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의 두 판 사이의 차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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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1680)과 남인축출문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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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신환국은 김석주, 김만기 등 숙종의 척신 세력이 숙종과 함께 허적 등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일을 가리킨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기찰과 고변을 통한 정탐정치까지 동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삼사에 포진한 연소(年少)한 청류(淸流)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정치의 원칙인 공론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는데,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연소 청류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저버리고 훈척의 정탐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송시열은 '군자의 붕당'만을 인정하는 주자 붕당론을 실천하는 것이 사림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논리와 입장은 재야와 재조를 막론하고 서인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포함하여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분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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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f>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6-247쪽  .</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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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과 소론의 분화 1 : 경신환국(1680)====
 
====노론과 소론의 분화 1 : 경신환국(168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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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숙종 때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으로 발생된 서인 간의 분쟁.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숙종조에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던 저명한 우암(尤庵) 송시열과 그의 제자로서 이산(尼山)에 살았던 명재(明齋) 윤증은 여러 가지 일로 불화를 빚었다. 그들의 사사로운 불화는 1684년(숙종 10) 4월에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조정에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정치적 분쟁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각기 스승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임으로써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역시 친구 사이였던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현종 대에 예송(禮訟)으로 불화를 빚자 윤선거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샀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일을 비난하였고, 윤선거의 묘문(墓文)을 무성의하게 지음으로써 제자 윤증과 갈등을 빚었다. 윤증은 1681년(숙종 7) 송시열에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왕패병용(王覇幷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였다. 이 ‘신유의서’가 송시열의 사위이며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숙종 10) 4월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이리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증 자신은 춘추관에 편지를 보내어 율곡(栗谷)은 입산한 과오가 있지만, 자신의 부친은 아무 과오가 없다고 주장하였다가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함께 저술한 책인데, 1711년(숙종 37)에 유계의 집안에서 단독으로 간행하였고, 또 송시열의 제자 정호(鄭澔)가 발문을 쓰면서 윤증을 비난한 것 때문에 큰 물의가 빚어졌다. 결국 1716년(숙종 42) 7월에 숙종이 처분을 내려 송시열은 잘못한 것이 없고 윤증은 잘못한 것으로 판정하여 윤증을 유현(儒賢)으로 대접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병신처분(丙申處分)’이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회니시비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1684년(숙종 10)부터 30여 년간 논란되었던 ‘회니시비’는 사제 간의 사사로운 분쟁이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한 사건이었다. 오래 지속되었던 이 분쟁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조선 숙종 때 송시열과 윤증의 대립으로 발생된 서인 간의 분쟁. 회니시비(懷尼是非)는 숙종 때 사제 관계에 있었던 송시열(宋時烈)과 윤증(尹拯)의 불화 때문에 그들의 제자들 사이에서 벌어진 일련의 분쟁으로, 서인이 노론(老論)과 소론(少論)으로 갈라지게 한 사건이다. 숙종조에 충청도 회덕(懷德)에 살았던 저명한 우암(尤庵) 송시열과 그의 제자로서 이산(尼山)에 살았던 명재(明齋) 윤증은 여러 가지 일로 불화를 빚었다. 그들의 사사로운 불화는 1684년(숙종 10) 4월에 송시열의 제자 최신(崔愼)이 조정에 윤증을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함으로써 국가 차원의 정치적 분쟁이 되었다. 두 사람의 제자들은 각기 스승을 변호하고 상대방을 비판하는 논쟁을 벌임으로써 조정이 시끄러워지고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한 요인이 되었다. 윤증의 아버지 윤선거(尹宣擧)와 송시열은 사계(沙溪) 김장생(金長生) 문하에서 동문수학한 친구였다. 역시 친구 사이였던 송시열과 윤휴(尹鑴)가 현종 대에 예송(禮訟)으로 불화를 빚자 윤선거는 그들을 화해시키려 하다가 송시열의 불만을 샀다. 송시열은 윤선거가 병자호란 때 강화도에서 죽지 않은 일을 비난하였고, 윤선거의 묘문(墓文)을 무성의하게 지음으로써 제자 윤증과 갈등을 빚었다. 윤증은 1681년(숙종 7) 송시열에게 비난하는 편지를 보내려다 그만두었는데, 여기에는 송시열이 ‘의리와 이익을 같이 행하고[의리쌍행(義利雙行)], 왕도와 패도를 병용하였다[왕패병용(王覇幷用)]’는 내용이 포함되어 있었다. 이를 ‘신유의서(辛酉擬書)’라고 하였다. 이 ‘신유의서’가 송시열의 사위이며 윤증의 사촌이었던 윤박(尹搏)에 의해 세상에 알려지게 되었다. 1684년(숙종 10) 4월 ‘신유의서’의 내용을 가지고 최신이 윤증을 스승을 배반한 죄로 고발하고 처벌을 요구하자 대대적인 정치적 분쟁이 야기되었다. 윤증의 제자였던 나양좌(羅良佐)와 친구 박세채(朴世采) 등은 그를 옹호하였고, 송시열의 제자들과 조정의 대신들은 윤증을 비판하였다. 이리하여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게 되었다. 윤증 자신은 춘추관에 편지를 보내어 율곡(栗谷)은 입산한 과오가 있지만, 자신의 부친은 아무 과오가 없다고 주장하였다가 선현을 모욕하였다는 비판을 받았다. 『가례원류(家禮源流)』는 윤선거와 유계(兪棨)가 함께 저술한 책인데, 1711년(숙종 37)에 유계의 집안에서 단독으로 간행하였고, 또 송시열의 제자 정호(鄭澔)가 발문을 쓰면서 윤증을 비난한 것 때문에 큰 물의가 빚어졌다. 결국 1716년(숙종 42) 7월에 숙종이 처분을 내려 송시열은 잘못한 것이 없고 윤증은 잘못한 것으로 판정하여 윤증을 유현(儒賢)으로 대접하지 말 것을 지시하였다. 이를 ‘병신처분(丙申處分)’이라고 하였는데, 이로써 회니시비는 공식적으로 종결되었다. 1684년(숙종 10)부터 30여 년간 논란되었던 ‘회니시비’는 사제 간의 사사로운 분쟁이 정치적 분쟁으로 비화한 사건이었다. 오래 지속되었던 이 분쟁은 서인이 노론과 소론으로 갈라지는데 결정적인 요인이 되었다.
 
<ref> 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461 회니시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ref> 이영춘,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76461 회니시비],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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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론의 중심인물 : 송시열, 권상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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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론의 중심인물 : 윤증, 박세당, 박세채, 남구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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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남 박씨와 파평 윤씨와 은진 송씨의 혼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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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식 관계망==
 
==지식 관계망==

2017년 9월 26일 (화) 15:38 판

개요

인조반정을 계기로 북인을 몰아내고 권력을 쥔 서인은, 숙종 재위 당시 경신환국, 회니시비, 가례원류시말 등의 사건을 통해 노론과 소론으로 나누어진다. 송시열, 윤증, 권상하, 박세당, 박세채, 남구만, 김석주 등은 그러한 사건의 중심에 있었던 인물들이자, 노론과 소론 분화 초기의 정국을 대표하는 인물들이다.

내용

경신환국(1680)과 남인축출문제

경신환국은 김석주, 김만기 등 숙종의 척신 세력이 숙종과 함께 허적 등 남인을 내치고 송시열과 김수항 등 서인 세력을 불러들인 일을 가리킨다. 환국 이후 이들 척신 세력은 남인을 뿌리째 제거하기 위해 기찰과 고변을 통한 정탐정치까지 동원하는 것을 마다하지 않았다. 삼사의 언관들이 훈척의 이러한 정치행태를 비판하면서 서인 내에서 노론과 소론이라는 명목이 처음 등장하였다. 당시 삼사에 포진한 연소(年少)한 청류(淸流)들이 훈척의 정탐정치를 비판한 것은 사림정치의 원칙인 공론정치를 내세우면서 전개되었는데, 사림정치의 상징적 인물이자 서인 산림을 대표하는 송시열이 연소 청류의 기대를 저버리고 훈척을 지지하였다. 송시열이 사림 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저버리고 훈척의 정탐정치를 긍정한 것은 남인을 축출하는 것이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중요하다는 논리에 근거한 것이었다. 즉 송시열은 '군자의 붕당'만을 인정하는 주자 붕당론을 실천하는 것이 사림정치와 공론정치의 원칙을 지키는 것보다 중요하다고 판단한 것이다. 송시열의 이러한 논리와 입장은 재야와 재조를 막론하고 서인 내부에서 큰 파장을 일으켰다. 삼사의 연소한 언관을 포함하여 조정의 관료들 사이에서도 이에 대한 찬반을 두고 분열되었다. [1]


지식 관계망

중심요소

문맥요소

관계정보

항목A 항목B 관계 비고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송시열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권상하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윤증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박세당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박세채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남구만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 김석주 A는 B를 포함하는 기획기사이다

시간정보

시간 내용
1680년 경신환국이 발생하였다.
1715년 가례원류시말이 발생하였다.
1716년 병신처분이 발생하였다.

공간정보

위도 경도 내용
37.700350 127.057418 초상화로 읽는 노론과 소론의 분화의정부 서계종택과 관련이 있다.

시각자료

가상현실

영상

예송2차와 환국(게시일: 2014.09.15.)

주석

  1. 김용흠, 「조선의 주류 지식인은 왜 사문난적이 되었나?」『내일을 여는 역사 2014년 겨울호』Vol.57, 내일을 여는 역사, 2014, 246-247쪽 .

참고 자료

더 읽을 거리

  • 단행본
  • 논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