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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유의 스승인 [[심희]]는 888년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는데<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980 심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찬유는 스승을 따라 [[광주 송계선원|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찬유는 [[심희]]에게 구법 유학의 뜻을 밝혔고, 마침내 892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6)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였다. | 찬유의 스승인 [[심희]]는 888년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는데<ref>김위석, "[http://encykorea.aks.ac.kr/Contents/Index?contents_id=E0033980 심희]", <html><online style="color:purple">『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sup>online</sup></online></html>, 한국학중앙연구원.</ref>, 찬유는 스승을 따라 [[광주 송계선원|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찬유는 [[심희]]에게 구법 유학의 뜻을 밝혔고, 마침내 892년([[신라 진성여왕|진성여왕]] 6)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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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 | |때마침 대사의 스승이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대사는 멀리 행장을 꾸려 특별히 송계로 찾아가 예족(禮足)의 정성을 표하고 스승의 가르침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스승이 말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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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흰구름은 천 리 만 리 깔려 있어도 모두가 같은 구름이고, 밝은 달은 앞시내와 뒷시내에 비춰도 일찍이 다른 날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과 정신에 따르고 마음과 마음에 있을 뿐이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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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대사는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에게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에, 멀리 유학하여 두루 관람하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스승이 이르기를 타인의 마음은 멈출 수 없고 빠른 발은 머무르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너에게서 그것을 징험한다."라 하고. 웃으면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대사는 길이 멀다고들 하지만 걸어가면 곧 닿는다는 생각에, 마침내 산을 | ||
+ | 나와 바닷가로 가서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갈 기회를 살렸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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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드디어 경복(景福; 唐 昭宗의 연호) 원년(892, 진성왕 6) 봄에 때마침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을 만나 그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 ||
+ | |출처=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42쪽. 온라인 참조: "[http://www.krpia.co.kr/product/main;jsessionid=A111344D2D93C8B6A748F71C288CA48E?plctId=PLCT00006041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html><online style="color:purple">『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sup>online</sup></online></html>, 누리미디어.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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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8일 (월) 00:40 판
찬유(璨幽) | |
대표명칭 | 찬유 |
---|---|
한자 | 璨幽 |
생몰년 | 869년(경문왕 9)-958년(광종 9) |
시호 | 원종(元宗) |
탑호 | 혜진(慧眞) |
자 | 도광(道光) |
성씨 | 김씨(金氏) |
출신지 | 경상남도 하동 |
승탑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
승탑비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목차
정의
신라 말 고려 초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원종대사 찬유(元宗大師 璨幽)는 869년(경문왕 9) 계림(鷄林) 하남(河南: 현재의 경남 하동)에서 태어났다. 속성은 김씨(金氏)이다. 아버지의 휘는 용(容)인데, 장사현(長沙縣: 현재의 전북 고창)의 현령(縣令)을 지냈다고 한다.
대사(大師)의 존칭(尊稱)은 찬유(璨幽)요 자(字)는 도광(道光)이며 속성(俗姓)은 김씨(金氏)로서 계림 하남(河南) 사람이다. 자자손손 드러난 족속이요, 대대로 유명한 가문인데, 조상을 드높이는 깨끗한 규범과 종족을 공경하는 꽃다운 자취는 삭제하여 기록하지 않겠으니, 이는 불문(佛門)의 종지를 따르는 것이다.
아버지의 휘는 용(容)인데, 흰 무지개의 빼어난 기운과 단혈의 기이한 자태로 저녁 노을의 남은 빛을 머금고 새벽종의 청아한 소리를 진동시키는 듯하였다. 마침내 가문을 일으켜 창부낭중이 되었으며, 얼마 안 되어 나가 장사현령이 되었다. 백 리 고을에서는 봄에 순행하는 교화로 꽃 고을에서 더욱 향기로웠으며, 구중궁궐에서는 해를 향한 마음으로 해바라기 동산에서 두드러지게 아름다웠으니, 조야가 따라서 의지하고 백성들이 우러러 의지하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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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0-4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탄생설화
어머니 이씨(李氏)는 꿈에서 신인(神人)을 만나고 대사를 잉태하였다.
어머니 이씨는 아내로서의 덕을 잘 닦고 어머니로서의 자세를 풍성히 지녔는데, 꿈에 한 신인이 있어 고하기를, "어머니의 아들이 되고 부처님의 자손이 되는 까닭에 묘한 인연에 의탁하여 삼가 자비로운 교화를 펴고자 원합니다."라고 하였다. 특별한 꿈을 꾸었다고 여겼는데, 인하여 잉태를 하였다. 행동거지를 삼가고 태교를 받들어 행하였다. 함통(咸通; 唐 懿宗의 연호) 12년(869, 경문왕 9) 세차 기축년 4월 4일에 태어났다. | ||
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출가수행
찬유는 13세에 상주(尙州)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고, 융제의 지시에 따라 여주 혜목산(慧目山) 고달사(高達寺)에 가서 심희(審希)를 스승으로 모셨다.[1] 890년(진성여왕 4) 22세에는 양주(楊州)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具足戒)를 받았다.
나이 겨우 13세 때 아버지께 말씀드리기를,
"비록 지혜의 가지는 모자라지만 깨달음의 나무가 되고자 합니다." "내 비록 보는 눈은 없으나 일찍이 너의 선근(善根)을 보았다. 너는 의당 부지런히 배양하여 좋은 과보를 닦도록 하여라." 대사는 다행히 소원대로 아버지의 승낙을 얻어 곧 머리를 깎고 출가하였다. 상주 공산 삼랑사의 융체선사(融諦禪師)가 도를 강론함이 깊고 사람을 교화함이 밝다는 소식을 삼가 듣고 그의 제자가 될 생각으로 멀리 선사를 찾아갔다 선사가 말하였다. "이리 오너라 오늘 너의 오는 모습을 보니 장차 훌륭한 사람을 만난 것을 알겠다. 우리 종의 선화상(禪和尙)은 법호가 심희(審希)인데 진짜 한 부처가 세상에 출현하여 동국을 교화한 주인이시다. 지금 혜목산(慧目山)에 계시니 너는 마땅히 찾아가서 그 분을 스승으로 섬겨라" 대사는 '나의 스승임에 틀림없으니 나의 소원을 이루었다. 지체 말고 가는 것이 좋겠다.'라 생각하고, 곧 혜목산을 찾아가 정성껏 섬기면서 도를 배우는 마음을 더 닦고 선을 익히는 뜻을 한층 가다듬었다. 얼마 되지 않아 묘리를 정밀히 탐구하고 현기(玄機)를 높이 깨달았으며, 깨달음의 길을 걸어 관통하였으면서도 계율을 준수하고 벗어나지 않았다. 22세 때 양주(楊州)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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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구법유학
찬유의 스승인 심희는 888년부터 송계산(松溪山)에 머물면서 좌선에 몰두하였는데[2], 찬유는 스승을 따라 광주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갔다. 그곳에서 찬유는 심희에게 구법 유학의 뜻을 밝혔고, 마침내 892년(진성여왕 6)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商船)을 타고 입당(入唐)하였다.
때마침 대사의 스승이 광주(光州) 송계선원(松溪禪院)으로 옮겨가 있었는데, 대사는 멀리 행장을 꾸려 특별히 송계로 찾아가 예족(禮足)의 정성을 표하고 스승의 가르침의 은혜에 감사하였다. 스승이 말하였다.
"흰구름은 천 리 만 리 깔려 있어도 모두가 같은 구름이고, 밝은 달은 앞시내와 뒷시내에 비춰도 일찍이 다른 날이 아니다. 그래서 정신과 정신에 따르고 마음과 마음에 있을 뿐이다." 대사는 '무릇 도에 뜻을 둔 사람에게 어찌 일정한 스승이 있겠는가'하는 생각에, 멀리 유학하여 두루 관람하겠다는 뜻을 아뢰었다. 스승이 이르기를 타인의 마음은 멈출 수 없고 빠른 발은 머무르기 어렵다고들 하는데, 너에게서 그것을 징험한다."라 하고. 웃으면서 떠나는 것을 허락하였다. 대사는 길이 멀다고들 하지만 걸어가면 곧 닿는다는 생각에, 마침내 산을 나와 바닷가로 가서 서쪽으로 바다를 건너갈 기회를 살렸다. 드디어 경복(景福; 唐 昭宗의 연호) 원년(892, 진성왕 6) 봄에 때마침 중국으로 들어가는 상선을 만나 그 배를 타고 서쪽으로 갔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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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41-42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
서주(舒州) 동성현(桐城懸)의 적주산(寂住山)으로 간 찬유는 석두희천(石頭希遷)의 문하인 투자대동(投子大同, 819-914)의 선법(禪法)을 전해 받고,[3] 고승과 명승을 찾아 유람한 뒤 921년(경명왕 5)에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로 귀국하였다.
활동
찬유는 921년(경명왕 5) 귀국하여 봉림사의 심희를 찾아갔다. 심희는 찬유에게 삼랑사(三郞寺)에 머물 것을 명하였고, 찬유는 3년 동안 삼랑사에 주석하였다.[4]
찬유는 삼랑사에 주석하다가, 고려 건국 후 태조의 명에 따라 광주(廣州) 천왕사(天王寺)의 주지가 되었다.[5]
이후 찬유는 혜목산(慧目山)으로 이주하였으며, 그 곳에서 많은 제자들을 배출하여 대선림(大禪林)을 이룩하였다.[6] 이때 태조를 비롯하여 혜종과 정종은 찬유에게 가사(袈裟)와 법의(法衣)를 하사하는 등 예로써 대우하였다.
광종은 찬유를 왕사(王師)로 책봉하고 '증진대사(證眞大師)'라는 호를 내렸다. 또한 광종은 찬유를 개경 사나원(舍那院)에 머무르게 한 뒤 3일 만에 중광전(重光殿)에서 설법하게 하고 국사(國師)로 삼았으며, 은병·은향로·수정염주·법의 등을 내렸다.[7]
찬유는 노쇠함을 이유로 하직하여 운산(雲山)에 머물렀다. 광종은 이를 매우 아쉬워하였으며, 사자를 통해 자주 편지나 송덕시(頌德詩)를 지어 보냈다.
입적
찬유는 958년(광종 9) 혜목산에서 나이 90세, 법랍 69세로 입적하였다.
광종은 시호를 '원종대사(元宗大師)'라 추증하고, 탑호를 '혜진(慧眞)'이라 하였으며, 대사의 진영 1위를 조성하도록 하였다. 사리탑은 혜목산(慧目山) 서북쪽 산기슭에 조성되었다. 흔홍(昕弘) 등 찬유의 제자들이 탑비의 건립을 청하자, 광종은 김정언에게 명하여 비문을 짓게 하였고, 975년(광종 26) 탑비가 건립되었다.
지식관계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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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항목
항목A | 항목B | 관계 | 비고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비 | 찬유 | A는 B를 위한 비이다 | |
여주 고달사지 원종대사탑 | 찬유 | A는 B 위한 승탑이다 | |
찬유 | 상주 삼랑사 | A는 B에서 출가하였다 | |
융제 | 찬유 | A는 B의 스승이다 | |
심희 | 찬유 | A는 B의 스승이다 | |
찬유 | 여주 고달사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
찬유 | 양주 장의사 | A는 B에서 계를 받았다 | |
찬유 | 광주 송계선원 | A는 B에서 수행하였다 | |
대동 | 찬유 | A는 B의 스승이다 | |
찬유 | 창원 봉림사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찬유 | 상주 삼랑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찬유 | 광주 천왕사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찬유 | 고려 태조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찬유 | 고려 혜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찬유 | 고려 정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찬유 | 고려 광종 | A는 B와 관련이 있다 | |
찬유 | 왕사 | A는 B의 유형이다 | |
찬유 | 국사 | A는 B의 유형이다 | |
찬유 | 개성 사나원 | A는 B에서 주석하였다 | |
찬유 | 흔홍 | A는 B의 스승이다 |
시간정보
시간정보 | 내용 |
---|---|
869년 | 찬유 출생. |
881년 | 찬유는 상주 삼랑사(三郞寺) 융제(融諦)에게 출가하였다. |
890년 | 찬유는 삼각산 장의사(莊義寺)에서 구족계를 받았다. |
892년 | 찬유는 당나라로 구법 유학을 떠났다. |
921년 | 찬유는 당나라에서 강주(康州) 덕안포(德安浦)로 귀국하였다. |
958년 | 찬유는 혜목산에서 입적하였다. |
975년 | 찬유의 탑비가 건립되었다. |
시각자료
갤러리
주석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찬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참고문헌
- 이지관, "여주 고달원 원종대사 혜진탑비문", 『교감역주 역대고승비문』 고려편2, 가산불교문화연구원, 1995, 18-55쪽.
- "고달사원종대사혜진탑비", 금석문 세부정보,
『한국금석문 종합영상정보시스템』online , 국립문화재연구소. - 임세권, 이우태, "고달원원종대사혜진탑비",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한국국학진흥원, 2014, 33-50쪽. 온라인 참조: "한국금석문집성 20: 고려4 비문4",
『KRpia - 한국의 지식콘텐츠』online , 누리미디어. - 곽철환, 『시공 불교사전』, 시공사, 2003. 온라인 참조: "찬유", 용어해설,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위석, "찬유",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 - 한국사전연구사 편집부, 『종교학대사전』, 한국사전연구사, 1998. 온라인 참조: "찬유", 종교학대사전,
『네이버 지식백과』online . - 김위석, "심희",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online , 한국학중앙연구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