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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퇴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그 위치조차 어딘지 모르게 되었다. 또한 절의 건축구조나 가람 배치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981 봉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퇴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그 위치조차 어딘지 모르게 되었다. 또한 절의 건축구조나 가람 배치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23981 봉은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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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9월 14일 (목) 00:48 판
개성 봉은사 (開城 奉恩寺)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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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표명칭 | 개성 봉은사 |
---|---|
한자 | 開城 奉恩寺 |
주소 | 경기도 개성시 태평동 |
건립시기 | 951년 |
정의
경기도 개성시 태평동에 있었던 절.
내용
‘대봉은사(大奉恩寺)’라고도 한다. 951년(광종 2)에 태조의 원당(願堂)으로 창건한 국찰(國刹)이다.[1]
〈신해〉 2년(951) 대봉은사(大奉恩寺)를 성의 남쪽에 창건하여 태조(太祖)의 원당(願堂)으로 삼고, 또 불일사(佛日寺)를 동쪽 교외에 창건하여 돌아가신 어머니 유씨(劉氏)의 원당으로 삼았다. | ||
출처: 『고려사』 세가 권제2, 고려 광종, 월미상.[2] |
태조의 진영(眞影)을 봉안한 곳으로 고려시대의 절 가운데에서 가장 중요한 위치를 차지하였다.[3]
창건 이후 1032년(덕종 1)과 1142년(인종 20)·1180년(명종 10) 등 세 차례에 걸쳐서 중수하였고, 1234년(고종 21)의 몽고의 병란으로 강화도로 천도하였을 때에는 차척(車倜)의 집을 봉은사로 쓰다가 환도한 뒤 다시 중건하였다.[4]
이 절에는 홍법(弘法)·도융(圖融)·혜소(慧炤)·지광(智光)·원경(元景)·담진(曇眞)·낙진(樂眞)·보우(普愚) 등 고려시대의 승려들이 이곳에 주석하면서 이름을 빛내었다. 그들은 이 절에서 국사(國師)·왕사(王師)의 직위를 받았으며, 이곳에 주석하면서 경을 설하고 선(禪)을 논하는 법회를 베품으로써, 이 절은 다른 절에서 볼 수 없는 성황을 이루었다.[5]
보우가 이곳에 머물 때에는 공민왕과 노국공주가 친히 행차하고 승려 300여 명에게 백포(白布) 2필과 가사(袈裟) 1령씩을 하사하기도 하였다.[6]
3월 병술 왕과 공주가 태비(太妃)를 모시고 봉은사(奉恩寺)에 가서 보우(普愚)의 선(禪)에 관한 설법을 듣고 정례(頂禮)한 후, 폐백(幣帛)과 은으로 만든 바리때, 수놓은 가사(袈裟)를 시주하여 〈시주한 물품이〉 산더미 같이 쌓였으며, 그 문하의 승려 300여 명에게도 모두 흰 베 2필과 가사 1령(領)을 시주하였는데, 사녀(士女)들이 파도처럼 달려와 여기에 미처 닿지 못할 것을 두려워하였다. | ||
출처: 『고려사』 세가 권제39, 공민왕 5년, 3월.[7] |
조선시대로 접어들면서 점차 퇴락하여, 중기 이후에는 그 위치조차 어딘지 모르게 되었다. 또한 절의 건축구조나 가람 배치에 관해서는 전혀 알려져 있지 않다.[8]
지식관계망
관계정보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홍법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혜소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도융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지광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원경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담진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낙진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보우 | 개성 봉은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A edm:isRelatedTo B |
개성 봉은사 | 고려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A edm:isRelatedTo B |
주석
- ↑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태조와 비 유씨의 원당을 짓다", 『고려사』 세가 권제2, 고려 광종, 월미상,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국왕 내외가 보우의 설법을 듣고 엄청난 재물을 시주하다", 『고려사』 세가 권제39, 공민왕 5년, 3월,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 - ↑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김위석, "봉은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태조와 비 유씨의 원당을 짓다", 『고려사』 세가 권제2, 고려 광종, 월미상,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f> - "국왕 내외가 보우의 설법을 듣고 엄청난 재물을 시주하다", 『고려사』 세가 권제39, 공민왕 5년, 3월,
『한국사데이터베이스』online , 국사편찬위원회.</ref>