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권근은 《양촌집》에 최무선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적었으며, 태종이 화약 병기의 개발을 추진하던 때에 상소를 올려 목화씨를 도입했던 문익점의 후손과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의 후손을 특별히 관직에 임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태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해산은 태종 1년(1401년) 3월에 군기시 주부로 특채되었다. | 권근은 《양촌집》에 최무선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적었으며, 태종이 화약 병기의 개발을 추진하던 때에 상소를 올려 목화씨를 도입했던 문익점의 후손과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의 후손을 특별히 관직에 임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태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해산은 태종 1년(1401년) 3월에 군기시 주부로 특채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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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28일 (목) 00:00 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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군기시(軍器寺) | |
대표명칭 | 군기시 |
---|---|
한자표기 | 軍器寺 |
유형 | 관청 |
창립시대 | 조선 |
창립일 | 1466년 |
변경일 | 1884년 |
관련단체 | 화통도감 |
목차
정의
고려·조선 시대에 병기·기치·융장(戎仗)·집물 등의 제조 등을 관장한 관청.
설명
고려 목종 때 설치된 군기감(軍器監)을 1362년(공민왕 11) 군기시로 개칭하였다. 조선시대에도 고려의 제도를 답습하여, 1392년(태조 1) 군기감을 설치하였으며, 1466년(세조 12) 군기시로 개칭하였다.[2]
관원은 병조판서나 병조참판 중에서 1인, 무장(武將) 중에서 1인을 선발하여 도제조(都提調)와 제조를 두어 감독하게 하였다. 그 밑에 정(正)·부정(副正)·첨정(僉正)·별좌(別坐)·판관(判官)·별제(別提)·주부(主簿)·직장(直長)·봉사(奉事)·부봉사(副奉事)·참봉(參奉) 등이 있었다.
『경국대전』에 나와 있는 기술직종을 보면 여기에 딸린 공장(工匠)으로는, 칠장(漆匠) 12인, 마조장(磨造匠) 12인, 궁현장(弓弦匠) 6인, 유칠장(油漆匠) 2인, 주장(鑄匠) 20인, 생피장(生皮匠) 4인, 갑장(甲匠) 35인, 궁인(弓人) 90인, 시인(矢人) 150인, 쟁장(錚匠) 11인, 목장(木匠) 4인, 야장(冶匠) 130인, 연장(鍊匠) 160인, 아교장(阿膠匠) 2인, 고장(鼓匠) 4인, 연사장(鍊絲匠) 2인이었다.
세종 때에는 서북 변경의 개척으로 화기 사용이 빈번해지자 군기시에서의 화약기술의 확보를 위해 화약장(火藥匠)의 전지전출을 견제했고, 군기시 안에 화기를 전담하는 10여 인의 관원을 두기도 하였다. 이들은 양반 자제 중에서 기술이 정교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자를 뽑은 것으로 일명 겸군기(兼軍器)라 불렀다.
그러나 세조 이후 오랜 기간 전쟁이 없게 되자 군기시의 기능은 차츰 해이해져서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1884년(고종 21) 군기시가 폐지되자 그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옮겨졌다
권근은 《양촌집》에 최무선의 업적을 찬양하는 시를 적었으며, 태종이 화약 병기의 개발을 추진하던 때에 상소를 올려 목화씨를 도입했던 문익점의 후손과 화약을 발명한 최무선의 후손을 특별히 관직에 임용할 것을 건의하였다. 태종은 그의 건의를 받아들여 최해산은 태종 1년(1401년) 3월에 군기시 주부로 특채되었다.
최무선은 1401년(태종 1) 권근의 상소로 군기시에 등용되어 주부(注簿)에 올랐다.
...최해산으로 군기 주부(軍器注簿)를 삼았다. 참찬(參贊) 권근이 상서하기를, "...고(故) 지문하부사(知門下府事) 최무선은 처음으로 화약(火藥)을 제조하여 능히 해구(海寇)를 제어하였으니, 실로 국가에 공(功)이 있습니다. 그 아들 해산도 또한 마땅히 서용(敍用)하여야 합니다." 하였으므로, 그대로 따른 것이었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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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태종실록』 1권, 태종 1년(1401) 윤3월 1일(경인) 2번째 기사. 온라인 참조: '문익점의 아들 중용과 최무선의 아들 해산에게 벼슬을 내리다', |
1377년(고려 우왕 3)에 최무선(崔茂宣)의 건의로 설치되었다.[3]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각종 화기들은 모두 18가지로, 이 중에서 총포의 종류는 대장군포(大將軍砲)·이장군포(二將軍砲)·삼장군포(三將軍砲)·육화석포(六火石砲)·화포(火砲)·신포(信砲)·화통(火筒) 등이며, 화전·철령전(鐵翎箭)·피령전 등은 발사물, 그 밖에 질려포·철탄자·천산오룡전(穿山五龍箭)·유화(流火)·촉천화(觸天火)와 로켓무기로 주화(走火)가 있다. 화통도감에서 제조된 화기들은 왜구를 물리치는 데 사용되었다.[4]
1388년(고려 창왕 1)에 폐지되어 군기시에 소속되었다.[5]
지식 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화통도감 | 군기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최해산 | 군기시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최무선 | 최해산 | A는 아들 B를 두었다 | A ekc:hasSon B |
시각자료
가상현실
갤러리
동영상
- [NATV]국회방송 한국의 정신 한국 역사상 최초로 화약무기 시대를 열다. 최무선(게시일: 2015년 1월 19일)
주석
- ↑ 이장희, "화통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군기시",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 정학수, "화통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학수, "화통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정학수, "화통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인용 및 참조
- 웹 자원
- 정학수, "화통도감",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정학수, "화통도감",
유용한 정보
- "화통도감",
『doopedia』online , 두산백과. - 한국고전용어사전 편찬위원회, 『한국고전용어사전』, 세종대왕기념사업회, 2001. 온라인 참조: "화통도감", 한국고전용어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개요
병조에 속한 아문으로서 고려시대부터 있었다. 조선시대에는 1392년 군기감(軍器監)을 설치했다가, 1466년(세조 12) 군기시로 개칭했다. 병조판서나 병조참판 중에서 1명, 무장(武將) 중에서 1명을 뽑아 도제조(都提調)와 제조를 맡아 감독하게 했으며, 기술직인 공장(工匠)들이 몇백 명 속해 있었다.
세종 때에는 서북 변경의 개척으로 화기사용이 빈번해지자 군기시에서의 화약기술의 확보를 위해 화약장(火藥匠)의 전지전출을 견제했고, 군기시 안에 화기를 전담하는 10여 인의 관원을 두기도 하였다. 이들은 양반 자제 중에서 기술이 정교하고 무략(武略)이 뛰어난 자를 뽑은 것으로 일명 겸군기(兼軍器)라 불렀다.
그러나 세조 이후 오랜 기간 전쟁이 없게 되자 군기시의 기능은 차츰 해이해져서 본래의 기능을 제대로 발휘할 수 없었다. 1884년(고종 21) 군기시가 폐지되자 그 직무는 기기국(機器局)으로 옮겨졌다.
민족기록화와의 연관성
군기시는 후에 최대섭의 민족기록화 '화포와 화약을 제조하는 최무선'의 주요 인물 최무선에 의해 설치된 화통도감에 흡수되었다.
최무선의 아들 최해산이 근무하기도 하였다.
노드 및 관계 테이블
노드 | 관계 | 노드 |
---|---|---|
화통도감 | ~에 흡수되었다 | 군기시 |
최해산 | ~와 관련된다 | 군기시 |
군기시 | ~의 제조지이다 | 화차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