석
참고문헌
더 읽을거리
- 단행본
- 홍선표, 『한국근대미술사』 , 시공사, 2009.
- 조선미, 『왕의 얼굴』, 사회평론, 201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