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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10월 20일 (금) 19:03 판
@ 일러 검토 예정
이괄() | |
대표명칭 | 이괄 |
---|---|
본관 | 고성(固城) |
자 | 백규(白圭) |
출생지 | 1587년 |
사망지 | 1624년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형조좌랑, 함경북도병마절도사 |
성격 | 무신 |
정의
조선 중기의 무신·반란자.
내용
이괄은 인조반정 때 공이 많았음에도 반정모의에 뒤늦게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2등에 녹훈되었으며, 당시 변방에 병란의 조짐이 있다고 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에 머물게 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부하 이수백, 기익헌 등과 모의하여 1624년 1월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다. 저탄에서 한번 패배하였던 장만은 군사를 수습하여 안령에서 반란군을 크게 패퇴시킴으로써 난을 평정하였다.[1]
@ 일러 검토 예정
이괄() | |
대표명칭 | 이괄 |
---|---|
본관 | 고성(固城) |
자 | 백규(白圭) |
출생지 | 1587년 |
사망지 | 1624년 |
시대 | 조선 |
국적 | 조선 |
대표직함 | 형조좌랑, 함경북도병마절도사 |
성격 | 무신 |
정의
조선 중기의 무신·반란자.
내용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해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때[2] 주도적인 역할을 해내면서 큰 공을 세웠는데, 거병하였을 때 장졸들이 동요하자 '이귀(李貴)가 병사(兵使) 이괄을 추대하여 대장으로 삼은 다음 편대를 나누고 호령하니 군중이 곧 안정되었다'고 기록될 정도로 무인 이괄의 역량은 반정 성공에 확실한 비중을 차지하고 있었다.[3]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이 되었다.[4]
이괄은 1623년(인조 1) 당시 변방에 병란의 조짐이 있다고 하여 도원수 장만 휘하에 부원수 겸 평안병사로 삼아 영변에 머물게 되었고, 이 해 윤10월 인조반정 때 공이 많았음에도 반정모의에 뒤늦게 참가하였다는 이유로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에 녹훈되었다. 이에 불만을 품은 이괄이 부하 이수백, 기익헌 등과 모의하여 1624년 1월 반란을 일으켜 서울을 점령하자 인조는 공주로 피난하였다. 저탄에서 한번 패배하였던 장만은 군사를 수습하여 안령에서 반란군을 크게 패퇴시킴으로써 난을 평정하였다.[5]
- 특별전 도록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22년(광해군 14) 함경북도병마절도사에 임명되어 임지로 떠날 준비를 할 즈음 평소 친분이 있던 신경유(申景裕)의 권유로 광해군을 축출하고 새 왕을 추대하는 계획에 가담해 1623년 3월의 인조반정 때 큰 공을 세웠다.
그러나 반정 과정에서 주도 세력인 거의대장(擧義大將) 김류(金瑬)의 우유부단한 처사에 크게 반발하면서 불화가 생겨 반정 뒤에 겨우 한성부판윤이 되자 불만이 많았다.
1623년(인조 1) 포도대장을 지낸 뒤 평안병사 겸 부원수에 임명되었다. 평안도 영변에 출진해 군사 훈련에 힘쓰는 한편 그 지방의 성책(城柵)을 보수해 진의 방비를 엄히 하였다.
이는 당시 후금과의 국제 관계가 긴박해지면서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기 위해서였다. 이 해 윤10월 반정에 참가한 공신들의 공훈을 책정할 때 정사공신(靖社功臣) 2등의 첫째가 되었다.
1624년 정월에 외아들 전(栴)·한명련(韓明璉)·정충신(鄭忠信)·기자헌(奇自獻)·현집(玄楫)·이시언(李時言) 등과 함께 반역을 꾀한다는 무고를 받았다.
이어 서울에서 선전관과 의금부도사 등이 그의 군중(軍中)에 머물던 아들 전을 붙잡아 사실 여부를 조사한다는 명목으로 영변에 내려오자 이들을 죽이고 반란을 일으켰다.
신속한 행군으로 한때 서울을 점령, 기세를 떨쳤으나 곧 관군에 대패해 피신 중 부하 장수에게 살해되었다. 무과 출신이었으나 문장과 서예에도 능하였다. [네이버 지식백과] 이괄 [李适] (한국민족문화대백과, 한국학중앙연구원)
왜적의 배 5백척이 진포(鎭浦) 어귀에 들어와 큰 밧줄로 서로 잡아매고 군사를 나누어 지키다가, 드디어 해안으로 올라 각 주(州)ㆍ군(郡)으로 흩어져 들어가서 마음대로 불사르고 노략질하니, 시체가 산과 들에 덮이고, 곡식을 그 배에 운반하느라고 땅에 쏟아진 쌀이 한 자 부피나 되었다. 나세ㆍ심덕부ㆍ최무선 등이 진포에 이르러, 무선이 처음으로 만든 화포(火砲)를 써서 그 배를 불태우니, 연기와 화염이 하늘에 넘쳤다. 왜적이 거의 다 타죽었고, 바다에 빠져 죽은 자도 또한 많았다. 왜적이 포로로 잡은 자녀를 모조리 죽여 시체가 산같이 쌓여서, 지나는 곳마다 피의 물결이었으며, 3백 30여 명만이 탈출하여 왔다. 죽음을 벗어난 적은 옥주(沃州)로 달아나서, 육지에 있던 적과 합세하여 이산(利山)ㆍ영동(永同)현을 불태웠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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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고려사절요』 31권, 경신신우 6년(1380), 대명 홍무 13년. 온라인 참조: '고려사절요 제31권 / 신우 2(辛禑二)', |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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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괄 | 이괄의 난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이괄의 난 | 진무공신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강민첨 | 귀주대첩 | A는 B에 참여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귀주대첩 | 귀주 | A는 B에서 일어났다 | A edm:happenedAt B |
강동6주 | 귀주 | A는 B를 포함한다 | A dcterms:hasPart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영상
주석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8쪽.
- ↑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태훈, "이괄의 난",
『한국사 콘텐츠』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학중앙연구원 장서각, 『조선의 공신』, 장서각, 2012, 168쪽.
- ↑ 하현강, "이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