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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현은 1071년(문종 25) 해안사 주지가 된 후, 1074년(문종 28)에 삼중대사의 법계를 제수하였다.59) 그리고 1079년(문종 33) 가을에는 內殿에서 열린 法席에서 說法主로 초청되었다. 소현은 해안사에 이어서 1079년(문종 33)에 왕명으로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현은 수좌와 승통의 법계를 제수하였다.<ref> 20-22쪽.</ref> | 소현은 1071년(문종 25) 해안사 주지가 된 후, 1074년(문종 28)에 삼중대사의 법계를 제수하였다.59) 그리고 1079년(문종 33) 가을에는 內殿에서 열린 法席에서 說法主로 초청되었다. 소현은 해안사에 이어서 1079년(문종 33)에 왕명으로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현은 수좌와 승통의 법계를 제수하였다.<ref> 20-22쪽.</ref>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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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7년 초부터 해안사(海安寺)에 주석(住錫)하였는데, 10년에는 삼중대사(三重大師)의 법계를 가수(加授)하였다. 태강(太康) 5년 가을 문종 임금이 유사(有司)에게 명하여 내전(內殿)에서 크게 법석(法席)을 베풀고, 왕사를 초청하여 설법주(說法主)로 모신 것은 대송(大宋)에서 왔다가 돌아가는 사신(使臣) 일행이 무사히 바다를 건너가도록 기원하기 위한 것이었고, 그리하여 보리(普利)라는 이자(二字)의 법칭(法稱)을 첨가하였다. 그 후 십육자(十六字)의 법호(法號)를 누가(累加)한 것은 모두 그의 덕행을 현창한 것이다. 다시 그 해에 전주 금산사로 왕명에 따라 이주하였다. 9년에 이르러 수좌(首座)의 직계(職階)를 더하였는데, 이 해에 문종이 승하(昇遐)하고, 순종(順宗)이 즉위하였으나, 4개월만에 순종도 승하하고, 선종(宣宗)이 보위(寶位)를 승계한 원년(元年)이다. | ||
+ | 임금이 단정히 두 손을 마주잡고 앉아 무위태평(無爲太平)을 이루었으며, 편안히 앉아 중흥(中興)을 이룩한 것이 어찌 왕사가 끼친 복리(福利)의 공(功)이 아니겠는가? 비서(批署)를 내려 승통(僧統)으로 추대하였는데, 그 때 왕사의 나이는 47세였다. 비로소 수좌가 되고 (결락) 이어 승통이 되었는데, 지위(地位)란 덕으로 말미암아 진계(進階)되는 것이니 위대하다고 하지 않겠는가?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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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금산사에서 소현의 활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 + | 금산사에서 소현의 활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광교원(廣敎院)의 설치와 둘째 광교원에서 이루어진 장소(章疏)의 간행이다. . 소현은 금산사의 중창과 함께 법상종 관련 장소를 간행·유통할 수 있는 광교원을 두어 법상종단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절의 남쪽 지역에 원을 두고 ‘광교원’이라고 하였다.<ref>23-24쪽</ref>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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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스님은 일찍이 금산사의 남쪽 60보쯤 되는 지점에 승지(勝地)를 골라 광교원(廣敎院)을 창설하고, 유식종에 관한 경론(經論)을 각조(刻雕)하여 광교원에 진장(鎭藏)하였다. 그리고 원중(院中)에 일금당(一金堂)을 따로 두어 노사나불(盧舍那佛)과 현장(玄奘)과 규기(窺基) 두 스님의 상(像)을 (결락) 봉안하였다. 태강(太康) 9년으로부터 스님의 말년에 이르기까지 자은대사(慈恩大師)가 지은 법화현찬(法華玄贊)과 유식술기(唯識述記) 등 장소(章䟽)를 찾아서 32부(部) 공계(共計) 353권을 그 본(本)을 고정(考正)하고 각공(刻工)을 모집하여 판각(板刻)하고는 개인적으로 지묵(紙墨)을 갖추어 인경(印經)하여 유통함으로써 널리 법포시(法布施)를 행하였다. 자세히 상고해 보니, 대송고승전(大宋高僧傳)에 현장은 유식론을 개창한 시조이며, 규기는 이에 유식론문(唯識論文)을 보수(保守)하여 술작(述作)한 종조(宗祖)라고 하였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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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 | 소현은 금산사에서 약 5년 여 동안 주지로 있다가 1084년(선종 1)에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전주에서 개경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소현은 1096년(숙종 1)에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니, 말년이 되어서는 금산사로 하산한 것으로 보인다. | |
− | 소현은 금산사에서 약 5년 여 동안 주지로 있다가 1084년(선종 1)에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전주에서 개경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소현은 1096년(숙종 1)에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니, 말년이 되어서는 금산사로 하산한 것으로 보인다 | + | {{blockquote| |
+ | 스님께서 현화사에 거주할 때, (결락) 완전히 보수하는 것이 급무(急務)라고 생각하여 곧 상계(狀啓)를 갖추어 왕에게 주문(奏聞)하였더니, 임금께서 주청한 것을 가하다고 인가하시고, 선리궁(繕理宮)을 설치하였다. 대안(大安) 4년 기사(己巳)에 역사(役事)를 시작하여 수창(壽昌) 2년 병자(丙子)에 준공하였는데, 그 규모가 굉장히 웅대하였다. 비록 구지(舊址)에 복원하였으나, 장엄한 승개(勝槩)가 완전히 새로 건축한 것과 같았다. 그리고 또 중외(中外)의 각지에 산재해 있는 본종(本宗)의 모든 사찰에 정재(淨財)를 시납(施納)케 하여, 매년 양회(兩會)에 걸쳐 법회(法會)를 여는 것을 연례화(年例化)하였다. 호두명수(虎頭名手)인 뛰어난 화가(畵家)를 모집하여 석가여래(釋迦如來)의 탱화와 장기이사(獎基二師)와 해동육조(海東六祖) 등의 영정을 일당(一㡧)에 모두 그려서 각각 그 절에 봉안하였다. 의학자(義學者)들로 하여금 성상(聖像)을 보고 공경하는 마음을 일으키며, 공경함으로부터 신심(信心)을 내고, 신심이 견고함으로부터 지혜를 발하게 되는 것이라고, 날마다 상생정토(上生淨土)를 발원하도록 권장하였다. 수창원년(壽昌元年) 을해(乙亥) 10월에 성고(聖考)인 숙종께서 경사스럽게 종사(宗社)를 계습하였으며, 마음으로 깊이 불법(佛法)에 귀의하여 (결락) 왕명으로 스님을 청해 법주(法主)로 모시고, 잉왕경(仁王經)을 강설한 것은 천조(天祚)의 성업(聖業)을 기도하기 위함이었다. | ||
+ | 수창 2년 12월 18일에 이르러 왕사께서 금산사 봉천원(奉天院)에서 심야에 경을 보다가 미질(微疾)이 있게 되었다. |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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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17년 8월 27일 (일) 17:19 판
소현(韶顯) | |
대표명칭 | 소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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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자 | 韶顯 |
생몰년 | 1038(정종 4)-1096(숙종 1) |
시호 | 혜덕(慧德) |
휘 | 소현(韶顯) |
탑호 | 진응(眞應) |
자 | 범위(範圍) |
성씨 | 이씨(李氏) |
본관 | 인주(仁州) |
출신지 | 황해북도 개성 |
승탑비 | 김제 금산사 혜덕왕사탑비 |
목차
정의
고려시대의 승려
내용
가계와 탄생
혜덕왕사 소현(韶顯)은 자(字)는 범위(範圍)이고, 속성은 이씨(李氏)로, 1038년(정종 4)에 개경에서 태어났다. 소현의 할아버지(祖)는 한(翰)이고, 아버지는 이자연(李子淵), 어머니는 계림국태부인(鷄林國太夫人) 김씨(金氏)이다. 소현은 이자연의 8남 3녀 중 다섯째 아들로, 이른바 고려 문벌인 인주이씨 가문의 사람이었다.[1]
출가수행
소현은 1048년(문종 2)에 해린에게 낙발함으로써 인주이씨를 대표하여 법상종 승려로 출가하였다. 그리고 소현은 출가한 다음 1070년(문종 24)에 스승인 해린이 입적할 때까지 그의 문하에서 법상종 승려로서 기반을 다져갔다.[2]
소현은 1049년(문종 3)에 복흥사 관단에서 구족계를 받았고, 1054년(문종 8)에 스승인 해린이 현화사의 주지가 됨으로써 그도 해린을 따라 현화사로 이주하였다. 소현은 이 때부터 1070년(문종 24)까지 16년 동안 현화사에 머무르게 되었다. 이 때 해린은 현화사 보수 공사를 추진하였으며, 차례로 왕사와 국사에 책봉됨으로써 명실공이 법상종단을 영도하는 인물이 되었다. 이런 해린의 문하에서 소현은 금언을 수학하였고, 왕륜사 대선장에 나아가 대덕이 되었으며, 중대사가 되었다.[3]
활동
소현은 1071년(문종 25) 해안사 주지가 된 후, 1074년(문종 28)에 삼중대사의 법계를 제수하였다.59) 그리고 1079년(문종 33) 가을에는 內殿에서 열린 法席에서 說法主로 초청되었다. 소현은 해안사에 이어서 1079년(문종 33)에 왕명으로 금산사의 주지가 되었다. 그리고 소현은 수좌와 승통의 법계를 제수하였다.[4]
금산사에서 소현의 활동으로 손꼽을 수 있는 것은 첫째 광교원(廣敎院)의 설치와 둘째 광교원에서 이루어진 장소(章疏)의 간행이다. . 소현은 금산사의 중창과 함께 법상종 관련 장소를 간행·유통할 수 있는 광교원을 두어 법상종단을 정비하였다. 그리고 절의 남쪽 지역에 원을 두고 ‘광교원’이라고 하였다.[5]
소현은 금산사에서 약 5년 여 동안 주지로 있다가 1084년(선종 1)에 현화사의 주지가 되어 전주에서 개경으로 다시 올라오게 된다. 그리고 소현은 1096년(숙종 1)에 봉천원에서 입적하였다고 하니, 말년이 되어서는 금산사로 하산한 것으로 보인다.
입적
12월 금산사 남쪽의 봉천원(奉天院)에서 입적하였다. 세수 58세, 법랍 47세였다. 숙종은 혜덕왕사(慧德王師)라는 시호를 내렸고, 탑호(塔號)는 진응(眞應)이라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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